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이민 45년’, 권혁태(72) 린다비스타 호텔 대표를 추석 직전 4차례 만나 그의 인생 풀스토리를 들었다.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한 아르헨티나 현대사가 흥미진진했다. 기사에 일일이 적을 수 없을 정도로 폭이 넓었다. 예컨대 아르헨티나의 형성과 기원을 무정부주의에서 찾은 그의 시각이 독특했다.
에바 페론(1919~1952·후안 페론 전 대통령의 부인)은 올해로 사후 70주기를 맞았다. 에바와 포퓰리즘 논란에 대해서도 그는 장시간 설명하며 반론을 제기했다. 에바 페론의 업적으로 양성평등과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 참정권 보장, 노동자 처우 개선을 위한 노동입법 추진, 친권과 혼인에서의 남녀평등, 여성의 공무담임권 획득 등을 거론했다. 요컨대 페론주의는 아르헨티나 정체성의 근간이며, 헌법의 정신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아르헨티나에 녹아든 삶을 살고 있다. 기독교 신앙(침례교)과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 그 삶을 지탱한 두 기둥이다.
교사가 된 지 4년 만에 아르헨티나행 서울대 사범대 수학과를 졸업한 그는 소년 시절부터 교사가 자신의 천직이리라 생각했다. 고등학교 수학교사가 된 지 4년 만에 그는 아르헨티나행 비행기를 탔다. 왜 그랬을까. 이민을 결심할 때 그는 한국의 상황에 낙담하고 있었다. 박정희 시대의 권위주의 체제가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거북했다.
공개하기 어려운 갖가지 씁쓸한 에피소드가 있다. 1977년 당시 한국 정부는 이민자가 해외로 갖고 나갈 수 있는 돈을 1000달러로 제한했다. 이민정책이 아니라 사실상 ‘기민(棄民)정책’이었다고 그는 사뭇 신랄하게 비판했다. 권위주의 체제의 한국을 떠나는 것이 ‘하나의 축복’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업을 일궈 성공했다. 당시 교민들이 주로 종사한 의류·섬유 도매업으로 적잖은 자산을 형성했다. 2000년대 초반에는 남부 파타고니아(Patagonia) 지역에 주목했다. 이 지역 관광의 중심도시 엘 칼라파테(El Calafate)에 2개의 호텔을 짓고 정착했다.
아르헨티나는 개방적인 나라다. 의료와 교육이 무상으로 이뤄지는데, 그 혜택을 외국인에게도 부여한다. 심지어 불법체류자라 할지라도 그런 혜택에서 배제하지 않는다. 큰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대체로 그들의 체류와 생존을 용인한다. 정권이 바뀌어도 정적에게 좀처럼 보복을 하지 않는 것도 우리와 다른 정치문화다.
“2000년대 초반 파타고니아 엘 칼라파테에 넓은 땅을 샀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거친 땅이었는데, 저는 그곳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신성(神性)이 깃들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주변에 세계적인 관광지가 여럿 있는데, 그 땅이 무용할 리 없다고 판단했지요. 마침 당시 엘 칼라파테가 속한 산타크루스 주지사가 이 땅을 사라고 권유했습니다. 저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주변 사람 모두에게 권했지요.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절대로 오르지 않는 땅’이라고 장담했습니다.”
놀라운 일이지만 나중에 그 주지사가 대통령이 됐다. 그가 바로 2003년 대선에서 당선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다. 그가 당선된 후 엘 칼라파테가 로스글라시아레스 국립공원을 중심으로 개발되면서 각광받기 시작했다. 인구도 4000명에 불과하던 곳이 이제 3만5000명이 모여 사는 도시로 커졌다. 새 공항이 건설되면서 권혁태는 옛 비행장 활주로 땅을 불하받기도 했다.
그는 이곳에 린다비스타, 에코비스타 2개의 호텔을 지어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을 만나고 있다. ‘피츠로이산’과 2개의 빙하, ‘페리토 모레노’와 ‘토레스 델파이네’가 장엄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곳이다. “엘 칼라파테에서 한 달 정도 살아본다면 인생 최고의 명상체험이 될 것”이라고 그는 장담했다.
“아르헨티나 경제위기는 과장된 것” 그가 보기에 최근 이슈가 된 아르헨티나 경제위기의 실상은 과장됐다. 그 해결의 전망에도 그는 비관하지 않았다. 한국 교민사회는 여러차례 위기를 극복하면서 오히려 더 번영했다. 한국 교민들의 성실성과 재능이 고비 때마다 도약의 계기를 잘 포착했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 경제위기, 심각한 측면이 있다는 건 맞는 관측일 겁니다. 그런데 그 상황을 좀 깊이 들여다보면 거기엔 해석의 문제가 있어요. 어느 한쪽은 맞고, 어떤 대목은 틀린 거죠.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와닿는 위기의 정도가 지나치게 과장된 면이 있습니다. 미국이 달러화를 고평가해 생기는 어려움에 아르헨티나가 직격탄을 맞았지만, 시민이 일상적인 삶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한 타격을 입은 건 아닙니다. 시장에는 생필품이 쌓여 있고, 병원도 정상적으로 작동합니다. 골프장은 여전히 북적이고, 사람들은 오늘도 좋은 차를 몰고 다닙니다. 저녁에 식당에 가 보면 3시간에 걸쳐 느긋한 식사를 즐기는 시민으로 가득합니다. 경제위기가 와도 기본적인 삶이 흔들리는 법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시간이 돈’이라는 상업적 타산이 그곳 사람들에겐 결핍돼 있다. 그 결핍이 약점인지 강점인지는 삶을 바라보는 철학적인 관점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삶을 유장하게 즐기고, 천천히 살아가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그곳 사람들은 갖고 있다. 권혁태가 보기에 한국은 너무도 일사불란하게 착착 돌아가는 사회다. 항상 바쁘고 숨 막히게 살고 있으니까 그게 경쟁력이면서, 동시에 삶을 옥죄는 족쇄로 작용한다는 것이 그의 관찰이다.
“아르헨티나는 달러 기반의 경제를 운영하는 나라로 보면 됩니다. 개인·기업·정부가 다 그런 기반 위에서 움직입니다. 그러니까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라는 것도 달러를 통해 조정되고 완화돼 균형을 맞추는 측면이 있습니다. 거의 모든 경제 주체가 달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즉각적인 곤란에 난폭하게 노출되지는 않습니다. 경제가 어려워도 소위 ‘밥 굶는 사람’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경제가 항구적으로 건전한 건 아니죠. 다만 그 해법은 천천히 모색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르헨티나가 가진 막강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합리주의적 경제시스템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공동체를 중시하며, 개인의 행복을 섣불리 계량화하지 않습니다. 자연과 환경, 자원과 산업을 바라보는 관점이 우리와는 현격하게 다릅니다.”
아르헨티나 경제의 어려운 상황의 뿌리는 1980년대 초반 군부의 집권과 관련이 있다. 군부가 1982년 영국을 상대로 ‘포클랜드 전쟁’을 벌였는데, 이게 더할 나위 없이 어리석은 군사행동이었다는 것이다. 갈티에리 장군의 아르헨티나 군부는 패배로 귀결된 이 전쟁에 무려 20억달러의 전비를 썼다.
“아르헨티나의 사회 구성은 복합적입니다. 언어는 스페인어를 쓰지만, 국민의 다수는 이탈리아 이민자의 후예입니다. 문화는 프랑스에서 배우고, 경제는 오랜 기간 영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습니다. 1900년대 전반기 아르헨티나의 경제 건설은 영국이 주도해 일궈낸 성과입니다. 영국과의 관계를 잘 풀어가 유럽으로 가는 길도 열렸죠. 아르헨티나는 유럽 사람들에게 자원의 보고, 식량창고 같은 역할을 했으니까요. 그런 관계가 전쟁을 통해 깨진 겁니다. 당시 레이건 대통령의 미국이 대처 총리의 영국을 지원하는 국제역학관계에서 아르헨티나엔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았던 것이죠. 그 여파가 지금의 아르헨티나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시민을 고문하고 살인했을 뿐만 아니라 군부독재 정권은 대외·경제정책에도 결정적으로 실패한 통치기구였습니다.”
한국 교민들이 위험하다고?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의 숫자는 3만명 정도다. 1세대는 섬유·의류업계에 진출해 사업을 일으켰고, 그다음 세대는 전문직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요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교민들이 큰 피해를 보고 있다는 우려가 언론을 통해 제기되기도 한다. 보도내용이 실상을 온전하게 반영하는 건 아니라고 그는 진단했다.
“교민 대부분이 중산층 이상의 삶을 영위하고, 보유한 자산도 탄탄합니다. 부동자산 외에 유동자산, 다시 말해 달러화·채권·주식 등을 골고루 보유하면서 운용해 큰 문제 없이 지탱하고 있는 거죠. 정상적인 아르헨티나 중산층도 다 그렇게 경제생활을 합니다. 하층민의 삶은 기본적으로 국가가 담보해주는 사회이니까 그들도 큰 곤경에 처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는 오히려 한국 상황을 우려했다. 부동산을 포함한 개인의 자산에 거품이 많은 현상을 주목했다. 8월 한 달 한국에 머물면서 그 상황을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게 됐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무엇이든 자기 돈으로 물건을 사고, 그 물건을 자신의 실질 자산으로 만든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들은 잔뜩 빚을 얻어 집이나 차를 사지 않습니다. 땅이 넓으니까 부동산 가격도 굉장히 저렴하죠. 도심에서 불과 30~40㎞ 떨어진 교외의 번듯한 땅 1㏊(3025평)를 불과 2만~3만달러면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돈으로 평당 1만원 남짓이면 살 수 있다는 얘기죠. 그런데도 부동산을 매개로 큰 이익을 도모하는 일이 적으니까, 투기를 통해 벼락부자가 되거나 삶이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는 일이 없습니다. 삶의 기반이 결정적으로 유린되는 일이 없습니다. 돈 한푼 없어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고, 대학교육도 무상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이민자나 외국인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는 원칙이죠. 무상이라 해서 질 낮은 교육, 엉터리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이 아르헨티나 사회의 품격이자 자존심이라고 봅니다.”
교민사회는 1970년대부터 착실한 성장을 거듭했다. 재미있는 것은 아르헨티나 경제가 위기에 처했을 때 더 큰 기회를 잡았다는 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설명한다. 한국 교민사회가 더 성장할 기회를 맞았다고 했다. 포클랜드 전쟁 직후 부에노스아이레스 의류업계를 장악했던 유대인들이 떠났다. 그 공백을 한국인이 메웠고, 새로운 상점 거리를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1980년대 초반부터 한국인이 주도해 만든 새로운 의류상점 거리가 아베야네다(Avellaneda)다. 수천개에 달하는 의류 관련 매장이 들어섰다. 이 거리의 조성에는 권혁태도 일정 부분 기여했다.
“섬유·의류업계에서 한국인의 영향력은 막강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교민들이 고통에 처한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상황을 나쁘게 이용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만큼 교민들의 위기대처 능력이 탁월하다는 의미일 겁니다. 한국인들은 이곳에서도 능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성공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지요. 그러나 전제가 있습니다. 정직하게 신용을 지키고 성실해야 합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외국인을 배타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사심 없이 도와주는 경향이 강합니다.”
남들이 가는 길을 답습하지 않는다 포클랜드 전쟁 직후, 1990년대 외채위기와 2000년대 초반 ‘뱅크런’ 현상으로 아르헨티나 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2001년 한해에만 약 200억달러의 예금이 빠져나갔다. 정부는 12개월간 모든 은행계좌를 동결하는 ‘코랄리토’라는 강력한 조치를 통해 위기를 타개하려 했다.
“지금보다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 조성됐죠. 포클랜드 전쟁 직후에는 달러 가치가 50배나 뛴 적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그런 시련을 다 이겨냈습니다. 은행에 모든 예금 자산이 동결됐을 때도 정말 힘들었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 시련기를 거치면서 경제적으로 가장 크게 성장하고 번영했습니다. 위기를 위기로만 보면 비관적이죠. 그러나 실상은 위기 안에 여러 가능성이 잠재된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르헨티나는 어떤 면에서 굳건합니다. 나라 전체가 어마어마한 자산이거든요. 중동 한 국가 전체의 유전과 맞먹는 크기의 유전이 한 지역에 존재합니다. 리튬 등 광물자원도 풍부하죠. 굳이 개발하려 애쓰지도 않습니다. 그런 개발을 효과적으로 조직하는 기술적 능력이 부족한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을 상업적 관점에서만 보는 태도에 대한 일종의 혐오나 경멸이 이 나라 사람들의 심성에 배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과 아르헨티나는 서로에게 배우면서 협조하고 공생할 여지가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인버스(inverse)’라는 말의 의미에 주목하는 삶을 살았다. 굳이 번역한다면 ‘역류를 지향한다’는 의미가 될 터다. 남들이 가는 길을 답습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권혁태는 미국보다 아르헨티나를 새로운 삶의 둥지로 택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파타고니아의 황무지로 눈을 돌린 것도 그런 맥락이다.
기이하게 짧은 소설 프란츠 카프카의 <돌연한 출발>은 지금도 권혁태가 즐겨 읽는 작품이다. 주인과 마부가 등장인물이다. 주인이 말을 타고 어딘가로 떠나려 하자, 마부가 주인에게 “어디로 가시느냐”고 묻는다. 목적지가 어디냐는 것이다. 주인은 마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냥 여기를 떠난다. 내가 여기를 떠난다고 했다. 떠나는 것이 나의 목적지다.”
“‘돌연한 출발’을 지금도 지지합니다. 안주하는 삶에 반대합니다. 목표를 추구하는 인생도 재미없습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create)한 분이라면, 인간은 그 세계를 재창조(recreate)하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저는 삶의 의미를 레크리에이션(recreation)으로 파악합니다. 그래서 삶을 그냥 흘려보내려 합니다. 호텔도 돈 벌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닙니다. 이 호텔이 이 도시의 요양소가 돼도 좋습니다. 나중에 공공의 시설로 기증할 생각입니다.”
<한기홍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