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노동자의 실망과 자살, 그리고 절박함

2013.01.08

대선이 끝나자마자 노동자 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진보개혁 진영이 대선에 총력을 집중했음에도 박근혜 당선인을 넘지 못했다는 패배감이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된 것이다. 숨진 노동자들이 해고 혹은 휴업 중인 상태였고, 소속 노조는 와해될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노동계의 충격은 더 컸다. 전열을 가다듬어 차기 정부에서의 운동 방향을 논의하기 전에 현 정부에서 마무리되지 않은 해고 및 손해배상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박 당선인이 당선증을 받은 바로 다음날인 12월 21일, 현 정부에서 정리해고 문제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던 사업장인 한진중공업에서 노조 간부 최강서씨(34)가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 그가 남긴 유서엔 그가 소속된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를 상대로 회사측이 낸 손해배상소송액 158억원에 대해 한탄하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또 그는 박 당선인의 당선으로 노조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해결할 길이 막혔다는 절망감을 토로했다. 한진중공업지회는 2011년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의 고공농성과 ‘희망버스’를 바탕으로 회사로부터 정리해고 철회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거액의 손해배상소송과 복직 직후 회사의 강제휴업 조치로 조합원들은 복수노조로 이탈했다. 한상철 한진중공업지회 부지회장은 “정리해고 투쟁으로 이미 많은 조합원들을 복수노조로 보낸 뒤 회사는 노조 사무실마저 빼라고 나와 겨우 20여명만이 200일 동안 천막에서 투쟁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로 일하다 해고된 이운남씨의 사망 소식을 접한 노동자와 시민들이 울산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서 열린 추모집회에서 묵념하고 있다. | 김영민 기자

현대중공업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로 일하다 해고된 이운남씨의 사망 소식을 접한 노동자와 시민들이 울산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서 열린 추모집회에서 묵념하고 있다. | 김영민 기자

대선 결과로 희망 사라진 절망감 토로
최씨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하루 만에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 창립을 위해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다 해고된 이운남씨(42)도 울산 동구의 한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세상을 등졌다. 이씨는 전날 울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가 파업에 돌입하는 과정에서 회사측과의 충돌로 조합원 17명이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씨는 현대중공업 내 투쟁과정에서 두 차례에 걸쳐 심각한 폭행을 당한 이후 심한 스트레스 증세를 보였고, 이날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소식과 최씨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선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날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 활동가인 최경남씨(40)도 서울 도봉구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확인됐다. 12월 25일엔 한국외대 용인캠퍼스 노조 사무실에서 이호일 지부장(47)이 생을 마감했다. 이 지부장은 2006년 파업 가담을 이유로 해고당한 뒤 2009년 복직되기까지 복직 소송 과정에서 진 빚 때문에 괴로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자들이 잇따라 자살한 배경에는 장기간 투쟁 중인 사업장을 포함해 현 정권 동안 더욱 심각해진 노사문제가 다음 정권에서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시각이 깔려 있다. 12월 28일 현재 현대차 비정규직지회는 73일째, 유성기업 아산지회는 69일째, 쌍용자동차 조합원들은 39일째 고공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쌍용차의 경우 2009년 정리해고 사태 이후 해고자와 가족 23명이 자살이나 질병 등의 이유로 세상을 떠나 사회 전반에서 시급하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대선 전인 12월 11일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총괄선대본부장은 대선 직후 국회에서 쌍용차 국정조사 문제를 다루겠다고 공언한 바 있어 야권과 종교계에서도 임시국회에서 연내에 쌍용차 국정조사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상태다.

세 곳의 고공농성장도 한진중 최강서씨를 죽음으로 내몬 손배소송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쌍용차 노조는 300억원이 넘는 손배가압류 조치에 몸살을 앓고 있다. 현대차도 비정규직지회가 2010년 벌인 파업을 이유로 81억원, 올해 벌인 파업을 이유로 35억원 등 총 116억원의 손배소송을 청구했고, 유성기업 역시 40억원대의 손배가압류가 걸려 있다. 문제는 고공농성에 나선 노동자들의 요구가 법과 제도를 통해서 해결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현대차 송전철탑 위에서 농성 중인 최병승씨의 경우 대법원이 현대차의 사내 불법파견을 인정했음에도 현대차가 최씨와 동일한 위치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화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성기업이 노조 파업을 멈출 목적으로 한 직장폐쇄와 용역을 통한 폭력진압이 위법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홍종인 지회장은 “사측은 아직도 자신들의 잘못과 불법행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고 부당노동행위는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며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민주노총은 정리해고·비정규직·노조탄압을 시급히 해결해야 할 3대 현안으로 보고 추모정국을 투쟁국면으로 이끌어간다는 방침을 세웠다. 고공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세 곳의 농성장을 비롯해 산하 30개 투쟁사업장 문제 해결을 인수위 활동이 끝나기 전까지 마무리짓겠다는 계획이다. 당초 1월에 계획된 금속노조의 총파업을 민주노총 전체 총파업으로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노동자들의 잇따른 자살 이후 박 당선인과 새누리당이 노동계에 대해 이렇다 할 입장 표명을 하고 있지 않은 점은 강경투쟁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배경 중 하나다. 민주노총의 한 관계자는 “대선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하지 않았지만 득표 결과만 봐도 조합원 대부분이 문재인 전 후보에게 투표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노동운동 진영의 실망감은 크다”면서 “박 당선인은 대선 전에도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한 면담도 거부했고 노동현안 해결 요구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내놓았기 때문에 대결국면은 더 심각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전체 총파업 확대 검토
한편 민주노총 등 노동운동 세력과 종교계 및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노동현안 비상시국회의(시국회의)가 구성됐다. 12월 26일 시국회의의 첫 번째 일정으로 열린 서울 중구 대한문 농성장 앞 추모문화제에는 추운 날씨에도 약 500명이 참석했다. 시국회의는 추모문화제와 함께 고공농성이 벌어지고 있는 울산 현대차 공장과 부산 한진중공업을 버스로 방문하는 연대행사도 기획하고 있다. 추모문화제를 앞두고 열린 회의에선 노동계만이 아니라 정치권까지를 아우르는 진보세력이 결집하기 위한 연대체를 구성하는 방안도 검토됐다. 시국회의는 우선 당면 현안인 추모문화제 개최와 장기 투쟁사업장에 집중하기로 결정했지만, 향후 진행될 회의에서 반박근혜 연대체로 결집의 폭을 확대할 경우 박 당선인은 취임 전부터 반대세력과의 갈등을 안고 정권을 출범해야 하는 부담을 안을 수도 있다.

현대차 울산공장 앞 송전탑에 올라 고공농성 중인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천의봉씨(왼쪽)와 최병승씨의 모습. | 김영민 기자

현대차 울산공장 앞 송전탑에 올라 고공농성 중인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천의봉씨(왼쪽)와 최병승씨의 모습. | 김영민 기자

노동현안은 정부 해결의지 중요
이번 대선에서 양대 노총 중 하나인 한국노총 역시 지지후보를 정하지 않았다. 2007년 17대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고, 2012년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과 선거협약을 맺은 것과는 다른 결정이었다. 총선 과정에서 당시 민주당 지도부와의 갈등이 전면에 드러났던 문제와 함께 이후 시행된 위원장 선거에서 보수성향으로 평가되는 문진국 위원장을 선출한 점이 한국노총의 대선 참여를 주저하게 만든 요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총연맹 차원에서 지지후보를 정하지 않은 것과는 달리 부산·대구·경남·경북·전남 등 지역본부에서는 박근혜 당시 후보에 대한 지지의사를 밝혔다. 개별적이지만 중앙의 한국노총 출신 인사들이 문재인 전 후보 측 노동위원회에 합류한 예가 많았던 것과 비교된다.

대선 결과가 나온 현재도 한국노총은 민주노총과 달리 여야 모두와 대화 테이블을 열어두고 협상력을 높인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당면한 노동현안인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선 노사 차원의 해결보다는 정권의 해결의지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국노총의 정문주 정책본부장은 “한국노총은 기본적으로 정권의 성격에 관계없이 정권에 대한 견제를 바탕으로 국정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고자 한다”면서도 “새 정부가 들어서는 2013년에는 경기불황을 우려하는 시각이 많아 박 당선인이 제시한 경제민주화를 통한 사회안전망 확충 쪽으로 대정부 전략을 세우고 있지만, 박 당선인 정권의 보수성이 복지정책 시행 지연 등으로 나타날 경우 노사정위원회 탈퇴 등 다양한 방식으로 압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노총도 이어진 노동자들의 자살과 관련, 성명을 내고 이명박 정부에서 시작된 친기업 정책이 노조와 조합원을 위기로 내몰았다고 비판했다. 정 본부장은 “박 당선인은 당선 이후 경제단체와의 만남은 주저없이 나가면서 노동자가 죽어가는 이 시점에 노동자·노동단체와 만나려 하지 않는 모습이 비판을 부른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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