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역을 나서면 광장에서 김소월의 시 <왕십리>를 만날 수 있다. “가도가도 왕십리(往十里) 비가 오네”라는 그의 노래는 우울하지만, 주변이 온통 개발되면서 젊고 화려하고 풍요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왕십리는 무학대사의 한양 천도에 얽힌 전설을 지명에 담고 있다. 왕십리 부근에 도읍을 정하려 했으나 우연히 만난 늙은이로부터 “10리를 더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여 왕십리가 됐다. 진위 여부는 둘째로 치고 왕십리엔 무학대사가 머물렀다는 무학봉이 있고, 도선국사의 설화가 남은 도선동이 있다. 무학대사는 초등학교부터 여고까지 이름을 남겼으니 왕십리와는 뗄 수 없는 인연이다.
왕십리를 대표하는 장소는 역이다. 1974년 <문학사상>에 발표한 조해일의 중편소설 <왕십리>는 그 역 주변의 정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김소월의 ‘가도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우선 시야에 나타난 것은 길 좌측에 보이는, 규모를 짐작할 수 없는 거대한 저탄장이었다. 그리고 그 저탄장의 전체 색깔을 닮은 지붕 낮은 판잣집들이 길 오른쪽으로 어깨동무라도 하듯 줄을 이어 지어져 있었다.” 문경이며 어디쯤 석탄광산에서 기차로 실어 나른 석탄은 왕십리에 모였다가 인근 공장에서 연탄으로 다시 태어났다. 주변은 온통 석탄가루가 날려 길이고 지붕이고 할 것 없이 검게 덮여 있었고, 조해일의 표현대로 ‘공기조차 석탄 빛깔인 듯’했다.
왕십리역에서 석탄이 치워진 후 새로운 역사가 들어서고 대형 쇼핑센터도 함께 들어왔다. 경춘선이 지나고 분당선이 이어졌을 뿐 아니라 지하철이 지나가 서울과 경기도, 강원도 일대까지 어디로나 연결된 사통팔달의 요지가 됐다. 뉴타운 사업이 추진된 후 왕십리는 새로운 상업지역과 부도심으로 변했다. 조해일이 그린 대로 “판잣집들은 나무판자도 모자라서인 듯 천막 조각이나 헝겊 누더기, 또는 종이 상자 같은 것까지 이어붙인 게 보였고, 어떤 것은 자신의 키보다도 지붕이 낮았다”던 골목 안 집들은 어딜 봐도 찾을 수 없다. 큰길가는 높은 빌딩과 오피스텔이 하늘을 가리고 있고, 뉴타운 사업은 헝겊 누더기 판잣집들을 모두 밀어내고 아파트촌으로 바뀌었다.
왕십리 광장을 건너 도선동 쪽 골목길을 들어서면 그나마 예전의 집들이 드문드문 남아 있다. 아주 오래된 집은 집 장수가 지어 팔았던 개량 한옥들이다. 몇 채 남지 않은 한옥은 잘 다듬고 새 칠을 해 운치와 고풍으로 골목길 행인을 맞는다. 골목 안 대부분은 1990년대 이후 지은 다가구 주택들이다. 이곳에서만 70년을 살았다는 주민은 “오래전 살았던 사람들은 다 떠났다. 나처럼 초등학교부터 산 사람은 얼마 남지 않았다. 골목 안 주민들은 옆집 아침 반찬까지 다 알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제는 무심한 이웃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시대에 동네 이야기를 물어보니 반가운 듯 노인은 계속 어깨를 어루만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판잣집이 기와집으로 변했다가 블록집으로, 또 벽돌로 지은 3·4층 집으로 변해가는 탈바꿈의 과정을 그는 모두 지켜보았다. 자신의 집도 판잣집을 헐고 양철대문에 2층 벽돌집으로 지었다고 한다. 예전 미나리꽝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은 이미 사라졌고, 판잣집 시절 이야기도 몇몇만이 기억할 뿐이다.
도선동 시장골목은 영광의 세월을 지났다. 이제는 몇 집 남지 않은 가게들이 골목에 남아 있을 뿐이다. 생선가게 주인은 가게를 연 지 12년이 됐다는데 “그때도 시장은 거의 사라졌을 때다. 왕십리역에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얼마 남지 않았던 가게들도 싹 문을 닫았다”고 한다. 김치 한 포기를 얻어가던 할머니는 털털한 웃음을 짓는 주인을 가리켜 “장삿집이 아니라 이웃집”이라고 했다. 시장 꼴을 보니 이곳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돈을 벌겠다는 욕심을 진즉 버린 듯해 보인다. 착한 이웃으로 이문 덜 남기고 때로는 퍼주고 목청 높일 일 없이 허허 웃으며 지내는 이들만 남았다.
지금은 사라진 ‘왕십리 똥파리’
쇠락의 와중에도 골목에 두 곳 남은 과일가게는 꽤 커보였다. 과일도 색색이 구색을 빠뜨리지 않았고, 더러 고급 과일도 눈에 띈다. 근처에 대형마트가 있는데도 풍요로운 과일가게가 살아남은 사연이 궁금했다. “치성드리는 보살도 많이 살고 절도 있어서 과일이 꽤 팔린다”고 했다. 골목 안쪽으로 긴 장대에 걸린 붉고 하얀 깃발이 눈에 띄었다. 왕십리에는 아기씨 신당이 여럿 있었다고 전한다. 북쪽 마을에서 전쟁을 피해 남으로 피란 온 다섯 공주가 왕십리에서 찔레꽃을 입에 물고 세상을 떴다는 이야기가 왕십리 신당의 유래다. 꽃다운 공주들이 하필이면 왕십리에서 그것도 찔레꽃을 입에 물고 한을 남겼을까. 전설 속 왕십리는 왕궁터를 비껴간 안타까움이 있고, 신화 속 왕십리는 운명이 끊긴 한 많은 장소다.
시장 가게들이 잇대선 길고 큰 건물은 예술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큰 건물 한 채가 통으로 학교라는데 음악과·미술과·연극영화과 간판이 붙어 있다. 학교에 곁들여 교회만 세 곳이 명판을 붙이고 있는데, 그중 한 곳이 평양신학 신학원이다. 아마도 저 북쪽에서 전쟁과 난리를 피해 남으로 내려왔나 보다. 공주들과는 다른 운명으로 입에 찔레꽃을 물고 세상을 떠난 대신 왕십리에 터를 잘 잡아 살아남은 것 같다. 천명을 따르고 전하는 일도 살아 있어야 가능한 일이고, 허공을 떠도는 한 서린 혼백은 신통이 열려야 겨우 남의 입을 빌려 세상 소식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절이며 무당이며 평양서 내려온 교회를 보니 골목시장 과일도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다만 골목길에 찔레꽃은 찾아볼 수 없다.
도선시장 골목에서 곁으로 비켜난 골목엔 7080을 내건 술집들이 줄을 잇는다. 술집 바깥벽에 기타가 걸려 있고 양은 주전자를 간판 삼아 내놓은 집도 보인다. 유행가는 “왕십리 밤거리에 구슬프게 비가 내리면… 눈물을 삼키려 술을 마신다 옛사랑을 마신다”고 왕십리의 슬픈 사랑을 노래한다. 이 골목은 딱 그 노래가 어울리는 풍경이다.
조해일의 소설 <왕십리>는 발표된 2년 뒤 임권택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한국 고전영화로 유튜브에서 전편을 볼 수 있는데, 이야기의 주 무대인 당구장은 그 비슷한 분위기의 장소가 지금도 남아 있다. 영화 덕에 1970년대 중반 왕십리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다. 석탄을 재둔 야적장과 금호동 쪽 산비탈의 판잣집들이 필름에 살아 있고, 주인공이 여인을 만나던 여관방은 지금이나 그때나 변치 않았다. 영화 속 여주인공이 깡소주를 마시며 “살기 힘들어”라고 외치던 안방 자개장도 왕십리 일대가 주산지였다. 왕십리에서 중앙시장까지 이어지던 길가엔 자개와 나전칠기 재료상이 계속됐다. 길에서 들어선 골목 안에는 장롱에 자개를 붙이던 어두운 공장들이 있었고, 큰길가 전시장에서 주문을 받으면 재료상에서 공장으로 자개를 나르고 공장에서 자개장으로 태어나던 사슬이 이 동네 일대를 흥청거리게 했다. 자개장은 애물단지가 된 지 오래다. 자개를 붙이던 기술자들은 시류에 떠내려갔고, 골목 깊숙한 곳에 남은 다른 업종의 공장엔 우즈베키스탄 출신 노동자가 금발을 쓸어 올리며 일하고 있다. 왕십리 골목은 흥청거리던 시대의 마지막 자락을 추억하는 곳이다.
영화 속에서 최불암은 주인공인 신성일에게 술을 먹이며 ‘왕십리 똥파리’라고 외친다. 똥파리는 왕십리의 또 다른 별명인데, 아주 예전 시내에서 퍼온 인분들을 왕십리 채소밭 두엄통에 모아두었던 세월의 소산이다. 지금엔 “똥 퍼!”를 외치는 똥꾼들도 없고, 왕십리엔 파리 한 마리 미끄러지지 못할 만치 번화한 곳이 되었지만 아직도 아이들은 놀이터 미끄럼틀에서 “왕십리 똥파리”를 외쳐댄다.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한 사랑’
골목이 끝나갈 때쯤 눈에 띄게 큰 건물이 보인다. 한국기원. 우리나라 바둑의 모든 것이 벌어지는 곳이 왕십리 골목 끝에 있다. 한국기원 앞을 거슬러 올라오면 바둑교실 건물도 눈에 띈다. 이창호나 이세돌도 이 골목을 오갔을 것 같다. 골목 안에서 붕어빵을 사먹거나 어묵꼬치를 집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골목 붕어빵 장사도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이세돌은 인공지능과 마지막 바둑판을 벌였고, 왕십리의 한국기원 건물은 계절 탓인지 먼지를 덮어쓰고 있다. 김소월의 노래처럼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기원건물과 세상의 오래 묵은 먼지를 쓸어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남아 있는 왕십리 골목길은 1990년대에 환골탈태한 모습이다. 빽빽한 연립주택들이 자리 잡고, 철공소며 자개공장이 있던 곳은 봉제공장들이 들어와 임무교대를 했다. 동대문에서 실어온 원단은 이곳 워싱공장에서 전 처리를 하고 성수동 인근의 염색공장에서 물을 들여 다시 봉제공장으로 전해진다. 왕십리에는 워싱공장이 주로 있고 군데군데 봉제공장도 남아 있다. 골목 안 공장 문엔 ‘직공구함’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아마도 한세월은 그 자리에 붙어 있었을 듯 색은 바랬고, 네 귀퉁이는 떨어져 바람에 흔들리고 있지만, 굳건히 제자리를 지킨다. 살아가는 일이 흔들리는 일이고 버티는 일이며 살아남아야 하는 일이란 것을 종이쪽 한 장에서도 배울 수 있다. 이 골목 공장들과 바쁜 일손들은 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세월은 그들을 밀어내지 못했고, 빛은 바랬을지언정 이리 와서 함께 살자는 외침은 제자리를 지켜냈다.
주변이 개발되면서 골목 안도 새로운 주인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낡은 건물들은 리모델링해서 새롭게 빛이 난다. 주인도 젊고 손님들도 젊고, 그곳에서 파는 물건들도 오랜 골목과는 대비된다. 커피집도 있고 수공예 소품가게도 자릴 잡았다. 감각적이고 고운 빛깔이 조심스럽게 골목을 물들이고 있다. 아직은 동네주민들과 근처 건물의 직원들이 손님의 대부분이니 젠트리피케이션을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왕십리는 유난히 신화와 전설과 문학과 예술이 넘치는 곳이다. 왜 그랬을까, 이유를 알 수 없으나 평론가 김병익은 조해일의 <왕십리>를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한 사랑”이라 표현했다. 굶주림은 아니더라도 마음이 가난했던, 소외의 가난을 겪었던, 시대를 가난하게 살았던 마을이 왕십리였을 수 있다. 지금은 말끔히 벗겨진 가난의 기억과 비련이 ‘가도가도 왕십리’에 남아 있다. 왕십리 골목을 걸을 때면 어쩐지 비틀거려도 좋고 나지막이 소리 내 <59년 왕십리>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