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골목-취업·스펙·허영·향락 뒤섞인 ‘욕망의 거리’

김천 자유기고가
2020.02.24

서울 강남역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역동적인 곳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지하철 2호선과 분당선 강남역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테헤란로로 이어지는 상업지구와 서쪽 서초동 법조타운으로 연결되는 관문이다. 아침이면 출근하는 직장인과 수도권 남부지역 대학 등교버스에 오르는 학생들과 인근 학원으로 등교하는 재수생들, 낮이면 어학원과 유학원에서 내일을 위해 공부하는 청년들, 저녁이면 각종 자격증학원에서 배우는 젊은이들로 붐빈다. 밤이 되면 클럽과 유흥가가 흥청망청이고, 심야까지 차를 잡기 위해 거리는 전쟁터가 된다. 강남역엔 우리 시대 번영과 고민이 몰려 있고, 골목길엔 그 그림자가 짙게 도사리고 있다.

[골목 내시경]강남역 골목-취업·스펙·허영·향락 뒤섞인 ‘욕망의 거리’

강남 일대가 허허벌판이던 1970년대 말까지 이 지역은 뉴욕제과와 제일생명 건물만이 좌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골목이랄 것도 없었고 멀찍이 들어선 아파트 몇 채와 한참 건설 중인 상가건물만 보일 뿐이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강남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서초동에 법조타운이 들어서면서 강남역 일대는 불타올랐다. 골목엔 주점과 유흥가가 빈자리가 없이 번창했다. 지금도 강남역 골목길에는 당시 지어진 건물 몇 채가 남아 있어 주변에 새롭게 지은 빌딩들과 명백한 대비를 이룬다.

서초동 법조타운 들어서며 번창

강남역 일대의 골목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것은 젊은층이다. 골목길마다 어학원·유학원·취업학원이 번창하고 있다. 길가에 어학원 안내판을 든 사람들이 드물지 않게 있고, 어떤 건물엔 10개가 넘는 유학원 간판이 붙어 있다.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을 나오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외국어 몇 개쯤은 술술 할 수 있어야 하며 해외연수도 빠뜨리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그 밖의 자격증도 따두어야 하는 것일까. 그런 무거운 갑옷을 갖춰 입고 취업의 전쟁터에 나가서 살아남기 위해 청춘은 강남역 골목길을 바삐 오가고 있다.

젊은 취향과 유행의 중심지가 강남역 일대이다.

젊은 취향과 유행의 중심지가 강남역 일대이다.

과거 랜드마크였던 뉴욕제과와 제일생명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지금은 대형 어학원 건물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영어만으로 부족해 중국어를 배우고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를 배우는 젊은이들도 많다고 한다. 골목 안 유학원 옆에는 워킹홀리데이로 일하면서 외국어도 배우라고 권하는 소개소도 보인다. 그 한편으로 낮시간 굳게 문을 닫은 클럽은 무료입장 이벤트 광고판을 요란하게 붙여놓고 있다.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상표가 골목길을 온통 덮고 있다. 지금 청년들의 부모들도 아련하게 기억할 만한 오래전의 추억들을 파는 목로주점도 눈에 띈다. 최근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일식 주점들도 골목 안에 가득 차 있다.

강남역 뒷골목 전당포는 명품만을 취급한다고 했다. 예전처럼 카메라 따위는 잡지 않고 고급 차나 명품 아니면 귀금속만을 다룬다. 면접용 정장을 빌려주거나 팔고 있는 전문점도 있다. 반드시 합격한다는 보장이 없으니 옷을 빌려 입고 면접장을 들어서야 하는 사정을 안쓰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젊은이들에겐 빌리는 것이 오히려 편하단다. 종업원 이야기로는 직업과 사업장별로 면접관들이 좋아할 만한 분위기를 골고루 갖추고 있어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각종 어학원과 취미학원이 강남역 골목에 몰려 있다.

각종 어학원과 취미학원이 강남역 골목에 몰려 있다.

파고다어학원 뒷골목부터 교보타워에 이르는 길은 골목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화려한 건물이 올라가 있다. 간간이 남아 있는 강남 개발 초창기의 상가건물 대부분은 재건축을 앞두고 있단다. 부동산 중개업자는 “연건평을 두세 배로 늘려 높이 지을 수 있다. 건물주들이 대부분 큰손이라서 돈에 구애받지 않고 건물을 짓는다”고 설명했다. 오피스텔이건 사무실이건 수익률이 높고 공실률도 낮아 물건을 잡기가 바쁘다고 한다. 부동산 업소마다 24시간 상담, 심야 출장상담이라고 붙어 있는 것도 이 동네 부동산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강남역 11번 출구 뒤편 골목의 이름은 여명길이다. 골목은 상대적으로 오밀조밀한 건물들이 줄지어 있고, 어학원과 가게들도 건너편과는 규모의 차이가 있었다. 골목 어귀에는 멀티방 홍보를 위해 광고판을 메고 전단을 나눠주는 아주머니들의 모습도 흔하다. 오가는 젊은이들을 이끄는 호객도 자연스럽다. 멀티방이 뭐냐고 묻자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하고, 쉬었다 갈 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가능한 곳”이라며 웃는다. 방에서 무엇을 하건 이용하는 사람 마음이라고 한다. 노래방도 코인노래방이 대부분이고, 한참 유행하던 ‘방 탈출 게임방’도 곳곳에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 뭘 먹고 무엇을 입으며 어떤 것을 즐기는지 알고 싶으면 단연 이 골목을 한 바퀴 둘러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대형 스파 매장과 운동화 가게들이 줄지어 있고 카페들은 ‘양궁카페’니 ‘타로사주카페’ 등 특색 있는 업소들이 많았다. 간간이 ‘고양이카페’도 여럿 박혀 있다. 역시 지금은 고양이의 시대임이 분명하다.

점심시간 간단히 요기를 때울 푸드트럭이 골목의 명물이다.

점심시간 간단히 요기를 때울 푸드트럭이 골목의 명물이다.

유학원에서 내건 간판들도 예전과는 분명 달라졌다. 과거 미국 유학이 주류였다면 요즘엔 덧붙여 중국 대학을 내건 곳도 많았다. 중국 대학의 출장 입시시험장 간판을 내건 곳도 여럿 있었다. 국내 대학엔 중국인 유학생들이 몰려오고 있고, 중국 대학엔 한국인 유학생들이 몰려가고 있는 셈이다. 토플과 토익 등이 익숙한 세대에 중국어 능력평가시험 안내는 낯설어 보인다. 한동안 유행하던 일본 유학원 자리를 중국 유학원들이 대체하고 일본어 능력평가시험과 더불어 중국어도 국내에서 시험을 치는 시대가 됐다. 곳곳에 훠궈집과 마라탕을 파는 식당이 번창하는 것은 덤이다.

양궁카페·타로사주카페·고양이카페

강남역에서 국기원으로 올라가는 골목길은 고급주택가가 밀집한 곳이다. 상업지대가 점점 주택가까지 밀고 들어가 개성 있는 카페들이 하나씩 자리 잡고 있다. 젊은이의 눈길을 끌 수 있는 디자인 카페나 즐기고 쉴 수 있는 웹툰 카페도 보이고, 이국풍의 가게들도 자리 잡고 있다.

강남역 일대 골목은 현재 청년문화의 나침반이다.

강남역 일대 골목은 현재 청년문화의 나침반이다.

방송·연예 학원과 댄스학원, 음악원이 많은 것도 강남역 골목길의 특색이다. 이 길목에서 오가는 선남선녀들에게 명함을 건네며 길거리 캐스팅을 빌미로 호객하는 일도 잦다고 한다. 설레는 마음에 무대의 주인공이 될 기대로 상담을 받다보면 성형에 얼마가 필요하고, 곡을 받는데 또 얼마가 있어야 하며 연기와 노래지도를 받는 데 드는 비용, 더불어 안무비용 등의 청구서가 줄줄이 뒤따른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이 될 만한 사람에겐 그런 청구서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 젊은이들의 등을 밟는 먹이사슬의 덫도 강남역 골목길 일대에 널려 있다.

점심시간 즈음 여객기 객실승무원 복장의 젊은이들 여럿이 눈에 띈다. 그들이 나온 건물엔 승무원 학원 간판이 붙어 있다. 수업과정 중에 유니폼을 입는 것도 들어 있단다. 건너 건너서 물어보니 학원 비용도 만만치 않다. 강남역 골목마다 붙어 있는 취업을 위한 직업학원·자격증·외국어·유학원·멘토링 상담소 등을 보니 요즘 청년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사는지 실감이 난다. 현실은 지옥이고 취업은 건너야만 할 극락의 강인가 보다.

취업을 위해 필요한 것은 기술과 스펙만이 아니다. 이 시대는 용모 또한 재능으로 강조한다. 강남역 일대의 성형외과들은 주로 취업을 위해 용모를 바꾸는 데 특화되어 있다고 광고한다. 얼굴을 바꿔야 팔자가 바뀌는 것일까. 그 많은 학원과 성형외과와 미용실과 옷가게 사이로 정신건강 클리닉이 오아시스처럼 아픈 마음을 기다리고 있다.

밤이 되면 강남역 일대는 현실을 잊는다. 닫혔던 클럽문이 열리고 주점마다 떼 지어 몰리는 손님을 맞는다. 단체석을 강조하는 간판들이 술집 문 앞을 장식하고 있다. 이 동네 분위기는 주로 떼를 지어 퍼마시는 것인가 보다. 테헤란로 쪽에서 몰려오는 직장인 무리와 학원을 마친 젊은이들, 하교버스를 타고 돌아온 대학생들, 간간이 재수생들 무리, 그리고 강남역에서 약속을 잡은 청년들이 술집에 합류한다. 좁은 골목이 미어터지고 요란히 꾸민 외제차를 몰고 골목골목을 누비는 젊은이는 엔진 소리를 높인다. 삐끼들은 젊은 회사원 무리를 따라붙어 열심히 흥정에 바쁘다. 어디서 왔는지 꽃과 같은 젊은이들이 도도하게 고개를 세우고 술집 사이를 활보한다. 강남역의 밤은 언제나 불타고 있다.

어학원·연예학원·댄스학원·음악학원

자정 무렵 강남역을 지나쳐본 사람이라면 질서가 사라진 종말의 세상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골목마다 자신이 먹은 안줏거리를 다시 확인하느라 고개 숙인 사람들과 분노에 찬 악다구니. 비틀거리며 모텔로 사라지는 남녀의 급한 걸음이 눈에 띈다. 좁은 골목은 이미 꼬여버린 차와 차로 가득 찼고 노여운 경적이 허공을 메운다. 길가엔 경계석에 주저앉아 넥타이를 풀고 있는 직장인도 보이고, 이리저리 차를 잡겠다고 비틀비틀 뛰어다니는 걸음도 있다. 분당이며 용인으로 가는 광역버스들은 중앙차로를 메우고 거기에 택시와 차량이 온통 뒤섞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너무나 멀어 기약이 없다.

강남역 일대는 늘 분주하다. 골목길에서 큰길까지 대부분은 젊은이들의 바쁜 걸음으로 가득 찼다. 그래서 활기찬 곳이다. 살아남기 위해 배우고 노력하고 길을 찾는 이들이 강남역 부근을 오간다.

무심히 강남역 사거리 앞에 서면 어디선가 강한 노랫소리가 들린다. 1980년대부터 줄곧 거리와 현장에서 들리던 민중가요와 노동가요. 사거리 교통감시 카메라 철탑에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삼성해고자 복직을 위한 고공시위가 해를 넘긴 채 이어지고 있다. 한쪽에서는 스펙을 쌓고 취업을 위해 애쓰는 노력의 지옥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하는 노동의 지옥이 있다. 그 건너편엔 내몰리고 빼앗긴 이들의 시련의 지옥이 있다. 이 즐겁고 풍요로운 세상의 발밑에 층층의 고해가 있는 셈이다.

강남역 골목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지금 젊은이들의 욕망과 노력과 좌절이다. 청년들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것이 온통 취업과 스펙일 수밖에 없고, 또 다른 한쪽에선 허영과 향락이 있다. 그 혼란한 세상을 견디고 나도 성공을 보장받을 수 없을 것이다. 애써 공부하지 않아도 상가건물 하나만 있으면 수십 년 동안 쌓이는 현금다발을 얻고 다시 황금탑을 쌓아 올리는 역설의 현장이 강남역 골목이기 때문이다. 부당 해고를 항의하는 노동자의 저항과 주류사회의 말석에라도 앉아보겠다는 백일몽과 그를 내려다보는 부의 탑이 강남역 골목에 혼재하고 있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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