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정일우> 다큐감독 김동원 …약자의 앵글 통해 가난을 즐기는 자유인

글·사진 원희복 선임기자·우철훈 선임기자
2017.11.07

이번 인물탐구 대상은 ‘정일우’와 ‘김동원’이라는 두 사람이다. 정일우는 예수회 신부이고, 김동원은 이 사람의 일대기를 영화화한 다큐 감독이다. 정일우와 김동원 두 사람은 국적과 외모가 다르지만 생각이나 삶의 가치는 매우 ‘비슷’하다. 그래서 같이 막 섞어 다뤄도 무방할 듯하다.

우선 정 신부의 본명은 ‘존 데일리’이고 미국인이다. 미국 세인트루이스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966년 예수회 사제 서품을 받았다. 정 신부는 한국에 들어와 서강대 교수를 하다 73년 서울 청계천 철거민촌에 뛰어들어 80년대 상계동에서 도시빈민운동을 했다. 이 과정에서 빈민운동가 제정구씨(후에 국회의원)와 1986년 나란히 막사이사이상을 받기도 했다. 94년 충북 괴산에서 농민운동을 하다가 2014년 조용히 선종한 종교인이다.

김동원은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와 대학원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우연히 상계동에서 정일우 신부에게 감화받아 주로 ‘가난한 사람’의 다큐영화를 제작했다.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를 지내고, 독립·다큐영화를 추구하는 ‘푸른영상’ 대표로 ‘독립영화의 대부’ 소리를 듣는다.

[원희복의 인물탐구]<내 친구 정일우> 다큐감독 김동원 …약자의 앵글 통해 가난을 즐기는 자유인

미국인 예수회 신부의 일대기 다뤄

김 감독은 10월 26일 정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내 친구 정일우>를 개봉했다. 그와 제정구기념사업회, 예수회 한국관구, 그리고 그가 대표로 있는 푸른영상이 공동으로 만든 이 영화는(배급 시네마 달) 84분 분량으로 비교적 짧은 영화다. 그는 영화 개봉에 앞서 기자를 만났다.

-영화를 만든 계기와 영화를 통해 보여주려는 의도는 무엇인가.

“정 신부와의 인연은 상계동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때 ‘재미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지만 철거민 상황이 급박해 영화 제작을 못했다.… 이후 여기저기서 자료가 구해지다 보니 영화를 만들었다. 개봉은 생각 안 했는데, 개봉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아 여러분들과 함께 보게 됐다.”

-정일우 신부는 어떤 사람인가.

“신부님이 지향하던 것은 공동체의 가난한 가치라고 할까, 가난은 상태라기보다 가치다. 정 신부의 자유스러움은 추구하는 가난정신에 있었다. 가난을 즐길 줄 알았던 분이다. 가난한 삶이 완전히 체화되고 그 안에서 더 행복함을 아는 분이다. 그런 가난을 알면 요즘 관객들, 요즘 젊은이들이 좀 더 자유스럽지 않을까 생각했다.”

-영화가 증언과 자료화면으로 가다보니 정 신부는 험 잡을 수 없는 ‘완벽한 사람’으로 묘사돼 있다. 예수님도 험이 있고, 고뇌하는 참사람이다. 영화 증언에서 잠깐 나왔지만 고스톱을 칠 때 욕하는 장면 등은 정일우라는 참인간을 보여주는 것으로 더 가슴에 와닿지 않았을까.

“동의한다. 영화를 만들기 전부터 그것이 가장 걱정이었다. 과거 <한사람>이라는 알코올중독자이자 기인에 가까운 신부님을 영화화한 적이 있다. 그러나 정 신부는 주변에 싫어하는 사람이 없어 갈등요소가 없었다. 물론 1990년대 박홍 신부와의 갈등, 같이 활동한 제정구씨와도 싸움이 잦았다. 박홍 신부를 인터뷰하려 했는데 병상이라 포기했다. 정 신부님이 ‘인간이 되고 싶다’며 자신을 낮추는, 병상에서 약한 모습 보이며 떠나는 것으로밖에 묘사할 수 없었다.”

영화 「내 친구 정일우」 포스터. / 시네마 달 제공

영화 「내 친구 정일우」 포스터. / 시네마 달 제공

영화 <내 친구 정일우>는 정 신부의 고향 미 일리노이주 파일로 마을에서 시작해 청계천과 상계동 등 숱하게 철거민과 함께하는 장면을 거친 후 마지막 충북 괴산에서 정 신부가 선종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그는 내 친구가 아닌 아버지였다”는 멘트로 끝난다. 영화는 정 신부의 헌신과 권력자와의 싸움을 통한 한 인간의 가난하고 아름다운 삶의 여정이다. 김 감독은 “고 김수한 추기경도 ‘오랜 친구’, 괴산의 할머니도 ‘내 동갑’ 등으로 불러 신부님 대신 모든 관객의 친구라는 생각에서 제목을 ‘내 친구’로 정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영화만큼이나 정 신부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 1955년생인 김 감독은 산부인과 의사인 어머니 덕분에 부유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학창시절 홍콩 액션과 스파게티를 즐기고 재수생 시절에는 술에 절어 당구장에서 살았다. 대학(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서도 공부나 유신시절의 시국문제에 빠지기보다 예쁜 여학생들 많다고 연극반에 갔다. 그는 젊은 시절 그냥 그렇게 잘 살았다.

김 감독과 정 신부의 ‘비슷한 삶’

그가 입학하기(74학번) 직전인 73년 정 신부는 학교를 그만두고 청계천으로 갔기 때문에 정 신부를 만날 기회는 없었다. 단지 얘기로만 들었을 뿐이다. 김 감독은 군대를 갔다 와서 대학원을 다니며 충무로를 기웃거리며 이장호·정지영·장선우 감독 등으로부터 감독수업을 받긴 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영화는 외국영화를 수입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고, 사전검열은 다반사였다. 상업영화에 실망한 그는 결혼식 비디오 촬영을 해주며 ‘빈둥’댔다.

그러다 1986년 10월 정 신부로부터 강제철거 증거 확보를 위한 촬영 부탁을 받고 상계동에 갔다. 그와 정 신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고, 영화 <내 친구 정일우>도 여기서 시작한다. 하루만 하려던 촬영이 사흘이 되고, 일주일이 되고, 결국 김 감독의 삶은 여기서 바뀌었다. 그는 아이를 업은 아주머니가 철거용역과 포클레인에 맞서는 현장을 보면서 세상을 깨우쳤다.

1986년 김 감독은 고3 수험생의 종교·실존적 갈등을 그린 단편 <야고보의 오월>을 처음 발표했다. 이후 1988년 불과 1분 동안 서울올림픽 성화가 지나가는 길을 정화한다고 삶의 보금자리를 철거하는 상계동을 그린 <상계동 올림픽>을 만들었다. 그의 첫 도시빈민 다큐영화인 이 작품은 베를린영화제와 일본 야마가타국제다큐영화제에 초대됐다.

이후 김 감독은 ‘푸른영상’을 만들어 독립·다큐영화 공동체를 이끌었다. 1990년 <벼랑에 선 도시빈민>, 1993년 <미디어 숲의 사람들>, 1994년 <행당동 사람들> 등을 연이어 발표했다. 그는 1997년에 87년 6월 시민항쟁을 기록한 영화 <명성, 그 6일의 기록>을 통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재상을 받았다. 2003년 비전향장기수의 오랜 생활을 기록한 <송환>은 스위스 프리부르국제영화제 다큐부문 대상, 선댄스영화제 표현의 자유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심사위원 특별상, 서울독립영화제 대상·관객상, 춘사대상영화제 기획제작상 등을 받았다.

그는 “<송환>을 만들어 1700만원짜리 스타렉스 중고차를 구입하고, 반전세를 전세로 돌린 적이 있다”면서 “딱 한 번 돈을 번 작품으로 한 4000만원 벌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큐·독립영화의 대부’라는 소리를 듣던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0년 만에 스스로 그만두고 나왔다.

20일 시사회에서 김동원 감독과 배급자 시네마달 김일권 대표, 예수회 전주희 수사가 영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시네마 달 제공

20일 시사회에서 김동원 감독과 배급자 시네마달 김일권 대표, 예수회 전주희 수사가 영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시네마 달 제공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를 왜 그만뒀나. 정 신부가 서강대 교수 그만두고 청계천으로 간 것을 따라 하려 했나.

“아니다. 아니다.(그는 손사래를 쳤다) 원래 한 5년 하려고 했는데 10년을 했다. 할 만큼 했다. 팔자에 없는 공무원(한예종 교수는 국가공무원이다)을 하다 보니 사람이 간사해지더라. 게을러지고, 마음에도 없는 글을 써야 하고…, 자유롭지 않았다.”

-정 신부처럼 가난을 찬미하는데, 경제적 여건이 돼야 원하는 작품을 만들 수 있지 않나.

“아니다.(그는 적극 부정했다) 삼성 이재용이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빈곤하다. 절대적 빈곤은 깨뜨려야 할 대상이지만, 가난은 상대적 개념이다.”

-9년 만의 작품이다. 그동안 뭘 했나.

“그동안 게을렀다. 원래 내가 게으른 편이다. 또 내가 어디서 지원받아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서 안 만들어도 누가 뭐라 그러지 않는다.(하~하~) 그러다 보면 더 게을러진다. 그래서 9년 만에 작품이 나오게 된 것이다. 사실 옛날보다 작업하기 힘들어진다. 눈이 나빠지니 뷰 파인더도 잘 안 보이고. 혼자 촬영하다 보니 자신이 없어진다. 두려워지기도 하고….”

-최근 다큐영화가 일반 극장에 개봉되면서 적잖은 관객이 모인다. 이제 관객도 다큐영화의 가치를 알게 된 것인가.

“원래 다큐가 재미있다. 그런데 다큐 감독들이 잘 만들지 못해서 관객이 없었다. 극영화 만들던 분들도 다큐영화 많이 만들면 좋겠다.”

요즘 상영관에서 선보이는 다큐영화 상당수는 방송국에서 해직된 PD나 기자 출신이 제작하는 것이 많다. 그들은 방송에서 익힌 시청률 끌어올리는 노하우를 영화에서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들의 카메라 앵글은 이명박이나 방송사 사장 등 권력자에게 달려간다. 하지만 김 감독의 카메라 앵글은 항상 ‘약한 자’에게 일관돼 있다. 김 감독은 “나보고 이명박 쫓아가 카메라 들이대라면 자신이 없다”면서 “나는 오히려 가난한 동네에 가는 것이 편하다”고 말했다.

아직 마무리 못한 두 개의 이야기

사실을 바탕으로 진실을 찾는 점에서 기자나 다큐 감독이나 비슷하다. 그러나 기자는 사람의 ‘증언’을 그대로 믿지 않는다. 이것은 기자의 직업적 병폐이기는 하지만, 진실을 찾기 위해서는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기억에 의존한 증언은 불확실하거나 자기 편의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무리 약자의 증언이라도 진실은 다를 수 있다. 의문은 ‘다큐영화 감독도 증언을 교차검증할까?’였다.

“검증이라기보다… 인간인 이상 거짓말을 한다. 그 거짓말을 할 때 표정을 읽는 것도 재미있다. 철거 반대 조직에는 오만가지 이해관계 세력이 다 들어 있다. 상계동의 경우 처음 1700가구에서 시작해 120가구 남고, 나중에는 30가구가 남았다. 그 과정에서 (진실이) 검증된다. 물론 그 안에 또 갈등이 있지만….”

그는 작품을 찍다 중단한 미완의 작품 2개가 있다. 하나는 비전향장기수를 그린 <송환2>다. 이들과 남에서 함께한 기록은 촬영을 마쳤으나, 북으로 갈 때 영상도 함께 촬영해 완성하려 했지만 할 수 없었다. 이들의 고향행 촬영을 북한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몇 년간 스웨덴·캄보디아·중국 북한대사관을 통해 이들의 귀향 장면 촬영을 타진했는데 반응이 없었다”면서 “그냥 서울(낙성대) 얘기만 해서 소품으로 마무리하려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미완의 작품은 부모님 얘기다. 그는 북한 김일성대학을 다니다 남으로 내려온 어머니 얘기를 통해 해방공간 얘기를 기록하려 했다. 하지만 과거를 기억하기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보고 도중에 중단했다. 그는 “어머니의 누이가 북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허~ 허~ 그는 가슴이 벅차는 듯했다) 어머니 얘기는 내 가슴에 꽂힌 빚이다, 해야 하는데…”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영화가 개봉되기 전인 23일 볼리비아·칠레 등에서 5개월간 ‘놀다 올 예정’이라며 한국을 떠났다. 그는 자신이 직접 철거민 조합장까지 했지만 세상에 분노하거나 싸우려 하지 않는다. 그냥 게으른 듯 무덤덤하고, 카메라 앵글로 보복하는 것이 전부다. 그는 정 신부처럼 가난을 즐기는 자유인이기도 했다.

<글·사진 원희복 선임기자·우철훈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매체별 인기뉴스]

      • 경향신문
      • 스포츠경향
      • 주간경향
      • 레이디경향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