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당신에게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2023.07.17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얼마 전 한 아파트 시행사가 ‘언제나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당신에게 바칩니다’라는 광고를 걸었다가 사과하는 일이 있었다. 해당 아파트의 분양가는 100억원에서 400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저런 광고 문구를 생각해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는 사실 역시 놀랍지 않은가?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은 주변 어디에나 널려 있기 때문이다.

SNS에는 ‘상류층’과 결혼하려는 사람을 모집한다는 결혼 정보 회사 광고가 뜬다. 결혼과 계급 차이는 익숙한 주제지만, 결혼 상대방의 ‘스펙’을 하나씩 따지며 인간의 등급을 분류하는 것은 최근의 일이다. 주거지에 따른 차별은 일상적 사건이 돼 별다른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다. 기괴한 외국어 이름이 붙은 이른바 브랜드 아파트를 보라. 아파트단지 입구에 서 있는 저 흉물스럽고 거대한 아치는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자기 존재 증명 같은 것이 아닌가?

이런 사회에서 앞서 말한 광고 문구가 비난받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래도 아직은 불평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기 때문인가? 아니면 단순히 표현의 수위가 문제인가? 혹은 내가 ‘상류층’이 되려는 건 괜찮지만, 이미 상류층이 된 이들의 계급 놀이는 봐줄 수 없기 때문일까?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건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일이 대세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평범한 부자가 되기 위한 삶

한국의 불평등은 극단적이고 독특하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불평등 지수는 그 독특성을 표현하기에 불충분하다. 흔히 생각하는 ‘살 만한 삶’의 기본 조건을 따져보자. 일단 서울 가까운 곳에 살아야 하고, 자기 소유의 아파트가 필요하다. 자녀의 사교육비 평균을 부담하고, 적절한 여가와 여행을 즐기고, 충분한 의료와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부자가 돼야만 이런 조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가구 순자산 상위 10% 선이 9억원 정도다. 서울 아파트 중위가격이 9억~10억원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방금 말한 삶의 기본 조건을 누리려면 상위 10% 이상의 자산가가 돼야 한다.

이제 한국에는 ‘부유하진 않지만 평범하고 행복한 삶’ 따위의 관념은 존재하기 어렵다.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려면 부자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의 상당 기간이 상위 10%에 들어가기 위한 노력으로 채워져 있다.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대학 들어가고, 좋은 직장 얻고, 자산을 불리는 게 인생의 표준 경로처럼 여겨지지 않는가? 그 노력이 성공하면 어느 정도 여유로운 노후를 보낼 수 있지만, 실패하면 노인 빈곤의 위험에 노출된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지역 불평등, 양극화된 노동 시장, 기이한 부동산 시장, 학벌 차별, 불충분한 사회보장체계 등 불평등의 원인은 다양하다. 이에 관한 분석은 많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 하나가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 한국인의 일반적 욕망은 어떤 세상을 향하는가? 평등한 세상인가, 불평등한 세상인가?

한 아파트 시행사는 홈페이지에 “언제나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당신에게 바칩니다”라는 홍보문구를 썼다가 비판받고 사과문을 올렸다. / ‘더 팰리스 73’ 홈페이지 캡처

한 아파트 시행사는 홈페이지에 “언제나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당신에게 바칩니다”라는 홍보문구를 썼다가 비판받고 사과문을 올렸다. / ‘더 팰리스 73’ 홈페이지 캡처

당신은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가?

자산과 소득의 차이는 곧바로 인간 존엄성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상위 10%는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살아갈 수 있는 기준이다. 자산과 소득 수준이 낮아질수록 존엄성이 침해될 위험이 증가한다. 이는 단순히 부자가 빈자를 멸시하는 현상이 아니다. 자산 100억원을 가진 사람이 10억원 가진 사람을 무시하고, 10억원 가진 사람이 1억원 가진 사람을 무시하는 식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외적 위험이 아니라 내적 위험이다. 한 인간의 가치가 물질적 ‘스펙’으로 환원되는 사회에서, 그 누구도 내적 자존감을 온전히 지키기는 어렵다. 따라서 어딜 가나 자기 비하에 빠진 사람이 넘쳐난다.

이는 결코 자본주의의 당연한 효과가 아니다. 경제적 불평등에서 인간 존엄성의 불평등이 자동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불평등 없는 나라가 없지만, ‘나보다 아래쪽에 있는 인간을 무시해도 된다’는 관념이 한국처럼 일반적인 곳은 드물다. 이런 현상이 현실의 불평등을 심리적으로 내면화한 결과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불평등에 대한 욕망이 현실의 불평등을 낳은 것은 아닐까? 한국의 불평등이 이토록 독특한 것은 다수가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기 때문은 아닌가?

불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존재는 확고하다. 어디서나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반면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이들은 찾기 힘들다. 이들이 정치적 힘을 발휘하는 집단 의지로 결집돼 있다는 증거도 발견할 수 없다. 불평등의 원인과 양상을 분석하는 경제학자는 많지만, 평등이란 무엇인지를 다루는 학자는 드물다. 불평등 완화를 주장하는 정치인은 흔하지만, 평등을 정치적 가치로 주장하는 정치인은 극소수다.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슈퍼리치’에게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만, 자신이 평등한 세상을 꿈꾼다고 말하는 사람은 만나기 힘들다.

평등이란 무엇인가? 사회경제적 상황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모든 시민은 똑같은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고 모든 인간은 똑같이 존엄하다는 원칙, 모든 사람이 모든 타인을 똑같은 시민과 인간으로 대우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원칙이다. 이런 원칙이 최소 수준이라도 합의돼 있었다면, 아이들이 전세 사는 친구를 따돌린다는 언론보도가 나왔을 때 온 나라가 뒤집혔어야 한다.

이제 우리 모두 자문해 봐야 한다. 내가 꿈꾸는 것은 평등한 세상인가, 평등하지 않은 세상인가? 평등한 세상을 원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내 아래로는 불평등하고 내 위로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것은 아닌가? 아래를 향해서는 ‘세상은 원래 불평등하다’고 말하고, 위를 향해서는 ‘세상은 평등해야 한다’고 외치는 게 지금 한국의 상식 아닌가?

부자 되기에만 몰두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평등이라는 원칙을 망각하기 위한 노력이다. 한국의 시민은 불평등한 사회 구조의 피해자일 뿐 아니라 그 사회 구조를 만든 당사자이기도 하다. 불평등 개선이나 완화가 아니라 평등 그 자체를 생각할 수 있을 때만, 한국을 더 인간적인 곳으로 바꾸는 작업이 시작될 수 있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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