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소련 해체 후…러시아의 끝없는 추락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2022.07.11

<브라트> 2부작

흔히 북반구와 서방에 편중된 부유한 국가들을 ‘1세계’, 남반구와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에 밀집된 가난한 국가들을 ‘3세계’라 칭한다. 그렇다면 ‘2세계’는 어디인가. 바로 소련이 맹주로 있던 동구 현실사회주의 블록이다. 세계의 3축을 이루던 거대진영 중 1축이 증발해버렸다. 그 뒤에 남은 건 무엇일까.

영화 <브라트> 시리즈 주인공 다닐라의 그라피티와 동상 / abrakadabra.fun

영화 <브라트> 시리즈 주인공 다닐라의 그라피티와 동상 / abrakadabra.fun

몰락 이후, 술주정뱅이 옐친의 시대 소련이 해체될 때 다소간의 혼란은 예상했지만, 러시아 국민은 초강대국의 저력으로 곧 사태를 수습하고 더 잘살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현실은 정반대로 치달았다. 해체 이전 라이벌 미국의 절반 수준 경제 규모를 가졌지만, 대부분의 부를 국가가 소유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개혁만 이뤄졌더라면 러시아인의 꿈은 실현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대한 국부는 혼란기에 잇속을 차린 과거 공산당 관료와 신흥재벌들에게 넘어갔다. 그들은 ‘올리가르히’라는 기득권 집단이 돼 국가의 부와 권력을 독점했다.

1990년대 초 소련의 1인당 국민소득은 5000달러가 넘었다. 1990년대 중반 러시아 1인당 소득은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당시 세계를 휩쓸던 신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했다. 그 결과 초(超)인플레이션이 발생해 러시아 국민의 90%가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1억4000만 인구 중 2000만명이 공식 실업자로 추산되는 참상이 벌어졌다. 소련이 자랑하던 복지제도는 작동을 멈췄다. 임금을 받지 못한 경찰은 부패하거나 범죄 집단으로 변했다. ‘브리트바’라는 마피아가 권력과 결탁해 무소불위의 행패를 부려도 막을 자가 없는 세상이었다.

소련 시절 국민의 물질적 형편은 서방에 비해 낮았지만 교육과 문화예술 접근성은 높았다. 2억9000만 소련 국민의 연간 영화 관객은 20억명이었다(!). 그게 5000만명으로 97.5% 감소했다(!!). 몰락이란 표현이 모자랄 지경이다. 한해 최고 흥행작의 관객 수가 50만명이던 시절이다. 사회 전 분야의 붕괴였다. 그런 기나긴 암흑기를 뚫고 부흥의 희망을 밝혀 당대 러시아의 사회상을 담아낸 작품이 알렉세이 발라바노프 감독의 <브라트>(‘형제’) 2부작이다.

러시아판 ‘택시 드라이버’의 세계 1990년대 ‘잃어버린 10년’ 동안 러시아는 추락을 거듭했다. 경제는 붕괴하고 민주주의는 정착하지 못했다. 소련 체제가 붕괴하자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이 이어졌다. 그중 대표격인 체첸 자치공화국과의 전쟁에서 러시아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후유증이 소련을 붕괴시켰듯 체첸에서의 졸전은 막대한 희생은 물론 국가적 자존심도 무너뜨렸다. 그 참전용사 중 1명, 행정병 출신이라며 씩 웃는 청년 다닐라가 <브라트>의 주인공이다.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할 일도, 반기는 이도 없다. 노모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성공한 사람’ 형 빅토르를 찾아보라고 한다.

빅토르는 범죄세계의 해결사였다. 그는 지역의 레드 마피아 보스 의뢰로 경쟁조직 체첸 마피아 보스 암살을 준비 중이다. 다닐라는 형을 돕기 위해 혼자 암살을 실행한 후 도주하다 트램 운전사 스베타와 만나게 된다. 그는 시장에서 깡패들에게 시달리던 고프만을 도와주고, 하루하루 쾌락을 좇는 또래 여성 카트와도 만난다. ‘도시’를 상징하는 존재들과 관계를 맺어가며 다닐라는 뒷골목 세계의 항쟁 속으로 빨려든다.

영화 <브라트> 포스터

영화 <브라트> 포스터

<브라트>는 (배경인 1990년대 러시아 상황을 제외하면) 그저 이국적 배경의 액션 누아르다. 하지만 미국의 월남전 패배 이후 상실의 시기에 <택시 드라이버>, <람보>(1편)의 탄생에 비견될 만한 사례이자 현대 러시아인들에겐 그야말로 ‘전설을 넘어 레전드 오브 레전드’가 된 영화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비교할 수 없는 <브라트>의 조잡하고 음울한 배경은 구닥다리 느낌이 물씬 풍긴다. 조금만 몰입해보면 이 영화만큼 당대 러시아를 극사실주의로 잘 담아낸 작품이 없다. 날것 그대로 생생하게 억지로 살아가는 힘없는 이들과 그들을 등쳐먹는 악당, 아무 도움 안 되는 공권력, 범죄자가 동경 받는 선악 뒤바뀐 세상이 압축돼 있다. 여기에 홀연히 ‘반(反)영웅’이 나타나 심판을 펼친다.

다닐라는 순박하고 우직하다. 그는 자신과 동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살인 기술을 배웠고 어떤 원호 대책도 없이 세상에 던져졌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으면 폭력을 행사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약자를 괴롭히면 응징해야 한다. 단순함이 그의 효율성을 극치에 이르게 한다. 불필요한 폭력, 약자 학대와는 거리가 멀다. 고독한 반영웅에 당대 러시아인들은 현실을 투영하며 열광했다. 1980년대 자유와 개혁을 원하던 청년세대에 빅토르 최가 아이콘이었다면 1990년대 궁핍하고 좌절한 세대에게 다닐라는 그들만의 영웅이었다.

영화 <브라트 2> 포스터 / DAUM 영화

영화 <브라트 2> 포스터 / DAUM 영화

미국으로 떠난 주인공 복수와 응징이 끝난 후 다닐라는 어두운 ‘도시’의 근원까지 확인해보겠다며 모스크바로 떠난다. 영웅 훈장을 탄 전우와 재회한 그는 친구의 동생이 미국 아이스하키팀에 스카우트돼 스타가 됐지만, 불공정계약으로 착취당한다는 이야길 듣는다. 친구는 미국 마피아 사업가와 동업하던 레드 마피아에게 살해당한다. 이제 다닐라는 러시아의 영혼을 좀먹는 타락한 자본주의의 본산, 미국으로 복수를 위해 친형 빅토르와 비행기에 오른다.

<브라트 2>는 너무나 대조적인 두 형제가 각각 미지의 땅 미국에서 벌이는 로드무비로 변모한다. 1편과 2편 사이 3년 동안 러시아는 많은 변화를 겪는다. 무능하고 부패한 옐친에서 KGB(소련의 비밀정보기관) 출신 푸틴으로 정권이 교체되고 강대국 러시아의 부흥을 꿈꾸는 민족주의 정서가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1편의 허무감 대신 2편은 풍자 개그가 지배한다. 미국에서 다닐라는 이상향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국의 빈부 격차와 인종차별 실상을 체험한다. 조국의 가난 때문에 흩어져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동포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 과정에서 서방의 환상이 무너진 자리에 민족주의와 반미주의의 그림자가 엿보이기 시작한다.

반면에 친형 빅토르는 돈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며 미국을 예찬한다. 감독은 이를 통해 당대 두 부류의 러시아인을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다닐라는 미국으로 상징되는 서방에 대한 실망, 말쑥한 차림 이면에 권력을 악용해 부를 쌓는 기득권을 거부하고 소박하고 진실한 삶을 원한다. 그런 다닐라 역을 맡은 배우 세르게이 보드로프 주니어는 시대의 아이콘에 등극하지만 불과 2년 후 촬영사고로 사망하고 시리즈는 이어지지 못한다. 그 덕분에 다닐라는 전설로 온전히 남을 수 있었다. 소박한 러시아인들의 자존심과 향수를 응축한 것 같은 영웅전설의 주인공으로. 당시 러시아인들의 분노가 시간이 흘러 국수주의적 행보로 이어진 현실을 생각하면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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