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을 보고 문명을 반성한다

2011.04.05

제임스 볼드윈이 엮은 <오십 가지 유명한 이야기> 중에는 영국의 크누트(Cnut) 대왕에 관한 일화가 있다. 크누트 대왕은 덴마크 왕국의 아버지와 폴란드 왕국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덴마크 왕자로 11세기 전반 영국을 다스렸던 인물이다. 그는 영국, 덴마크, 노르웨이, 그리고 스웨덴 일부를 포함하는 드넓은 제국을 건설한 정복 군주였고, 그래서 주위에는 그를 찬양하는 신하들로 가득했다.

지진으로 폐허가 된 일본 센다이의 시민들이 주거지에 돌아와 가재도구를 챙기고 있다. | 연합뉴스

지진으로 폐허가 된 일본 센다이의 시민들이 주거지에 돌아와 가재도구를 챙기고 있다. | 연합뉴스

어느 날 그는 바닷가에 행차하여 신하들에게 짐짓 물어 보았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가?” 물론 예스였다. “모든 사람이 내게 복종하는가?” 또한 예스였다. “바다도 내게 복종할까?” 이 순간에도 예스였다. 크누트는 바다에 명했다. “너는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라.” 무심한 파도는 계속 밀려와 크누트를 덮쳤다. 당황해 하는 신하들에게 그는 따끔한 훈계를 내렸다. “너희들이 찬양해야 할 임금은 내가 아니라 바다와 대양을 다스리는 조물주렷다!”

일본에서 발생한 ‘동일본 거대지진’의 충격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 수마트라 대지진, 아이티 대지진의 참사가 바로 엊그제 일만 같은데 또다시 이번에는 지척의 이웃나라에서 대재난이 발생한 것이다. 긴급 대피를 호소하는 아나운서의 울음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자연의 재난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옛날 사람들은 자연에 겸손했다. 자연 현상에서 신의 섭리나 하늘의 뜻을 보려고 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떠한가? 산은 깎아버리고 강은 파헤쳐버리면서 녹색 성장을 말한다. 크누트 대왕과 달리 바다에 명해 말을 듣지 않으면 즉시 이를 메워버리고는 자신을 찬양하라고 과시할 태세다. 과연 우리 현대 문명은 지진이라고 하는 이 거대한 자연의 분출 앞에서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반성할 수 있을까?

삼국시대부터 지진 기록
지진은 자연의 작품이다. 문명은 인간의 작품이다. 자연과 인간은 다르다. 어쩌면 지진을 보고 문명을 반성한다는 발상이 이치에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조선후기 학자 홍대용은 문제작 <의산문답>에서 지진은 인간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설파하였다. 땅은 본래 살아 있는 물체라서 땅 속에서 수화와 풍기가 유행하다가 막히면 지진이 일어나는 것이니 지진이 일어났다고 해서 여기에 깃들여진 하늘의 뜻을 추측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지진은 자연 현상이니 홍대용의 주장은 옳다. 땅의 흔들림과 하늘의 경고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있음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진을 보고 인간 사회에 문제점은 없는지 하늘의 뜻을 헤아려 보았던 인문적인 성찰이 무의미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넓게 보면 문명을 반성하고 점검하는 안전판이었다.

이 전통은 오래 되었다. 지진이 오래 된 만큼이나 지진을 기록하고 지진을 인문적으로 해석했던 역사는 오래 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책 <삼국사기>에 보면 고구려 유리왕, 백제 온조왕, 신라 탈해왕, 이렇게 일찍부터 지진을 기록한 기사가 나온다. 삼국시대부터 각국의 사관은 지진을 기록한 것이다.

조선후기 학자 이익은 1596년 조선사절단으로 일본에 다녀온 황신의 일본 체험담을 근거로 일본의 지진을 소개한 적이 있다. 사진은 성호 이익의 저서 <성호사설>. |경향신문

조선후기 학자 이익은 1596년 조선사절단으로 일본에 다녀온 황신의 일본 체험담을 근거로 일본의 지진을 소개한 적이 있다. 사진은 성호 이익의 저서 <성호사설>. |경향신문

고려시대에도 조선시대에도 사관들의 지진 기록은 계속되었다. 아울러 조정의 신하들은 지진의 의미를 끊임 없이 자기 시대 속에서 해석해 왔다. 조선 숙종때 지진이 발생하자 홍문관에서는 이를 계기로 임금이 성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외척을 경계할 것을 주장한 적이 있었다. 마침 이 때가 인현왕후가 막 궁궐에 들어갔을 때인지라 인현왕후의 앞날을 예고하는 불길한 징조로 해석하는 이도 있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자기 나라의 지진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의 지진, 특히 일본의 지진에 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조선후기 학자 이익은 그 유명한 <성호사설>에서 1596년 조선사절단으로 일본에 다녀온 황신의 일본 체험담을 근거로 일본의 지진을 이렇게 소개한 적이 있다. 이에 따르면 일본은 본래부터 지진이 많은 나라로 알려져 있는데 황신의 일본 체류 기간에는 단 하루도 지진이 없는 날이 없었다.

그 끔찍한 지진 광경을 몇 가지 예시하자면, 일본의 관백 풍신수길이 거주하는 5층 건물이 무너져 압사한 사람이 400명이나 되었고, 일본의 어떤 곳에서는 3400호가 꺼져서 큰 못이 되었고, 또 어떤 곳에서는 5600명이 자기도 모르게 산 위로 던져졌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조선후기 일본에 다녀왔던 조선통신사 일행은 일본에서 크고 작은 지진을 겪은 일이 많았다.

지진은 이제 인류 공동의 재난
1906년 미국에서 발생한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은 한국 사회에서 외국의 지진을 향한 사회적인 관심을 폭발시킨 중요한 사건이었다.

샌프란시스코는 본래 멕시코 영토였다가 미국이 매입한 후 특히 주변의 금광 개발과 연결되어 미국 서부의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로 성장한 도시였다. 도시의 번영에 비례하여 아시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아메리카 최대의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었고, 우리나라 재미교포도 안창호를 중심으로 이곳에서 공립협회를 결성하여 해외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지진은 4월 18일 새벽 5시 12분에 발생하였다. 공립협회에서 발행한 <공립신보>는 ‘상항(桑港) 대지동(大地動) 대화재(大火災)’라는 제목으로 저간의 소식을 알리면서 특히 화재가 지진보다 참혹했음을 전하였다. 현재 추산하기로는 약 41만 도시 인구 중에 사망자 3000명, 이재민 최대 30만명이 발생하고 도시의 80%가 파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야말로 대재앙이었다.

지진 소식은 국내에 빠르게 전해졌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같은 민족지는 지진 기사를 보도하면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재난을 당한 동포를 도울 것을 연일 호소하였다. <황성신문>은 현지의 한국인과 본국의 그 처자들을 구휼하는 방안을 정부에서 상의하여 조처하라는 고종 황제의 윤음(왕이 백성이나 신하에게 내리는 문서)을 대서특필하였고, <대한매일신보>는 한국이 외교권을 잃었지만 한국이라는 국가의 존재감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모금운동을 열렬히 전개하였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에서 참사를 당한 해외 동포를 위해 한국 사회에서 사회운동을 전개한 것은 본질적으로 자국민을 위한 민족적인 사회운동이었지만 글로벌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적인 사회운동으로 나아갈 초석이 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제 100년이 지나 그 초석 위에 재난을 당한 일본을 돕는 한국의 성숙한 사회의식이 표출되고 있다. 지진이라는 문제는 이제 너나 없는 인류 공동의 재난이 된 것이다.

지진을 둘러싼 인간의 인문적 성찰과 사회적 실천은 달라져 왔다. 이웃나라의 대지진을 목도하면서 우리 사회는 지금 무엇을 성찰하고 있는가? 지금 무엇을 실천하고 있는가? 우리는 정녕 관성적으로 질주하는 이 문명의 기관차를 중간에 멈추고 근본적인 성찰과 실천을 수행할 용기를 갖추고 있는가?

노관범<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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