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종말과 위기 감각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2023.05.22

영화 <돈 룩 업>은 과장된 블랙 코미디가 아니다. 지금 인류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라. 혜성 충돌이라는 사건이 실제로 발생한다면, 현실의 인류가 영화 속 바보들보다 현명하게 대처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지만, 이런 본성은 경우에 따라 작동을 멈춘다.

넷플릭스 영화 <돈 룩 업> 속 두명의 천문학자는 6개월 뒤 혜성과의 충돌로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지만 정치인들과 언론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다가 모든 기회를 놓치고 결국 종말을 맞게 된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영화 <돈 룩 업> 속 두명의 천문학자는 6개월 뒤 혜성과의 충돌로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지만 정치인들과 언론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다가 모든 기회를 놓치고 결국 종말을 맞게 된다. 넷플릭스 제공

위기감의 실종

현시대의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인류가 종말의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기후위기의 재앙적 결과를 경고하는 목소리는 이제 익숙해졌고, 위기의 감각을 가진 사람은 여전히 소수다. 이미 적지 않은 학자들이 이런 기이한 현상을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해왔다. 여기서는 한국적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몇 가지 분석을 추가해보자.

위기의 감각은 시간에 의존한다. 위험은 항상 미래의 위험으로 등장한다. 남은 시간 동안 그 위험을 어떻게 회피할 것인지가 문제다. 신체적 감각이 인지할 수 있는 순간적 위기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눈앞에서 달려오는 자동차를 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상 작동하는 감각기관과 신체적 반응 속도 등이다. 반면 위험이 다가오는 시기가 늦을수록 인과관계는 복잡해진다. 위험은 신체적 감각이 아니라 지성과 과학적 판단의 대상이 된다.

현대 과학은 위험을 감지하고 회피하기 위한 고도의 지식을 발전시켜 왔지만, 인간의 감정과 의식은 그런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미래의 위험과 현재의 삶 사이에서 갈등하고, 자신이 추구해온 삶의 방식과 가치를 바꾸느니 그냥 미래의 위험을 받아들이거나 망각하기로 할 때가 있다.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위기가 발생한 경우, 그리고 바꿔야 하는 것이 개인의 삶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시스템인 경우, 다가오는 위험에서 눈을 돌리고 살던 대로 살려는 경향은 더 강력하게 나타난다. 그 위험이 세계의 종말이라도 마찬가지다. 반지성적 포퓰리즘은 그런 경향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정교한 정치적 발명품이다.

위험을 ‘합리적으로’ 무시하는 사람도 있다. 재앙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오지 않는다. 기후위기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늦게 도달하는 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생전에 재앙을 경험할 확률이 낮다면, 더구나 미래세대 혹은 다른 지역의 인간과 자신의 윤리적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기후위기 때문에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을 포기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지구 반대편의 타인이 죽든 말든, 세상이 망하든 말든 자신의 문제가 아닐 테니 말이다.

인간의 어리석음에는 이유가 있고, 때로는 나름의 합리성이 있기도 하다. 재앙의 공포를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그런 어리석음에서 간단히 벗어날 수는 없다. 위기가 심각할수록, 그래서 삶을 급진적으로 바꿔야 할수록 어리석음도 공고해진다. 이미 자리 잡은 삶의 방식이 더 강력하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현시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것은 자연과 사회의 구분에 관한 형이상학적 전제, 자본주의적 성장 모델, 개별 국가 단위의 정치 공동체, 과학과 정치의 전통적 관계 등이다. 이것들이 기후위기의 근원이며, 위기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든다. 그러한 삶의 토대가 바뀌지 않는 한 위기의 감각도 생기지 않는다. 위기의 감각이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위기의 감각을 가져온다.

한국사회의 자기 소멸

기후위기에 대한 인류의 반응을 관찰하다가 한국으로 시선을 돌리면, 더 기괴한 장면이 펼쳐진다. 한국은 자기 스스로 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합계출산율 0.78이라는 수치조차 별다른 위기감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이 사회가 인간을 낳고 키울 만한 곳이 아니라는 건 평범한 일상적 사실 중 하나가 돼버렸다.

넷플릭스 영화 <돈 룩 업>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영화 <돈 룩 업>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한국인의 경이로움 중 하나는 이런 극단적 상황 자체를 문화상품으로 생산하고 판매한다는 점이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한국 드라마의 다수가 한국의 파괴적 자본주의와 개인이 경험하는 극단적 폭력을 소재로 삼는다. 한국은 여전히 헬조선이지만, 공포감과 위기감을 느끼는 사람보다 헬조선 콘텐츠의 세계적 대성공을 보며 벅찬 감동을 하는 사람이 더 많다. ‘국뽕’은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집단 환각제다.

한국사회의 위험 회피 장치는 완전히 고장 난 것처럼 보인다. 기후위기와 저출생 문제의 기본 성격을 이해하는 정치세력이 없다. 공동체의 존속 자체가 위협받는 와중에도 베스트셀러 목록은 부자 되는 법에 관한 책으로 가득하다. 사회는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모두가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가오는 위기를 방지하려는 노력은 어디에서도 찾기 어렵다. 애초에 위기 자체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이런 어리석음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한국에는 ‘시민들의 정치 공동체’라는 것이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가지각색의 이익 집단이 중앙의 국가권력을 중심으로 더 많은 재화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할 뿐이다. 공동체가 없으니 공동체의 위기를 인지할 수조차 없다. 내 삶의 위기를 나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차원에서 사고하기도 어렵다.

한국의 경제 성장이란 인구 집단의 일부를 희생시켜 이윤을 창출하고, 살아남은 자들이 그 이윤을 나눠 갖는 과정이었다. 이곳에는 제 살을 뜯어 먹으며 팽창하는 거대한 괴물이 있을 뿐,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괴물은 자기 파괴를 통한 ‘부자 되기’에만 몰두하지, 자기 재생산에는 관심이 없다. 이런 곳에서 “저임금 돌봄 노동자를 수입하자”는 발상이 저출생 대책으로 등장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문제가 생기면 누구를 착취하고 파괴할 수 있을지부터 궁리하는 것이 한국적 시스템의 특징이다.

이 시스템은 자신의 파괴적 본성을 효과적으로 은폐하는 방법을 발전시켜 왔다. 인구 집단의 약한 부분을 불안정한 상태로 내몰고 희생시키지만, 이것이 옳은 일인지에 관한 질문을 던지지는 않는다. 최근에는 오히려 이런 시스템이 옳다는 믿음을 일반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정’이나 윤석열 대통령이 말하는 ‘법치’ 같은 말들이 이런 윤리적 맹목성 혹은 윤리적 역전 현상을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합계출산율 0.78을 향한 한국사회의 일반적 무관심은 이러한 윤리적 맹목성이 과학적 맹목성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파괴적 시스템에 대한 맹목적 옹호는 그것의 옳고 그름에 침묵할 뿐 아니라 그것의 종말에 관한 과학적 예측도 무시하게 만든다. 공동체의 다른 시민이 희생되고 그러한 희생이 내가 속한 공동체 자체의 종말을 불러오더라도, 내 삶의 위기를 해결해줄 구원자로 보이는 것은 오로지 부동산, 주식, 코인뿐이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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