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첸 전쟁을 다룬 영화들
<브라트> 2부작의 주인공 다닐라 역을 맡은 세르게이 보드로프 주니어의 영화 경력은 혼란했던 러시아의 1990년대를 관통한다. 그의 데뷔작은 1차 체첸 전쟁을 소재로 한 1996년 <코카서스의 죄수>였다. 1997년 <브라트>와 2000년 <브라트 2>에선 체첸 전쟁 참전용사 경력의 킬러로 출연했다. 2002년 <전쟁>에선 2차 체첸 전쟁에 장교로 참전한다. 당대 러시아를 관통했던 경제위기와 모라토리엄 그리고 체첸 전쟁을 영화 속에서 전부 체험한 셈이다.
체첸 전쟁은 소련 연방 해체 후 러시아가 겪은 재앙의 최종판이다. 고르바초프가 꿈꿨던 ‘독립국가연합(CIS)’의 꿈이 무너진 자리엔 15개 독립국가가 급작스레 들어섰다. 소련 시절 경제는 국가소유였고, 서로 긴밀하게 결합된 순환구조였다. 갑자기 그 연결고리가 끊어지자 경제는 곤두박질치고 혼란은 극심했다. 국유재산은 왕년의 공산당 간부와 신흥 재벌의 유착으로 조각조각 삼켜졌다. ‘올리가르히’라 불린 기득권 집단의 탄생이다. 국민의 삶은 소련이 그리울 만큼 망가졌다.
그런 상황에서 군대가 충실히 유지될 리 없었다. 인구 120만의 체첸 앞에서 초강대국 러시아의 자존심은 산산이 박살 났다. 굴욕을 갚기 위해 러시아는 울부짖었고, 하늘에서 강림하듯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이라는 이름의 정치신인이었다.
1차 체첸 전쟁과 평화의 가능성 푸시킨의 시, 이를 바탕으로 쓴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을 1차 체첸 전쟁으로 옮겨 만든 세르게이 보드로프 감독의 <코카서스의 죄수>는 배경만 현대로 바꿨을 뿐 원작과 거의 같은 이야기를 보여준다. 감독의 솜씨도 있지만 해당 지역의 지정학적 상황이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작은 제정 러시아가 카프카즈 산악지대에서 타타르인들과 기나긴 항쟁을 펼치던 시절, 포로로 잡혀 인질이 된 러시아 장교 질린과 코스틸린의 고생담이다. 러시아 제국주의의 시각이 강하지만 대문호들의 필력과 고증 덕분에 카프카즈 지역민들의 생활과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시즌2를 찍던 체첸 산간에서 신병 질린과 고참병 샤샤가 포로가 된다. 아들이 러시아 감옥에 갇힌 체첸인 압둘은 인질교환을 위해 둘을 산다. 질린과 샤샤의 기약 없는 인질생활이 시작된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포로교환에 무관심하다. 압둘은 인질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 교환이 안 되면 둘은 죽은 목숨이라고 말한다. 샤샤는 탈출할 궁리뿐이지만 질린은 압둘의 어린 딸 디나, 머슴 하산과 친해진다. 잔인한 운명이 그들 앞에 다가온다. 체첸인은 적이라는 샤샤의 경험적 판단과 인간적 정을 간직한 질린의 입장은 대조적이지만 영화는 둘 다 원치 않는 결말로 치닫는다.
2차 체첸 전쟁의 무자비 속으로 <브라트> 연작을 연출했던 알렉세이 발라바노프의 2002년 작품 <전쟁>은 2차 체첸 전쟁을 소재로 1차 전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야만적 전장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이 영화에는 포로로 잡힌 러시아군을 참수하는 스너프 영상 ‘체첸 클리어’ 묘사도 나온다.
카프카즈 산악지대는 여전히 전쟁 중이다. 체첸 독립군이 러시아군과 영국 사업가를 납치하고 몸값을 요구한다. 인질을 구하기 위해 체첸으로 향하는 이들의 모험 속에 적대적 공생으로 치닫는 러시아와 체첸의 현실, 속고 속이는 전장 상황이 허무적으로 묘사된다. 독립투쟁은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고, 극단주의 세력의 연이은 테러로 러시아 국내를 격분케 함은 물론 체첸 문제에 방관하거나 온정적이던 서방의 외면을 불러온다. 결국 체첸은 새롭게 권좌에 앉은 푸틴의 ‘평탄화’ 전술로 초토화된다.
2차 체첸 전쟁의 승리로 노쇠한 옐친의 권력을 물려받은 푸틴은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치밀하게 계획해 희생을 감수하고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국민은 지지한다는 것. 그 경험은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 2014년 크름반도(크림반도) 병합과 돈바스 전쟁, 그리고 2022년의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체첸 전쟁을 기억해야 할 이유다.
‘안정화’된 체첸의 현재 러시아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 체첸자치공화국 수장에 독립전쟁 온건파에서 친(親)러시아 진영으로 전향한 아흐마드 카디로프를 등용한다. 초대 수장이었던 카디로프가 2004년 암살된 후 갓 서른의 나이에 대통령에 취임한 2대가 바로 아들 람잔 카디로프다. 겉으로 체첸 독립운동은 소멸했고, 잔존세력은 ISIS(이슬람 근본주의 표방 국제테러단체) 등으로 흡수된 상태다. 이제 체첸에 평화가 찾아온 걸까? 다큐멘터리 <웰컴 투 체첸>에서 볼 수 있는 체첸의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모스크바는 수만의 전사자를 낸 1~2차 체첸 전쟁처럼 무장투쟁을 벌이지만 않는다면 안심이다. 카디로프 지배하에서 체첸자치공화국은 샤리아법(이슬람의 종교법)과 비민주적 독재로 악명이 높지만 이들(카디로프 정권)이 극단주의 세력만 관리해주면 인권유린은 부차적 문제일 뿐이다. 보수적 이슬람주의 땅을 사실상 군벌이 장악한 셈이다. 그런 체첸에서 성소수자들이 겪는 끔찍한 실상을 영화는 폭로한다. 람잔 카디로프는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체첸에는 동성애자가 없다”고 호언한다. 영화에는 피해자의 증언과 동영상이 가득하다. 2017년에만 100여명 이상이 불법 구금되고 3명 이상 살해된 것으로 조사됐다. 체첸 내 상황에 맞선 러시아 LGBT(성소수자) 활동가들의 생명을 건 싸움이 화면 가득 펼쳐진다. 체첸의 극단화는 푸틴이 장악한 러시아 전역으로 확산하는 중이다. 활동가들의 신변이 위협받는 건 물론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용기 있는 실천으로 2년여간 151명의 성소수자가 국외 탈출을 감행했다. 캐나다 내 연대 단위들의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과거 흑인노예들을 구출하던 비밀조직)가 44명의 망명을 이끈다. 권위주의 국가들의 인권문제를 거론하던 미국(트럼프 집권기)은 단 한명도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체첸 상황은 지구 반대편의 어디에 붙었는지도 모를 산동네 이야기가 아니다. 체첸의 문제는 곧 강대국 러시아의 우경화 수준을 진단하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체첸군의 악명이 뉴스를 통해 수시로 등장한다. 이뿐 아니라 러시아 내의 반 푸틴 세력을 테러하고 암살하는 전위부대로 람잔 카디로프의 사병들이 동원되고 있다. 대놓고 푸틴 정권이 손대지 못할 문제를 알아서 처리해주는 카디로프를 모스크바가 예뻐하지 않을 리 없다. 이곳 문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볼 수 없는 이유다. 체첸이 처한 현실은 강대국의 위선과 불의를 폭로하는 분명한 사례다. 우리가 무관심으로 일관한다면 이 땅의 현재는 머지않은 미래에 결국 우리 집 현관에 도달할 것이다.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