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은 ‘베개’를 정말 처형했을까

정용인 기자
2021.12.13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연인일 텐데.” 12월 1일 인터넷커뮤니티에 ‘여성들을 사정없이 참수하는 IS’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동영상에 붙은 코멘트다. 영상을 보면 비장한 아랍노래를 배경으로 건물 위에 서 있는 남자가 연설을 한다. 칼로 목 부분을 벤 뒤 사정없이 땅바닥으로 던진다. 아래에 대기해 있던 다른 사람은 총으로 확인사살을 한다. 영락없는 이슬람국가(IS)가 제작한 선동용 참수 영상 포맷인데 문제는 그 ‘대상’이다. 베개다. 오타쿠들 사이에서 흔히 ‘다키마쿠라’라고 불리는 애니메이션·게임 캐릭터가 그려진 베개다. IS나 탈레반이 서구에서 유입된 저질 오타쿠 문화를 규탄하기 위해 만든 영상?

fm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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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커뮤니티에 퍼진 영상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정말 저 영상을 IS 또는 탈레반이 만들었다는 전제로 댓글이 달리고 있다. 영상의 히스토리를 검색해보면 지난 8월 18일을 전후로 한국이나 외국 사이트에서도 흥했다.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을 탈레반이 함락하는 때라 이때의 ‘베개처형’의 주체로 거론된 것은 탈레반이었다.

인터넷 유머사이트 ‘9gag’에 올라온 영상에는 “탈레반이 미군 병사가 남기고 간 ‘와이푸(waifu)’ 베개를 처형하고 있다(카불·2021·컬러영상)”라는 설명이 달려 있다. 그런데 영상을 더 추적해보면 2019년경에 동일한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이때 처형의 주체로 거론한 집단은 IS. 일단 최근 국내외에서 공유됐던 ‘올해 8월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탈레반이 찍은 영상’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님이 확인된다.

유튜브에 영상을 올린 이는 “이 영상은 축약 버전이며, 원래 20여분에 달하는 긴 버전의 영상이 따로 있다”고 링크를 제시하고 있지만, 그 긴 버전의 영상은 유튜브 규약위반으로 삭제된 것으로 나온다. 영상의 진실성 여부를 묻는 누리꾼 질문에 이 게시자는 “다른 각도에서 찍은 영상”이라며 영상을 하나 더 제시했지만, 역시 영상의 비하인드는 규명되지 않았다. 앞서 9gag, 레딧, imgur 등의 사이트에서도 “진짜 IS(또는 탈레반)가 만든 게 맞느냐”는 의문을 제기한 누리꾼이 있었지만 “Did ISIS invade 4chan?(IS가 4chan 사이트에 침공했나요?)”, “Yamero jihadi kun(그만둬 지하디 군)”과 같은 찰진 영어버전 드립에 묻혔다.

디스코드에 올라온 유튜브가 삭제한 원본 영상을 확인해보니 앞서 게시한 유튜버의 주장처럼 20분은 아니고 38초짜리의 조금 더 긴 버전이다. 제목은 ‘정의가 나아갈 길은 너희들의 ‘와이푸(waifu)’의 피로 정화될 것이다’. 영상 후반부엔 이들 게릴라군의 습격으로 미군 병사 2명이 어이없게 당하는 장면, 캐러밴 차량이 후진해 베개들을 짓뭉개는 장면 등이 추가돼 있는데 미군 병사 관련 장면 때문에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레딧에서 발견한 흥미로운 제보. 영상은 옥사이드(oxide)라는 유명 밀리터리 유튜버가 몇년 전 ‘밀심(milsim·무슬림이 아니다) 웨스트’라는 곳에서 찍은 서바이벌 게임에서 참가자들끼리 장난으로 찍은 것인데, 현재 그 영상이 삭제되다 보니 진짜로 오해를 받은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일까. 옥사이드가 유튜브에 올린 영상을 검토해봤다. 위 누리꾼의 언급대로 이 ‘베개처형 영상’은 없다. 그러나 그가 올린 ‘침공 취소(Invasion Cancelled)’라는 제목의 영상 인트로에서 앞서 베개처형 영상의 배경 건물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의 결론이다. IS 또는 탈레반은 미군이 남기고 간 다키마쿠라를 ‘처형’하는 선동 영상을 실제로 제작했을까. 답은 아니다. 누리꾼들이 ‘미군 와이프 공개처형’ 등의 이름으로 공유하는 영상은 처음엔 유명 유튜버가 장난으로 찍은 영상이며, 여기에 다시 누군가 IS 선동 영상의 배경음악을 삽입하고 편집기법을 흉내 내 만든 가짜영상이었다. 오늘의 팩트체크 끝.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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