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과 극’ 깃발 파는 쇼핑몰의 정체

정용인 기자
2021.11.29

“어떤 미친놈이 이런 생각을 한 거지”, “장사 잘하네.”

발단은 지난 7월 하순, 한 누리꾼의 고민 상담 글이었다. 여동생 방에 들어갔는데 책상에 이상야릇한 깃발 하나가 놓여 있더라는 것이다. 누리꾼 묘사에 따르면 그 깃발은 “보라색 바탕에 5사단 열쇠마크 같은 것에 주먹”이 그려져 있었다.

유튜브 캡처

유튜브 캡처

이를 단서로 누리꾼들이 찾아낸 것은 래디컬 페미니즘(TERF) 깃발과 그것을 파는 쇼핑몰이었다. 가격은 2만3000원. 이건 뭐지? 누리꾼들의 의심은 해당 쇼핑몰로 이동했다. ‘당신의 반란’을 모토로 하는 레벨리오라는 사이트다. 깃발을 사면 ‘랟펨(SNS에서 래디컬 페미니즘을 줄여 사용하는 단어)단체’에 일정액이 후원금으로 기부된다니. ‘걸스 두 낫 니드 어 프린스’ 티셔츠 같은 건가. 그런데 이 쇼핑몰에서 판매하는 깃발은 그것만 아니었다. 남성주의 깃발을 사면 신남성연대나 전립선암센터에 후원금이 기부된다는 안내창이 뜬다.

회사가 공개하고 있는 정치 깃발 카탈로그를 보면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트로츠키주의에서부터 아프리카사회주의, 호자주의, 포사다스주의까지 듣도 보도 못한 극좌 깃발부터, 대안우파, 능력주의, 민족사회주의(나치), 피노체트주의, 에코파시즘 등 역시 생소한 극우 깃발까지 목록을 갖추고 있다.

쇼핑몰의 실체가 알려지면서 누리꾼들의 평가는 “알고 보니 온갖 종류의 깃발을 다 파는 자본주의 돼지새끼들”로 바뀌었다. ‘미친놈들’, ‘자본주의 돼지’ 등은 욕설이라기보다 이 맥락에서는 장사수완에 대한 칭찬으로 읽힌다.

어쨌든 그래서 궁금하다. ‘갈라치기로 이득 보는 놈들’, ‘정치학과 나와 취직 안 된 놈들이 만든 몰’과 같은 풍설만 난무하고 있는데, 실제 사상 깃발을 사업 아이템으로 삼은 이유는?

일단 사업자 등록을 찾아보면 이 쇼핑몰은 바닐라리브로라는 회사가 운영한다. 지난 5월 18일 서울 관악구청에 등록한 업체다.

“아,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어요.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오더군요. 랟펨 글은 저도 봤는데 우리가 올린 건 아니고요. 마케팅을 안 한 건 아니에요. 페이스북 광고를 돈 주고 해봤는데 도움은 안 되더라고요”, “서른다섯 살쯤이라고 해두고 싶다”는 이 업체 대표 ‘조셉’(과거 실제로 쓴 영어이름이라고)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원래는 중고책 사업을 하다 직원 한명이 아이디어를 내 깃발을 주문받아 제작하는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래디컬 페미니즘 깃발로 유명해지면서 ‘페미코인 달달하냐?’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생각보다 돈 안 벌려요. 저희 카탈로그를 보면 깃발 수만 150개입니다. MOQ(최소주문수량) 같은 건 꿈도 못 꿉니다.”

누리꾼 풍문을 검증할 차례다. 취직 못 한 정치학과 졸업생들이 만든 회사? “생각해보니 직원 중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친구가 있긴 한데… 그렇다고 사상을 잘 아는 건 아닙니다. 문과가 많긴 합니다. 저도 문과고요.” 탈레반 깃발도 파나. “팝니다. 전체 카탈로그를 보면 정치 카테고리의 C015번으로 지하드 깃발이 있어요.” 다만 욱일기와 실정법 위반 소지가 있는 인공기(북한 국기)는 안 판다. 갈라치기로 이득 보는 것 아닌가. “갈라치기를 하고 싶으면 한쪽 사상만 엄청 다뤘겠죠. 우리는 갈라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허용하고 싶습니다.” 가장 많이 팔린 깃발은 역시 래디컬 페미니즘 깃발? “글쎄요. 10월 말쯤 게시판에서 남성주의 깃발은 하나도 팔리지 않아 기부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그 뒤 딱 한건 주문이 있긴 했습니다. 가장 많이 팔린 깃발은… 영업기밀입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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