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굳어지는 양당제, 진보정당 설자리 잃어

백철 기자
2013.01.08

18대 대통령 선거는 사실상 제3후보가 부재한 선거였다. 새누리당과 민주당 양대 정당의 득표율 합계는 99.6%에 달해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의당은 ‘진보적 정권교체’를 내걸고 대선 완주를 포기했으며, 진보세력의 독자노선을 추구해온 진보신당은 제반 사정의 미비로 아예 후보를 내지 못했다. 한국 정치가 2개의 거대정당만 남는 양당제로 굳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양당제가 다당제 정치에 비해 여러 가지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양당제 국가의 투표율이 다당제 국가의 투표율보다 낮은 경향이 있고, 이로 인해 집권세력의 민주적 정당성이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박 대표는 ‘정치적 양극화’ 문제를 제기했다. 정치적 양극화란 양대 정당이 이념적·정책적 차이보다 정서적 거리감을 극한으로 늘리는 대결구도를 말한다. 그는 “거대 양당이 가치를 둘러싼 경쟁이 아니라 상대를 야유하는 방식의 경쟁을 지속하면 시민들이 정치 자체에 비판적이 된다”고 지적했다.

또한 양당제는 ‘진흙탕 선거’를 유발한다. 미국의 네거티브 선거전을 연구해온 이준구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이미 상당한 고정 지지층을 확보한 양대 정당은 네거티브 선거전의 유혹에 더 쉽게 빠져들 수 있다. 단단한 상대의 지지층을 뺏어오기보다 상대방의 ‘약한 지지층’(중도층)을 투표장에서 이탈시키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12월 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진보정의당 유시민 전 의원(왼쪽)이 문재인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와 인사하고 있다. | 김영민 기자

12월 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진보정의당 유시민 전 의원(왼쪽)이 문재인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와 인사하고 있다. | 김영민 기자

미국의 제3정당 운동도 수차례 실패
물론 전문가들은 한국이 ‘안정적 양당제’에 진입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미국 역시 안정적 양당제를 확립한 것은 수십년 전의 일이다. 미국에서도 양당제에 도전하는 제3정당은 꾸준히 출현했지만 개혁주의 정당(민주당)에 대한 비판적인 지지를 반복한 끝에 사멸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제3정당으로는 인민당과 사회당이 있었다.

1892년 토지개혁과 은본위제를 주장하며 나타난 인민당은 같은 해 치러진 대선에서 8.5%를 득표했다. 당시 1·2위 후보의 격차는 3.0%에 불과했다. 이후 인민당은 22명의 하원의원과 5명의 상원의원을 보유한 정당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1896년 대선에서 인민당은 독자 후보를 내지 않고 민주당의 윌리엄 브라이언 후보를 지지했다. 인민당의 주장과 거리가 먼 공화당을 물리쳐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브라이언이 대선에서 패배한 뒤 인민당의 주요 세력은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흩어졌다.

1910년대 들어 전 세계적으로 노동운동이 분출하자 좌파정당인 사회당도 힘을 받기 시작했다. 사회당은 1912년 대선에서 6%가 넘는 득표율을 기록했고, 2명의 하원의원과 100명 이상의 지방단체장(시장)을 배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집권 민주당이 8시간 노동제, 누진세를 도입하는 등 좌클릭 행보를 보인 데다, 미국의 1차대전 참전 여부를 놓고 사회당 내부가 분열하면서 사회당은 퇴보했다.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된 이후 대선에서 민주당은 12년 만에 압도적 지지율로 정권교체에 성공하지만, 한편으로는 노동자·농민에게 기반을 둔 제3정당 논의가 다시 시작됐다. 1937년 갤럽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21%는 민주당, 공화당을 대체할 새로운 정당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현직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노동권 보장, 노동시간 제한 등 개혁조치를 단행했고, 이에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비판적 지지’로 화답하면서 의미있는 제3정당은 출현하지 못했다.

미국의 제3정당 운동이 실패해온 과정은 한국의 진보·좌파를 자처하는 세력에도 시사점을 던져준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제3정당이 독자적인 노선을 지키지 않고 개혁주의 정당에 수렴되는 경향을 보이거나, 개혁주의 정당이 진보세력의 주장을 전폭적으로 수용할 경우 제3정당 운동은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의 진보정당 중 독자적인 노선을 끝까지 주장한 것은 진보신당이었다. 진보신당 정책위의장을 지낸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은 “현재로서는 민주당으로 수렴되는 힘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으며, 진보세력의 일부가 그쪽으로 이끌릴 가능성도 있다”면서도 현재의 정치구도는 “불안정한 양당제”라고 진단했다. 장 위원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세력의 구심력은 보수세력보다 약하다. 그래서 안철수라는 제3세력이 바람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상훈 대표는 한국의 불안정한 양당제에서 제3세력이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는 장 위원과 생각을 같이하지만, 그것이 꼭 이념적 진보세력은 아닐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박 대표는 “진보정당은 이념적으로 왼쪽을 추구하는데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진보화하면서 진보정당이 움직일 공간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진보세력 내부에서 분열과 갈등을 반복하면서 실망을 안겼다”며 “안철수는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이념적 중간에 있다기보다는 두 당의 정서적 거리감의 중간에 위치했기 때문에 파괴력을 가진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진보세력이 민주당과 협력적 노선을 걸었던 것이 옳은 선택이 아니라고 봤다. “올해 선거에서 진보세력은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정책을 내세우기보다 민주당과 함께 새누리당을 악마화했다. 양 진영간 내용적 차이보다 정서적 거리감이 부각될수록 이념적 진보세력은 피해를 보고, 안철수처럼 정치투쟁과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이득을 본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민주당과 연대했던 진보세력의 일부는 민주당에 흡수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이 교수는 “이후 정계개편 과정에서 진보세력 일부가 민주당의 왼쪽을 담당하는 식으로 수렴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에 수렴되지 않는 진보세력에 대해 이 교수는 “진보정당운동의 조건이 현실적으로 없는 상황이다. 정당정치 바깥에서 진보의 가치와 토대를 가다듬는 활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야 진보화하면서 진보 공간 줄어
장석준 위원은 제도개혁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100% 지역구 소선거구제인 국회의원 선거제도, 선거인단을 통한 대통령 간선제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이 결국 양당제로 흘러간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장 위원은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 등 제도 자체가 바뀌어야 새로운 세력이 ‘새 정치’를 할 수 있다. 제도를 그대로 놔둔 채 새로운 인물과 세력이 필요하다는 말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장 위원은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얻은 것 역시 정당투표가 신설된 것에 기인한 바가 컸다고 지적했다. 당시 민노당은 지역구에서 3석을 얻는 데 그쳤지만, 비례대표 의석은 7석을 획득했다.

박상훈 대표는 “민주당의 조직적 능력과 리더십이 새누리당에 비해 약한 상황이기 때문에 진보정당이 민주당을 대체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면서도, 반대로 민주당이 혁신할 가능성도 있다고 봤다. “1930년대 미국 민주당이 대공황 시기에 진보적 의제를 수용하면서 좌파가 숨쉴 공간이 없어졌다. 한국 민주당이 당시 미국 민주당처럼 리더십을 보이고 노동자와 중하층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면 진보세력을 포괄할 가능성도 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매체별 인기뉴스]

    • 경향신문
    • 스포츠경향
    • 주간경향
    • 레이디경향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