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대륙횡단 ‘평화마라토너’ 강명구… 통일 염원·인류 최초 마라톤 세계일주 도전

글·원희복 선임기자
2017.10.31

1992년 몬트리올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 선수를 인터뷰 한 적이 있다. 그때가 금메달 따기 전인가 후인가, 아무튼 ‘왜 뛰느냐’는 지극히 원론적인 질문에 황 선수는 망설임 없이 “돈을 벌기 위해 뛴다”고 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기자는 ‘너무 노골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분명하다’고 기사를 썼을 것이다.

흔히 마라톤이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하지만 기자가 볼 때 마라톤은 ‘분명한 목적’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운동이나 나름의 목적이 있겠지만 마라톤만큼 확실한 목적을 가진 운동도 드물 것이다. ‘내가 왜 이 고통을 감내하며 뛰고 있는가’에 대한 답은 각자 다르지만 분명한 목적이 없다면 완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마라톤이다.

환갑을 넘어 그 마라톤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마라톤 풀코스 42.195km 거리의 무려 380배나 되는 1만6000km를 뛰고 있다. 매일 40~50km씩 1년 2개월 동안 뛰는 마라톤이다. 바로 ‘유라시아 대륙 횡단 평화마라톤’의 주인공 강명구씨(61)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9월 1일 북유럽 대륙의 끝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시작해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 헝가리, 세르비아, 불가리아, 터키, 이란,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중국 등 유라시아를 횡단한다. 그리고 내년 10월 북한을 거쳐 판문점을 통과해 서울에 돌아올 계획이다.

그는 이미 2015년 미국 대륙 5200km 횡단 마라톤에 성공했다. 그러니까 이번 유라시아 대륙 횡단에 성공하면 마라톤으로 세계일주를 하는 셈이다.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대모험이다. 평화마라톤 공동조직위원회 여인철 공동회장은 “이 고난의 길은 인류 최초의 도전의 길이며 전무후무할 일”이라며 “그가 판문점에 다다르는 날, 남쪽의 우리들은 두 팔 벌려 마중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경향신문 자료사진

내년 10월 북한 거쳐 판문점 통과 계획

그는 자신이 뛰는 이야기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페이스북과 다음카페 등에서 중계하고 있다. 10월 18일 현재 그는 네덜란드와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를 거쳐 헝가리를 뛰고 있다. 47일간 5개국 1750km를 달렸다. 그것도 숙식 장비를 실은 쌍둥이 유모차를 끌면서 뛴다. 10월 17일 그는 헝가리 들판을 뛰며 이렇게 썼다.

“오스트리아에서 헝가리로 넘어서는 길은 산도 없고 강도 없고 햇살만이 들판에 축복처럼 가득하였고…. 이곳은 훈족들의 말발굽 먼지가 일어났던 곳이다. …건물은 지으면 파괴되고, 그 잔해 위에 다시 지었고 또 전쟁이 터졌다. 전쟁의 트라우마로 치면 우리보다 몇 곱절 더 할 헝가리의 하늘에 이젠 전쟁의 먹구름이 싹 가신 청명하고 평화로운 가을 하늘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겠다. …우리도 평화협정이 빨리 체결되고 조속히 한반도에서 전쟁 재발을 막는 모든 조치들이 하나씩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강명구씨가 지금 마라톤 풀코스의 380배나 되는 거리를 뛰는 분명한 목적은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는 것이다. 보통의 나이든 시민인 그가 이런 고통을 감내하며 평화를 갈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터뷰는 카카오톡으로 밤 12시가 넘어 이뤄졌다. 헝가리와 서울은 7시간 시차가 있기 때문이다.

-하루 일정은 어떻게 되는가.

“아침에는 6시에 일어나 씻고 보통 호텔에서 7시에 아침을 먹으면 7시30분 정도에 출발한다. 점심은 식당을 만나면 아무 때라도 먹는다. 시골길을 달리는 일이라 점심에 맞춰 식당을 찾는 일이 만만치 않다. 마라톤은 보통 4시쯤 끝나지만 간혹 7시까지 달려야 하는 경우도 많다.”

-페이스북을 보면 가끔 햄버거를 먹거나 점심도 거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매일 50km씩 달리려면 체력소모가 심각할텐데. 게다가 61세 나이로 무리 아닌가.

“햄버거만 먹으면서는 체력 유지가 힘들다. 사실 먹고 자는 것이 제일 큰 문제다. 나이가 들면 확실히 근육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신 끈기나 인내심은 젊었을 때보다 좋아졌다. 그러니 준비만 잘한다면 나이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이 평화마라톤을 기획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며, 뛰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처음 미국 대륙을 달릴 때는 막연히 끝없이 달리고 싶어서 시작했다. 유모차 앞부분이 허전해 ‘남북평화통일’이라는 배너를 달았다. 나중에 사람들은 강명구라는 이름 석 자는 기억 못하고 나를 ‘통일 마라토너’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불리니 사명감도 생겼고 결국 아시안 최초로 무도움 대륙 횡단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때 뉴욕 유엔빌딩에 골인할 때 기자의 ‘다음 도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아무 생각 없이 ‘유라시아 대륙 횡단’이라고 대답한 것이 진짜 꼭 하고 싶은 일이 됐다. 반드시 평양을 거쳐서 판문점으로 들어와 평화통일 운동에 족적을 남기고 싶다.”

사실 그의 통일에 대한 관심은 오래되지 않았다. 재작년 미 대륙 횡단 마라톤 이전까지 그는 미국에서 마라톤을 좋아하는 평범한 교포였던 것이다. 그는 “굳이 통일의 의미를 찾는다면 부친이 황해도 실향민”이라며 “통일마라톤은 인생의 이모작을 뜻 있게 사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후 그는 통일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한 것 같다.

평화마라토너 강명구씨가 10월 13일 오스트리아 빈 시내를 통과하고 있다. / 평화마라톤 조직위 제공

평화마라토너 강명구씨가 10월 13일 오스트리아 빈 시내를 통과하고 있다. / 평화마라톤 조직위 제공

그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대학을 중퇴하고 1990년 미국 뉴욕으로 이민갔다.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는 질문에 “학력은 빼달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 샌드위치 가게 점원, 쇼핑몰 계산원, 식당 등 “안 해본 일 없이 열심히 살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일한 취미가 마라톤이었다. 2009년 마라톤을 시작한 이후 그는 보스턴, 뉴욕, 시카고, LA, 필라델피아, 워싱턴 등 유명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약 45회나 완주했다.

2015년 7월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귀국

그는 2015년 운영하던 식당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 이모작을 꿈꾸며 미 대륙 횡단에 도전했다. 음식과 텐트, 노트북을 유모차에 싣고 밀면서 달렸다. 그는 달리면서 보고 느끼고 자연과 사람들을 꼼꼼히 기록해 지난 1월 <미대륙 5200km 마라톤 횡단기-59세에 떠나는 아주 특별한 여행>이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책도 책이지만 무엇보다 큰 소득은 뒤늦게 ‘통일·평화’를 깨달았다는 점이다.

2015년 7월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그는 새로운 인생 2막을 시작했다. 원불교 신자인 그는 3월 18일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로 갈등을 빚고 있던 경북 성주 소성리 마을을 출발해 서울 광화문까지 270.5km를 뛰는 ‘평화 마라톤 순례’에 참가했다.

6월 6일에는 제주 강정마을을 출발해 부산으로 가 울산~경주~대구~성주를 달리고, 승용차로 다시 광주로 이동해 전주~익산~논산~대전~청주~성남-광화문까지 총 663km를 주파해 6월 24일 시청앞 광장에 도착했다. 해군기지 반대운동의 현장인 제주 강정마을에서 사드 배치로 몸살을 앓는 성주를 거치는 이 18일간의 행사는 ‘평화마라톤’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그는 시민들이 만들어준 월계관을 쓰고 평화마라토너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는 남들이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평화마라토너’ ‘통일마라토너’로 자리잡았다.

-뛸 때 무슨 생각을 하면서 뛰나.

“사람은 몸이 고달프면 마음이 편하고 몸이 편하면 마음이 분주하다고 했다. 사실 뛸 때는 통일이나 평화를 생각하지 못하고 거의 무념의 상태에서 뛴다. 그나마 쉬는 시간은 사색과 명상을 하는 시간이다.”

-이번 마라톤 행사에 대해 국내 후원 행사가 열리고 있다. 국내 후원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후원자들에게 대단히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해달라. 나 혼자 달리지만 이 행사는 모든 국민과 재외동포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지상 최대의 행사가 될 것을 확신한다.”

사실 1년 2개월이나 걸리는 이 행사는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작은 후원과 협찬으로 이뤄졌다. ‘평화마라토너 강명구와 함께 달리는 유라시아대륙 횡단 평화마라톤 조직위원회’라는 매우 긴 이름에는 이창복 6·15 남측위원회 상임대표, 평화통일 시민연대 이장희 교수, 원불교 정상덕 교무, (사)다른백년 이래경 이사장, 평화누리 김영애 대표, 생명모성의 길 김반아 대표, (사)전국일주 김성기 대표, 평화협정행동연대 장호권 고문(고 장준하 선생의 장남) 등 3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평화마라토너 강명구씨가 10월 13일 오스트리아 빈 한인문화회관에서 열린 교포 환영회에서 티셔츠에 새겨진 평화마라톤의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 평화마라톤 조직위 제공

평화마라토너 강명구씨가 10월 13일 오스트리아 빈 한인문화회관에서 열린 교포 환영회에서 티셔츠에 새겨진 평화마라톤의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 평화마라톤 조직위 제공

통일 기원하는 사람들 후원으로 이뤄져

송영길 민주당 의원과 이재명 성남시장, 양기대 광명시장이 개인적으로 후원하고, 지난 21일 서울에서는 일일호프 후원행사를 가졌다. 이 티켓은 민주당 박남춘·유승희·인재근 의원을 비롯한 평화·통일을 갈망하는 시민들이 사줬다. 다행히 마라톤 신발과 옷은 코오롱에서 협찬하기로 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특히 날씨가 추워지는데 차량이 없어 식량과 텐트를 실은 유모차를 끌면서 뛰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게다가 앞으로 이란의 사막과 중앙아시아 산악과 고원, 그리고 중국 대륙을 관통하는 11개국 1만4000여km가 남아있다. 마지막 고비는 중국 단둥에서 신의주~평양을 통과하는 일이다. 그는 판문점을 거쳐 내년 10월 서울로 돌아올 계획이다. 평화·통일 관련 단체가 다각적으로 그의 북한 통과를 모색하고 있지만 최근 긴장된 남북관계로 우려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가 과거 박근혜 정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 국제여성평화단체가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는 ‘2015 위민크로스 DMZ’ 행사를 개최한 적이 있다. 북한은 이 행사를 승인해 행사단의 판문점 통과를 허용했지만 오히려 우리 정부와 유엔사가 불허, 결국 행사단은 도라산역에서 차를 타고 넘어야 했던 전례가 있다. 이번 문재인 정부는 남북교류의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이 행사를 불허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강명구씨는 사실 남북한의 정치적 상황과 북·미 간 국제기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14개월 동안 달리면서 여론을 모으고 재외동포들의 간절한 마음을 담으면 북한도 나 하나 통과시켜주지 않을까”라며 “북한도 자신들이 평화를 사랑하는 정권임을 알리고 싶어할 것”이라고 소박한 심경을 나타냈다. 19일 오후 그는 카톡으로 “지금 부다페스트를 향해 출발했다”고 알려왔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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