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교사의 연이은 죽음이 사회에 큰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다. 학생 권리의 지나친 확대에 따른 교사 권리의 축소가 원인이라고도 한다. 오래전 학교에선 교사 권리가 지나쳐 학생 권리를 억눌렀다는 이야기와 대구를 이룬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라면 교사 권리와 학생 권리는 각각 고유하다. 만일 대립관계에 있다면, 권리를 가장한 폭력 상황을 의미한다.
교사 권리를 가장한 교사의 폭력은 국가 파시즘의 한 얼굴이었다. 젊은 교사를 죽음으로 몰아간, 학생 권리를 가장한 부모의 폭력은 시장 파시즘의 한 얼굴일 것이다. 국가 파시즘과 시장 파시즘이 역할을 교대한 건 1997년 즈음이었다. IMF 구제 금융의 대가로 한국은 대대적인 신자유주의 구조 조정에 들어간다. 경제 부문을 시작으로 한국 사회 모든 부문이, 사회 성원의 생활과 문화 전반이 근본적으로 바뀐다. 몇 해 후 노무현 대통령은 이 변화를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표현한 바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이 양육과 교육은 인격적 성장에만 전념하기 어렵다. 아이가 시장에서 살아가려면 상품적 성장도 중요하다. ‘교육 수준이 사회적 지위를 결정한다’고 말할 때, 교육 수준은 바로 상품적 성장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인격적 성장과 상품적 성장이라는 두 가치의 긴장 상태에 있는 셈이다. 1997년 이후 한국 교육은 긴장을 벗어나 상품적 성장 쪽으로 내달리게 된다.
사회 진보와 진보 교육을 말하는 사람들 역시 제 아이 교육에선 예외가 아니었으며, (이후 조국 사태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듯) 오히려 더 적극적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이 변화가 어떤 정도였는지 알려준다. 2001년 1월 김대중 정부는 교육부를 ‘교육인적자원부’로 바꿈으로써 이 변화를 공식화한다. 아이의 상품적 성장을 판정하는 가장 주요한 절차는 대학입시다. 이때부터 한국인에게 ‘교육 문제’란 순수하게 ‘대학입시’를 의미하는 말이 된다.
그리고 새로운 부모들이 출현한다. 아이의 상품적 성장이 곧 인격적-인간적 성장이라는 전제하에, 교육 과정을 상품 생산과 이윤 축적 과정처럼 파악하며, 기획, 조율, 관리, 감독 등 경영 활동을 해나가는 부모다. 이때 다른 부모와 아이들은 경쟁자(업체)와 경쟁 상품이 된다. 한 인격체이자 아이 성장의 동료이던 교사는 생산 수단, 혹은 협력 업체가 된다. 생산성이나 이윤율 문제에서 교사는 대화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대상이다.
우리는 이 부모들에게, 가장 합당한 의미에서 ‘부모 자본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내 새끼 지상주의자’는 비록 소수더라도 어느 시대나 존재했다. 부모 자본가의 특별함은 그들의 이악스러움이 교육 부문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사적 일상에서 인간적이고 상식적인 모습을 보이는 자본가가, 자본가로서의 활동에선 온전히 ‘인격화한 자본’으로 변신하는 것처럼 말이다.
교사들의 죽음에 직접적 관련이 있는 부모들은 부모 자본가 중에서도 포악한 부류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특수한 건 언제나 일반적인 것 속에 존재한다. 포악한 부모 자본가의 출몰은 부모 자본가가 일반적인 사회임을 알려준다. 또한 기억할 것은 가장 본격적이며 가장 독점적인 자본가는 대부분은 포악함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경영활동을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김규항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