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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상징 사회과학분야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

2008.09.23

학문의 융합, ‘통섭’을 대중화하다

이화여대 최재천 석좌교수는 스승인 에드워드 윌슨의 저서 ‘Consilience:The Unity of Knowledge’(통섭:지식의 대통합)를 번역하면서 ‘통섭’이라는 단어를 찾아냈다. 최 교수는 통섭을 대중에 알린 주인공이다. <경향신문>

이화여대 최재천 석좌교수는 스승인 에드워드 윌슨의 저서 ‘Consilience:The Unity of Knowledge’(통섭:지식의 대통합)를 번역하면서 ‘통섭’이라는 단어를 찾아냈다. 최 교수는 통섭을 대중에 알린 주인공이다. <경향신문>

“‘통섭’(統攝)은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 하버드대 명예교수)의 책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붙인 말이다. 윌슨 교수는 여러 학문 분야의 지식과 이론을 한데 묶어 새로운 사고체계를 확립하자는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좋은 단어들을 찾았다. 이미 사람들이 많이 쓰는 단어인 convergence, unification, intergration 등에는 선입관이 있어 일부러 19세기 영국의 자연철학자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의 용어를 캐내어 새롭게 활용한 단어다. 나 역시 consilience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똑같은 선입견 문제로 정합, 합일, 통합, 융합 등의 기존 단어를 피하고 통섭을 택했다.”

통섭을 대중화한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에코과학부)가 ‘통섭’이라는 단어를 쓴 계기다. 과학자들은 ‘통섭’, 즉 학문 융합이 미래 과학기술을 특징짓는 뚜렷한 트렌드가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과학계에서는 통섭의 움직임이 다른 학문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통섭이 우리나라 지식계에 자극을 준 계기는 세계적인 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의 책과 그의 제자인 최재천 교수 덕분이다. 에드워드 윌슨은 ‘인간 본성에 대하여’(1978), ‘개미’(1990)로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받은 ‘살아 있는 최고 생물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20여 년 이상 윌슨 교수와 사제관계를 맺고 있는 최 교수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뒤 “오로지 윌슨 교수의 문하생이 되고 싶다”면서 하버드대 대학원 석사 과정에 들어갔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지 알 수 있다.

원효대사가 화쟁사상 설명 때 사용
최 교수는 윌슨 교수의 책을 번역하면서 ‘통섭’이라는 단어를 찾기 위해 우리말 사전을 1년 반 이상 끼고 살았다. 어느 날 우연히 통섭이라는 단어를 찾았는데, 원래는 통할 통(通)에 섭렵할 섭(涉) 자를 쓰는 단어였다. 사전적으로 ‘사물에 널리 통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통섭’을 다스릴 통(統)에 다스릴 섭(攝)으로 확장한 것이다. 최 교수는 처음에 이 단어가 원효대사가 화쟁사상을 설명할 때 자주 사용한 용어라는 사실을 몰랐다. 어느 강연장에서 통섭을 자신이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한 불교학과 교수가 원효대사가 썼던 단어라고 말한 것을 듣고 알게 됐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윌슨 교수와 최 교수 모두 철학에서 용어를 가져다 쓴 셈이다.

최 교수는 통섭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학문의 융합 또는 통섭은 21세기로 접어들며 거의 필연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면서 “학문은 점점 더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풀어내야 하는데, 한 분야의 지식과 방법론으로는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또 “이제 우리 사회가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이 거의 모두 ‘복잡계’ 수준의 문제들로 자연스럽게 여러 분야의 전문성이 필요하게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왼쪽 _ ‘잡종의 미학’을 주장하면서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연구하는 ‘과학기술학’의 대중화를 위해 활발히 활동하는 홍성욱 교수. 가운데 _ 문중양 교수는 계산통계학을 전공했지만, 현재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통섭을 실천하고 있다.오른쪽 _ 카이스트 바이오시스템학과의 정재승 교수는 저술과 방송 활동을 통해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경향신문>

왼쪽 _ ‘잡종의 미학’을 주장하면서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연구하는 ‘과학기술학’의 대중화를 위해 활발히 활동하는 홍성욱 교수. 가운데 _ 문중양 교수는 계산통계학을 전공했지만, 현재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통섭을 실천하고 있다.오른쪽 _ 카이스트 바이오시스템학과의 정재승 교수는 저술과 방송 활동을 통해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경향신문>

이화여대는 서울대에 재직 중이던 최 교수를 초빙하면서 ‘통섭원’을 만드는 등 통섭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학문 간의 벽은 여전히 높았다. 이화여대에서 처음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생명과학 강의를 제안했지만, 퇴짜를 맞은 것이다. 하지만 과학계에서는 최 교수가 주장하는 통섭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과학과 인문학이 결합한 ‘과학사’ ‘과학철학’ 등의 학문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대가 2001년 화학을 전공한 김영식 교수를 동양사학과 교수로 임용했고, 2005년에는 계산통계학을 전공한 문중양 교수를 국사학과 교수로 임용한 것이 단적인 예다. 서울대의 조인래 교수(철학과), 임종태 교수(화학부), 홍성욱 교수(생명과학부) 등이 통섭을 지향하고 있다. 홍성욱 교수는 스스로 ‘잡종의 미학’을 주장하면서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연구하는 ‘과학기술학’의 대중화를 위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바이오시스템학과)는 ‘과학 콘서트’ 등의 저술활동을 통해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는 교수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홍성욱 교수는 과학 분야에서 20년 후의 강력한 트렌드는 컨버전스, 즉 융합이라고 말한다. 홍 교수는 “과학과 기술, 순수과학과 응용과학의 경계가 섞이면서 새롭게 만들어진 분야가 연구를 주도할 것이라고 예측한다”면서 “연구대학과 국립연구소의 흥망성쇠는 이러한 융합의 경향에 기존의 학문분과 제도를 어떻게 잘 접목시키느냐에 달려 있다”고 분석한다. 정재승 교수 역시 “실제로 각 분야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상당 부분 많이 해결됐다”면서 “21세기에는 사람들의 관심도 달라졌고, 새로운 아이디어나 관심은 영역의 경계에 있는 것만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즉 20세기에는 한 분야의 전문가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이제부터는 인문학도 잘 알고 과학도 잘 아는 사람이 풀어야 할 문제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서울대 문중양 교수는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문 교수는 “인문학적 소양은 텍스트 해석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라며 “세계의 모든 활동과 지식, 문자가 아닌 음악이나 영상 모두 텍스트이기 때문에 과학도에게도 텍스트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서울대 등 자유전공학부 신설
대학도 통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학문 융합의 시스템을 마련하느라 분주하다. 서울대는 내년부터 시작하는 교육과학기술부의 WCU(World Class University·세계적 수준의 연구중심대학) 프로젝트를 준비하기 위해 통섭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공대는 ‘미디어아트공학’(음악+미술+공학) ‘나노바이오공학’(화학+재료공학+기계공학+의학) 등 4개 학과 개설을 추진한다.

즉 음대·미대 교수가 공대로 자리를 옮기고, 의대 교수가 사회대로 자리를 옮기는 식이다. 또 서울대는 9월 말 최종안이 공개되는 자유전공학부를 추진하는 등 통섭을 가장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고려대 역시 인지과학 분야를 추진하고 있고, 한양대는 공대와 의대를 중심으로 생명과학과 등의 분야를 추진하고 있다. 연세대는 2010년 개교 예정인 송도캠퍼스에 융·복합 관련 연구소를 개설할 예정이고, 이화여대는 파주에 설립하는 새 컴퍼스의 화두를 ‘학문 융합’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런 대학의 움직임에 비판적인 목소리도 많이 나오고 있다. ‘통섭을 위한 통섭’이라는 비판인데, 아무런 준비도 없이 교수들만 자리를 옮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 서울대의 한 교수는 “통섭은 장기적으로 봐야 하는데, 교육 과정의 개혁 없이 교수만 데려다놓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비판했다. “겉만 번드르르한 전형적인 전시행정 중 하나다”라고 비난하는 교수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통섭에 적극적인 교수들은 이구동성으로 ‘교육 과정의 개혁’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중양 교수는 “문과·이과를 나누는 것부터 없애야 하고,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단과 시스템을 개혁해야 한다”면서 “그리고 교수도 표면적으로만 학문 융합을 할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마인드부터 길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재승 교수는 “자기 학문에 대한 이기주의는 분명 있지만, 그것을 빨리 푸는 방법은 좋은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다”면서 “여러 분야의 지식인이 함께 노력해야만 풀 수 있는 문제를 발견하면 경계가 자연스럽게 허물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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