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01

혁명의 동력 촛불, 언제까지 들어야 할까

2016.12.06

2016년 11월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목격되는 ‘촛불’은 예전의 모습과는 확실히 다르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 역사적인 한 장면으로 기록되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이미 4·19나 1987년 6월항쟁을 넘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길에 들어서고 있다.

“프린트물 가지고 계시죠? 지도를 보세요. 본 무대를 중심으로 세종대왕상 앞에 하나를 설치하고….” 11월 25일 오전 민주노총 중회의실.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하 비상국민행동) 집회기획팀의 회의가 열리고 있다. 회의는 보통 밤 늦게까지 이어진다. 비상국민행동이 만들어지고 주말 촛불집회를 주도한 지 한 달째. 경찰 폴리스라인과 대치선은 점점 더 청와대에 다가서고 있다. 집회 시작 전까지 행진노선을 두고 금지통보를 반복해온 경찰과 물밑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다.

“주말요? 거의 집에 못 들어갑니다. 12일 행사 때도 연행자가 발생했는데, 그 경우도 끝까지 책임지고 마무리를 해야지요.” 최영준 공동상황실장(48)의 말이다. 보통 공식행사는 빠르면 9시, 늦어도 12시(자정)에 끝나지만 시민자유발언대를 중심으로 행사는 새벽까지 이어진다.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촛불을 들어야 할까. 일단 원론적인 답은 자명해 보인다. “박근혜 정부가 퇴진할 때까지.” 하지만 구체적으로 뜯어보면 간단치 않다. 탄핵이 가결돼 대통령 직무집행정지가 이뤄지면 ‘퇴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  정지윤기자

/ 정지윤기자

기자는 지난 한 달간 매 주말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촛불시위에 참석해 왔다. 광화문에서 목격한 것은 일단 ‘참가자들의 놀라운 인내’였다. 11월 12일 열린 행사에서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애도하는 연사들의 발언에 시민들은 귀를 기울였다. 1년 전, 사건이 일어나고 ‘백남기를 살려내라’고 적힌 쌀부대를 뒤집어쓰고 전농 농민들이 거리선전전을 할 때 봤던 시민 반응과 사뭇 달랐다. “우리가 백남기다”라는 구호를 10대 청소년들부터 아이를 무동 태우고 나온 아버지까지 따라 외쳤다. 11월 12일, 광화문 일대에 결집한 100만 인파에는 분명 전국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올라온 조직대중들이 섞여 있었다. 종로와 광화문 일대에서 ‘투쟁조끼’를 입고 참여한 사람들이다.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무대에 올라선 해고노동자에게 격려 박수를 보내는 시민들이 더 다수였다.” 최 실장의 말이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삼삼오오 모여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차량이 통제된 광화문 일대를 끊임없이 오고갔다. 광화문으로 가는 지하철에서는 불 꺼진 초와 ‘박근혜 퇴진’이 적힌 피켓을 당당히 들고 귀가하는 시민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시내 중심가 교통이 마비되었지만 오지 않는 버스를 불평하는 시민들은 없었다.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박근혜 정부 퇴진 피켓을 들고 구호를 따라 외치는 청소년들도 목격할 수 있었다. 광화문 인근도 마찬가지였다. 2008년에는 연일 계속되는 촛불시위에 장사를 못했다고 소송을 내는 상인도 있었다. 하지만 8년 뒤에는 정반대다. 쌀쌀해진 날씨에 음식점과 커피숍은 줄서서 대기하는 사람들로 장사진이 벌어진다.

2016년 촛불, 확 달라진 광화문 풍경

2008년 촛불시위 때에는 경찰은 물대포를 쐈고 소화기를 터뜨렸다. 이런 풍경은 이번 최순실 게이트 직전까지 이어졌다. 지난 10월, 1주기를 앞두고 백남기투쟁본부 주최의 주말 거리행진 때 비판여론을 의식한 경찰은 물대포를 쏘지는 않았지만 백남기 농민이 쓰러진 종로 뤼미에르를 사이에 두고 경찰과 추모 시민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번에 기자가 목격한 것은 불가사의한 광경이다. 경찰 폴리스라인을 두고 대치가 벌어지고 있지만 사이 좋게 옹기종기 앉아 있을 뿐이다. 대치선에서 ‘분노’나 ‘격앙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집합행동 연구자들에게 시위를 위해 모인 시민들을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는 오랜 난제다. 이 분야 연구의 고전격인 구스타프 르봉은 <군중심리학>에서 집단 속의 개인은 고유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비합리적인 본능적 행동에 사로잡힌다고 주장한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 때 ‘촛불 좀비’라는 말이 촛불시위 반대진영에서 나왔다. 거리에 쏟아져나온 사람들이 ‘광우병 선동에 넘어간 비합리적 군중’이라는 비하다. “그렇지 않다. 지극히 합리적 행위였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반대시위 때 만약 광우병 ‘루머’에 선동되었다면 거기에만 이슈가 맞춰졌을 텐데 실제 거리에 나온 사람들의 주장을 보면 다양한 요구가 기저에 깔려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가 이미 달성했다고 믿었던 ‘공정함’이 깨진 것에 대한 분노의 바탕에는 지극히 합리적인 요구들이 존재한다.” 김동노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의 말이다.

[표지이야기 01]혁명의 동력 촛불, 언제까지 들어야 할까

2008년 촛불시위 때는 정권 퇴진까지 나가지 못했지만, 지금은 대통령 하야와 정권 퇴진까지 공공연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차이점이다. 한국현대사의 주요 사건과 비교해본다면 지금 국면은 4·19나 87년 6월항쟁 이상의 역사성을 가진 사건으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4·19는 4월 18일 고려대 학생시위부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하야를 결정하는 4월 26일까지 채 10일이 안 되었고, 87년 6월항쟁의 경우도 6월 9일부터 이한열 장례식이 이뤄진 7월 9일까지라고 본다면 현 투쟁은 벌써 두 항쟁을 넘어섰다.” 지난 2월 미국에서 <한국의 민주화와 사회운동>이라는 영문 저서를 낸 김선철 에모리대 사회학과 교수의 말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집회 참여 규모도 4·19는 말할 것도 없고, 87년 6월항쟁의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 “1987년 6월 10일 시청 앞에서 열리기로 한 집회는 경찰이 원천봉쇄를 해서 많이 모일 수 없었고,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원치 않은 장기농성을 하게 된다. 명동에 이른바 ‘넥타이부대’로 명명된 시민들이 지지시위를 했지만 아무리 많이 잡아도 10만에서 20만이었다. 6월 26일 열린 ‘최루탄 추방의 날’이 그 중 많은 사람이 거리에 나온 날인데, 이때도 많이 잡아야 50만명 수준이었다.”

6월항쟁 이후 두 달 만에 결정된 ‘87년 체제’

하지만 그는 여전히 현재의 상황이 근본적인 변화로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87년의 경우 엄청나게 큰 항쟁이었지만 노태우의 6·29 선언이 나온 이후에 갈린다. 갑작스레 직선제 개헌국면이 되면서 당시 집권당인 민정당, 그리고 통일민주당(아직 김대중 등 동교동이 평화민주당으로 갈려 나오기 전이었다)이 각 4명씩 참가하는 8인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6주 반에서 7주 만에 새 헌법의 틀거리가 완성되었다. 이 새 헌법은 9월 말쯤 합의가 되고 10월 국민투표로 통과되었다.” 다시 말해 우리가 ‘87년 체제’라고 부르는 6공화국의 시스템은 두 달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새 헌법이 기초되면서 출범한 것이다. 이 새로운 체제의 정초작업에는 당시 ‘사쿠라’라는 소리를 들은 두 야당(민주한국당, 국민당)만 배제된 것이 아니라 87년 6월항쟁의 주축이었던 국민운동본부(국본) 역시 배제되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조직된 시민사회가 취약했던 한국의 결과는 체제를 바꾼 대규모 항쟁이 있었던 외국의 사례, 예컨대 브라질이나 폴란드의 경우와도 다르다. 외국의 경우 노조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조직운동이 저항운동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김동노 연세대 교수는 4·19부터 1987년, 그리고 현재까지 한국의 대규모 저항운동이 모두 탈계급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 외국의 사례와 다르다고 덧붙인다. “근대 이행기나 20세기의 역사적 사건을 보면 모두 계급기반의 운동이다.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 심지어 중국까지 모두 계급이 하나의 행위자로 중심이 된 운동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완전히 탈계급적 운동이다. 외국에서는 신사회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원전 반대나 환경이슈가 벌어지지만 한국의 성격은 또 다르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얼핏 보면 개인들의 원자화된 참여처럼 보이지만 더 들여다보면 소규모의 사회적 연결망이 관찰된다”고 말한다. “사실 이 정도 규모의 조직되지 않은 대중이 자체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이 정도로 사람들이 모이면 상대적으로 소수의 사람들이 도처에서 폭력행위를 하고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게 마련인데, 적어도 11월 19일까지 열린 4차의 집회에선 그런 세력이 발흥하지 못하게끔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자기규제가 있었다.”

신 교수는 현 상황을 “매우 성숙한 민주주의 관점을 가진 시민들과 거기에 너무나 뒤처져 있는 정치 지배권력의 불일치”로 풀이했다. “개인적으로는 혁명적 상황까지 달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이 사건과 관련한 행위자들을 보면 일종의 ‘6자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촛불시민이 한 축이라면 야권 정당, 제도 언론, 비박 검찰, 새누리당 이탈파,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과 소수의 지지자들이 육각형을 이루며 합종연횡하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사이의 역학관계에 따라 결과가 어떻게 달라질지 굉장히 유동적인 상황이라는 것이다. 중심 대립축은 촛불시민과 박근혜 정부다. “기존 지배블록 내에서 거대한 이반이 벌어지고 결집한 측면이 있는 한편, 상대적으로 진보적 지향을 가진 행동을 하는 시민들, 이 양자 사이에서 일시적으로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국면이다. 특히 이 점이 2008년과 다른데, 당시는 이명박 정권 초기였고, 모든 선거에서 야당이 패배했다면 현재는 국회에서 야권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제도권 내에 출구가 있다.” 신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현재의 국면은 일주일에 한 번씩 촛불시민이 결집해 ‘거대한 분노’를 보이면, 제도권에서 이것을 등에 업고 그 다음 일주일 동안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다시 주말 촛불을 통해 증폭되는 ‘긍정적 피드백’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

[표지이야기 01]혁명의 동력 촛불, 언제까지 들어야 할까

기간만 따지고 보면 이미 우리는 1987년을 넘어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미지의 길에 이제 막 들어서고 있다. 송경재 경희대 인류재건연구소 교수는 ‘장수풍뎅이 연구회’ 깃발에서 보듯 ‘유희적 참여’라는 특징을 보이는 것이 2000년대 이전의 사회운동과 질적으로 다른 특징이라고 말했다. “분명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분노하고 있지만 놀라울 정도로 이성적인 동시에 현명한 대응을 하는 것이 이 ‘유희적 참여시민’의 특징이다. 중앙집중적인 기획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종의 아메바 운동처럼 지향이나 방향이 뚜렷하지 않고 분산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미시적으로 보면 정보네트워크로 이어져 있는 ‘스워밍(swarming)’이라는 것이 차이다.” 스워밍은 얼핏 보면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지만 때가 되면 가장 진보된 형태의 조직 형식이다. 평상시에 벌떼나 늑대, 하이에나 같은 무리군집이 아무런 연계없이 산개해 있는 것 같지만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각자의 방식으로 목표 달성에 나서며 임무가 해소되면 즉각 힘을 분산해 반격을 피하는 방식이다. 송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과거의 집회방식을 보면 플래카드나 초는 거의 집회를 주최하는 측에서 준비했지만, 지금은 다 스스로 만들어 온다. 자기의 역할을 집회가 끝나고 난 다음에 광화문광장을 청소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오는 행동 같은 것이 대표적인 스워밍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까지 촛불을 들 것인가’라는 질문은 지속성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지만 얼마만큼의 시민이 거리에 나오면 목표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기도 하다. 이번 국면에서 화제를 모은 것이 이른바 ‘3.5% 법칙’이다. 2012년 미국 덴버대학교 에리카 체노웨스 교수가 펴낸 <시민저항은 어떻게 작동하는가(Why Civil Resistance Works)>에 기반한 주장이다. 체노웨스 교수에 의하면 1900년에서 2006년까지 발생한 시민저항 운동을 분석해본 결과, 한 국가의 인구 3.5%가 집회나 시위를 지속하는 경우 정권이 유지되지 않았고, 특히 비폭력시위가 폭력시위보다 2배 정도 성공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3.5%가 거리에 나가면 성공한다?

그렇다면 이 공식을 적용해 한국 국민의 3.5%, 다시 말해 약 180만명이 지속적으로 거리에 나온다면 박근혜 정권의 퇴진은 가능해지는 걸까. 하지만 관련 전공자들은 이 3.5% 이론에 대해 부정적이다. 신진욱 교수는 “다량의 샘플을 넣어 상당한 신뢰도나 타당성을 가지고 나온 결론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어떤 구체적 상황에서 여전히 그러할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180만명이라는 수치가 ‘나 하나라도 머릿수를 보태고 싶다’는 독려 수단으로 목표치가 될지는 모르지만, 거리에 나선 시민이 180만명이 넘어섰는데도 완강히 버티는 상황이 상당 기간 지속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상황은 급변하고 있다. 어떻게 전망하느냐는 <주간경향>의 질문에 최영준 비상국민행동 상황실장은 “이 국면이 어떻게 결론이 날지는 아직 예상하지 못하지만 이후 광장에서 모이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일상 속으로, 다시 말해 노동단위의 파업과 학생들의 동맹휴업, 그리고 시민행동의 일상적 실천으로 확산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전형적인 운동가적 처방이다. 하지만 답은 다른 데 있는지도 모른다. 계속되는 최 실장의 말이다. “이전과 상당히 다른 점은 과거 한 번도 이런 집회에서 얼굴을 볼 수 없었던 학교 동창, 선후배들이 나왔다는 점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사진 찍고 구호도 외치고…. 동창들을 보면 한 오후 10시 정도까지 있다가 기왕 모인 김에 술 마시러 간다.”

2016년, 대한민국이 걷고 있는 ‘지금까지 걷지 않았던 새로운 길’의 끝은 어디로 나 있을까. 신 교수는 “확실한 것은 제도 내에 동맹자가 있고, 또한 내년 선거를 앞두고 있다는 점이다. 분노가 희망과 결합되었을 때 사람들은 두려움을 떨치고 행동에 나서게 된다”고 말했다. 어쩌면 그게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광화문 100만 촛불’이 열릴 수 있었던 비결이었을지도 모른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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