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교양의 힘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2023.09.11

지난 7월 19일 오후 부산의 한 초등학교에서 여름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이 밝은 표정을 지으며 교실 밖으로 나오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7월 19일 오후 부산의 한 초등학교에서 여름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이 밝은 표정을 지으며 교실 밖으로 나오고 있다. / 연합뉴스

‘교양’은 본디 수입된 말로 일본 학자들이 독일어 ‘빌둥’을 번역했다. 빌둥은 인간 만들기(혹은 형성하기)를 뜻하는 ‘멘셴빌둥(menschenbildung)’의 줄임말이다. 영어로 교양은 ‘컬처’인데 역시 ‘경작하다’는 어원을 가진다. 교양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인격적이며 문화적으로 자신을 가꾸어가는 노력’이라 말할 수 있다.

한국 교육에서 교양은 또 다른 연원을 가진다. 해방 후 한국은 미국 학제를 도입해 교육 체계를 꾸리면서 ‘리버럴 에듀케이션’을 ‘교양 교육’이라고 옮겼다. 서구에서 리버럴 에듀케이션의 역사는 장구하지만, 그 현재적 의미는 2007년 하버드대학이 발표한 ‘교육과정 개편 보고서’가 잘 대변한다. 보고서는 대학교육의 목적이 리버럴 에듀케이션임을 명시하며, 기존의 지식 습득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깨트리고 나아가도록 하는 것임을 매우 열정적인 어조로 말한다.

“리버럴 에듀케이션의 목표는 추정된 사실들을 동요시키고,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며 현상들 아래에, 그리고 그 배후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폭로하고, 젊은이들의 방향감각을 어지럽혀 그들이 다시 방향을 잡는 길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오늘 한국에서 교양 교육은 무엇인가. 대학 입시까지는 입시 경쟁에 직접 효용성이 없는 상식과 잡식 습득이며, 대학에서 교양 과정 역시 신입생이 본격적인 공부에 들어가기 전에 훑고 넘어가는 지식쯤이다. 교양 교육은 그 연원으로부터 까마득히 멀어져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교육이 나름대로 마련한 교양 교육의 개념이나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교양이 더 나은 인간이 되려 자신을 가꾸는 노력이며 틀을 깨고 나아가는 비판적 개인이 되는 일일 때, 교양 교육은 교실이나 대학에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삶과 생생히 부딪혀야 한다. 괴테는 ‘교양있는 개인’을 온전히 말하기 위해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썼다. 빌헬름은 부르주아 계급 출신임에도 상업적이고 실용적인 세계가 아니라 예술을 추구하며 역경을 헤치고 인간적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같은 맥락에서 교양 교육은 교양이나 교양 교육이라는 말이 수입되기 전부터 있었던 셈이다. ‘공부만 잘한다고 사람 되는 건 아니다’, ‘동무에게 양보할 줄 알아야 하고,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면 못쓴다’, ‘인생엔 돈으로 사지 못하는 게 많더라’ 등. 오랫동안 그저 어른이라면 아이에게 당연히 반복해 들려주던 덕담엔 교양 교육의 정수가 들어 있다. 이젠 모든 어른이 일제히 멈춘 덕담이기도 하다.

교양 교육이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사라진 건 ‘더 나은 인간이 되려는 노력’이 ‘더 비싼 인간이 되려는 노력’으로 대체됐기 때문이다. 교육에서 불의하고 불공정한 사건을 두고 벌어지는 열띤 논란도, 주요한 기반은 내 새끼에게 매겨질 가격과 관련한 분노다. 교양 교육이 사라진 사회에서 아이들이 쉽게 각종 혐오에 빠져들고 토론보다 편 가르기로 흐르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세계는 경제, 노동, 기후를 비롯한 거의 모든 부문에서 위기가 깊어가고 있다. 보수든 진보든 기존의 가치도 이미 붕괴했다. 한 문명이 저물어가는 듯한 시기에 아이들이 꼭 배워야 할 건 살아남는 요령이 아니다. 혼란을 헤쳐나가며 제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힘은 교양이다.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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