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교 120년 ‘순국’과 ‘추문’ 사이

2011.03.29

열강 침략 속 목숨 바친 자주독립 외교 ‘상하이 스캔들’로 먹칠

3월 꽃샘추위와 함께 찾아온 상하이 스캔들로 전국이 떠들썩하다. 주중 상하이 총영사관의 외교관들이 중국 여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면면들이 조사대상이 되면서, 그간 해외 주재 공관에서 근무하는 외교관들의 일상적인 관행으로 묵인되어 왔던 온갖 비위들이 새삼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1월 26일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외곽 ‘북방묘지’에 있는 이범진 공사 순국비 앞에서 이 공사의 외증손녀 루드밀라 예시모바(75·앞줄 가운데)와 이윤호 주러 한국대사(오른쪽 네번째) 등 추모객들이 묵념하고 있다. |연합뉴스

1월 26일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외곽 ‘북방묘지’에 있는 이범진 공사 순국비 앞에서 이 공사의 외증손녀 루드밀라 예시모바(75·앞줄 가운데)와 이윤호 주러 한국대사(오른쪽 네번째) 등 추모객들이 묵념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것은 공과 사를 구별할 줄 모르는 외교관 개인의 공직윤리의 실종으로 볼 수도 있지만, 국가를 대표하는 해외 주재 외교 공관의 존엄한 위치에 관한 공공의식이 약화된 소치로 볼 수도 있다. 해외 외교는 시쳇말로 그 나라 국격(國格)과 직결된 중요한 활동이고, 그렇기 때문에 일반 비즈니스와는 차원을 달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지난 1월 26일 러시아의 옛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이범진 순국 100주년 추모행사는 해외 주재 한국 공관의 숭고한 역할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사건이다. 이범진은 러시아 주재 초대 한국 공사에 임명되어 이역만리에서 조국을 위해 애쓰다가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했던 인물이다. 헤이그 밀사로 활약했던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그의 아들 이위종이다.

그가 자결한 지 100년이 지난 이날 이 행사에는 러시아 주재 한국 외교관과 한국 교민, 고려인 동포, 그리고 유족을 대표해 외증손녀 루드밀라 예시모바, 외고손녀 율리야 피스쿨로바가 참석했다. 2011년 1월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동년 3월 중국 상하이, 이 두 곳은 훗날 한국 외교사를 서술하는 상반된 빛깔의 장소로 기억될 것이다.

돌이켜 보면 한국 외교의 역사는 오래 되었다. 국가가 있으면 으레 외교가 있게 마련인 법, 한국 외교의 시초는 멀리는 고조선시대 한(漢)과의 무역분쟁 및 군사교섭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여러 나라 사이에 상호 협력과 상호 대립을 거치면서 오랜 기간 자체적으로 많은 외교 경험이 축적되어 왔다.

올 1월 이범진 열사 순국 100돌 추모
고려시대에 서희가 거란의 침입에 맞서 외교적 담판을 벌여 강동 6주를 확보한 사실은 한국외교사의 유명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정몽주 같은 이도 고려 말기 중국과 일본에 여러 차례 건너가 외교적 사명을 달성한 고려 사회의 세계적인 외교관이었다.

이범진 초대 주 러시아 공사의 부임 시절 모습.

이범진 초대 주 러시아 공사의 부임 시절 모습.

조선시대에는 1년 4회 정기적으로 중국에 외교사절단을 파견하였는데, 이는 중국의 다른 이웃나라에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종의 특권이었다. 조선은 명나라 영락제가 무력으로 황제 자리를 장악하고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길 때 영락제 정권을 처음으로 외교적으로 승인하는 기민함을 보였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도 많은 조선 영웅들의 활약과 더불어 명나라의 군사적인 지원을 끌어낸 외교적인 수완 덕분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외교 역사가 오래되고 외교 경험이 풍부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외국에 주재하는 외교 공관을 설치하고 외교활동을 수행하기로 한 것은 미국과 일본에 상주 공관을 설치하고자 공사를 파견한 1887년이었다. 이 당시 조선은 일본 및 서양 여러 나라와 근대적인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새로운 국제질서에 참여하고 있었다. 세계 질서가 더 이상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질서가 아님을 깨닫고 스스로 부국강병 정책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외교문화를 창달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초대 주미공사에 임명된 박정양의 소회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에 들이닥친 중국의 원세개는 갑신정변으로 일본 세력을 꺾은 뒤 고종 폐위 음모를 기도하며 조선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고, 원세개의 전횡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과 명성왕후는 적극적으로 서양 세력에 접근하였다. 육영공원을 설치하여 헐버트 등 미국인 교관을 끌어들이고, 서양인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에 친히 배재와 이화의 교명을 하사하는 친밀감을 보였다.

‘우리 민족 혈광’ 박정양·이한응 귀감
1887년 11월 12일, 박정양이 주미공사에 임명된 지 석 달이 지나 서울을 떠날 때 그의 마음에는 해외 주재 공관의 외교관으로서 조국을 위해 헌신하려는 의지로 충만해 있었다. 박정양 공사를 수행했던 일행으로는 참찬관 이완용, 서기관 이하영과 이상재, 번역관 이채연, 그리고 안내 책임자로 알렌이 있었다.

박정양 일행은 12월 10일 일본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태평양을 건너는 항해를 떠나 12월 28일 샌프란시스코에 정박하였다. 이듬해 1월 1일 아메리카 대륙에 첫 발을 디딘 그는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1월 9일 워싱턴에 도착, 백악관에서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만난 다음 주미공사관을 개설하고 본격적인 외교활동에 들어갔다. 그는 주미공사로 재직하면서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주요 기관과 대학, 신문사, 병원, 박물관, 영화관 등 온갖 기관과 시설을 방문하였다. 박정양을 보내며 고종이 당부했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활동에 국운이 걸려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박정양의 주미공사 재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조선의 주미 외교활동에 별도 약정 3단을 걸어놓아 족쇄를 만들었던 중국은 주미 조선 공관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좌시하지 않고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하였던 것이다. 1888년 11월 19일 박정양은 워싱턴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재임 기간 미국의 역사, 지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일종의 미국문명사라 칭해도 손색이 없을 저술을 완성하였다. <미속습유>가 그것이다. 그는 이 저술에서 미국에서 국가의 부강과 개인의 자유를 문명사적으로 독해하였다. 유길준의 <서유견문>보다 이른 시기에 완성된 서양 문명 소개서다.

박정양의 행적은 해외 주재 외교 공관에서 활동하는 외교관의 모범적인 자세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사례다. 외교관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익을 위해 그 나라를 연구하고 그 나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 귀중한 자리인 것이다. 또 국가가 위망에 치닫고 있을 때에는 목숨을 걸고 국가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 것이 외교관이다. 1905년 을사늑약을 앞두고 일본이 한국 정부에 국정 개혁을 명분으로 해외 주재 한국 공관의 철수를 강요했을 때 주영 한국 공사 이한응은 죽음으로써 이에 항거하였다. 그의 행적은 박은식의 <한국통사>에서 ‘우리 민족 최근의 혈광(血光)’이라고 찬양을 받았다.

주미 공사 박정양, 주영 공사 이한응, 주러 공사 이범진의 역사적 행적은 오늘날 우리나라 외교관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해외 주재 한국 공관은 ‘상하이 스캔들’의 어두운 상처를 깨끗이 정화하고 100년 전 우리나라의 대선배 외교관들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돌아보기를 바란다.

노관범<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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