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김빠진 ‘투자자 - 국가소송제’ 재협상

비준동의안 날치기 처리로 미국측 입장 변화이유 사라져

지난 11월 22일 국회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이 날치기 처리됐다. 한·미 양국은 내년 1월 1일 발효를 목표로 협정 이행을 위한 마지막 준비 작업에 돌입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슈가 있다. 바로 투자자-국가소송제(ISD)다.

정부는 여야 합의로 비준동의안이 처리되진 않았지만 미 측과 투자자-국가소송제 재협상을 진행하겠다는 입장이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 11월 25일 KBS 라디오에 출연, “이명박 대통령이 한·미 FTA가 발효되면 3개월 안에 투자자-국가소송제 재협상을 하겠다고 말씀했기 때문에 성실히 재협상을 하겠다”고 말했다.

11월 22일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와 황우여 원내대표 등이 국회 본회의에서 한·미 FTA 비준안에 투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11월 22일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와 황우여 원내대표 등이 국회 본회의에서 한·미 FTA 비준안에 투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정부가 재협상에 대한 의지를 밝히고 있기 때문에 결국 남은 것은 재협상의 내용이다. 이 대통령이 투자자-국가소송제 재협상 의사를 밝히긴 했지만 재협상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다. 최석영 외교통상부 FTA 교섭대표는 “재협상의 구체적인 시기와 내용을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투자자-국가소송제를 폐기하자는 요구에서부터 그대로 두자는 요구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해 전체적인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재협상 내용 구제적 언급 없어
외교통상부는 투자자-국가소송제 재협상을 서비스·투자위원회 혹은 공동위원회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한·미 양국이 이 기구를 설치하기 위해 교환한 서한을 보면 서비스·투자위는 협정문 22.2조(공동위원회)의 적용을 받는다. 이 기구에서 “협정의 개정을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미 행정부가 “한·미 FTA가 발효되면 한국 측이 제기하는 이슈에 대해 협의(Consult)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힌 배경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서비스·투자위는 기본적으로 협정의 이행을 감독하기 위한 기구이다. 외교통상부가 10월 31일 배포한 ‘중소기업, 서비스·투자 분야 서한교환 보고’를 보면, 서비스·투자위는 투자자-국가소송제도 운영의 투명성 제고 방안, 전문직 비자쿼터 확보 등을 다룰 수 있다고 예시돼 있다.

더군다나 한국 정부 역시 투자자-국가소송제의 폐기까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김 본부장은 “미국 안에서 어떠한 문제를 갖고 (한국 기업이) 미국 정부를 대상으로 미국 법원에서 다툰다는 게 쉽지 않다”며 “한국이 투자자-국가소송제를 유지해야 될 충분한 이유는 있다”고 말했다. 또 “이것이 이제 운영되는 과정에서 너무 남용이 되거나 또는 발동이 너무 쉽게 되거나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개선책을 논의해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11월 22일 국회 본회의에서 한·미 FTA 비준안이 통과되자 야당의원들이 발언대에 앉아 허탈해 하고 있다. / 연합뉴스

11월 22일 국회 본회의에서 한·미 FTA 비준안이 통과되자 야당의원들이 발언대에 앉아 허탈해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현실적인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지만 만약 투자자-국가소송제의 폐기가 재협상 테이블에 올라 합의가 된다 해도 미국 의회가 폐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개정 협상은 무산된다. 통상법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는 “한·미 FTA 발효 뒤 투자자-국가소송제를 폐기하는 쪽으로 협정을 개정하려면 미국 의회의 입법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 행정부도 투자자-국가소송제 조항을 수정하는 데 이미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한국 정부는 한·미 FTA 비준 전에 국내에서 문제제기가 지속되자 투자 이슈 등에 대해 미국 측과 협의를 진행했다. 하지만 미국 측은 협정 내용의 수정을 수반하는 논의에 난색을 표명했다. 결국 한국 정부는 수정에 대한 협의가 성사되지 않자 중소기업 작업반과 서비스·투자위라는 기구를 마련한 것이다.

미국, ISD 조항 수정에 부정적
종합해보면 현재로선 투자자-국가소송제의 폐기는 사실상 물건너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청와대는 여야가 폐기에 대한 총의를 모아오면 달라질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정부, 한나라당이 투자자-국가소송제를 글로벌 스탠더드로 여기고 있는 상황이다. 비준동의안이 처리된 만큼 정부와 한나라당이 투자자-국가소송제에 대한 입장을 근본적으로 수정할 이유가 사실상 사라진 셈이다.

일각에서는 어차피 투자자-국가소송제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면 괜히 재협상을 벌였다가 혹을 붙여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최 대표는 11월 24일 MBN에 출연해 “(한국이) 어떤 요청을 한다고 하더라도 미국은 이에 대한 반대급부를 요청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밝혔다. 한국이 협정 발효 뒤 90일 이내에 공동위원회 혹은 서비스·투자위원회라는 기구에서 투자자-국가소송제 재협상을 요청할 경우 미국이 다른 카드를 꺼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박상표 국민건강을위한수의사연대 정책국장 등은 미국이 내세울 카드가 쇠고기 추가 개방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미국이 투자자-국가소송제와 쇠고기 완전 개방을 연계하는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 등을 중심으로 날치기 통과 이후 한·미 FTA 무효화 투쟁도 벌어지고 있다. 미디어법이 날치기 통과됐을 때 민주당이 절차적 하자를 문제삼으며 무효를 위한 법적 대응을 한 것과 유사한 흐름이다.

괜한 재협상은 ‘혹’ 붙여올수도
민주당 손학규 대표(64)는 지난 11월 23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에서 “한·미 FTA 비준안 날치기의 전면 무효를 선언하고 무효화 투쟁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손 대표는 이어 “무효화 투쟁으로 한·미 FTA 재협상을 관철하겠다”면서 “지금 되지 않는다면 총선에서 우리가 국회 다수 의석을 얻어, 내년 정권교체를 통해 재협상을 관철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표 원내대표(64)도 “한·미 FTA는 헌법 119조의 경제민주화와 123조의 중소기업·농어민 보호를 위한 국가의 책무를 근본적으로 침해할 우려가 너무나 크고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한·미 FTA 자체를 폐기하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한·미 FTA의 폐기는 협정문상 가능하다. 협정문 24.5조는 “이 협정은 어느 한쪽 당사국이 다른 쪽 당사국에 이 협정의 종료를 희망함을 서면으로 통보한 날부터 180일 후에 종료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송기호 변호사는 “해석론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이 조항은 국회의 동의 없이 한국 대통령이 미국 측에 폐기를 통보하면 협정이 종료되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결심하면 폐기가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한·미 FTA 폐기는) 현실적이지 않은 탁상공론에 가깝다”고 말했다.

다음 차례는 ‘미국산 쇠고기 추가 개방’?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된 뒤 한국 쇠고기 시장의 수입위생조건에 관한 협의를 요청하겠다.’ 론 커크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지난 5월 4일 미 상원 재무위원회 맥스 보커스 위원장에게 보낸 서한의 일부다.

“쇠고기 추가 개방 없인 FTA 통과도 없다”던 보커스 위원장은 USTR로부터 쇠고기 재협상과 미 육류수출협회에 대한 지원금(향후 5년간 1000만 달러) 등을 약속받고 한·미 FTA 찬성으로 입장을 바꿨다. 보커스 위원장은 미국의 대표적인 목축업 중심지인 몬태나주 출신 의원이다. 소가 사람보다 더 많은 이 ‘지역구’를 대변하기 때문에 30개월령 이상의 쇠고기도 한국이 전면 수입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지난 11월 22일 국회에서 한·미 FTA가 통과됨에 따라 다음 수순은 ‘미국산 쇠고기 추가 개방’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미국은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까지 수입을 확대하도록 하겠다는 방침을 거듭 밝혀 왔다.

USTR가 지난 5월 보커스 위원장에게 약속한 내용은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니다. 2008년 한·미 양국이 합의한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에 따르면 ‘한국 소비자들의 신뢰가 회복되면 전면 수입개방 문제를 논의’하기로 하는 내용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커크 대표가 보커스 위원장에게 약속하지 않았더라도 미 측은 이 수입위생조건에 따라 언제든지 협의 자체는 요구할 수 있다.

최석영 외교통상부 FTA 교섭대표는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론 커크 대표가 보낸 서한 내용은 미국이 요청을 하겠다는 것이지 우리가 동의했다는 것은 아니다”라며 “미 정부의 협의 요청에는 응하겠지만 이것이 곧 시장 개방을 뜻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FTA와 쇠고기는 별개의 문제이고, 한국 소비자들의 신뢰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는 한국 정부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쇠고기시장을 추가로 열기 위한 미국의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론 커크 대표는 지난해 8월 상원 농림식량위원회 청문회에서 “국제수역사무국(OIE)의 검역 기준에 부합하는 쇠고기가 제한 없이 수출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미국 의회 전문지 ‘더 힐(The hill)’은 10월 14일 “보커스 위원장이 ‘쇠고기 추가 개방 재논의 시기는 6개월 안이 될 것으로 자신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한국이 사실상 동의했으며 론 커크 대표의 권한은 매우 세다”며 “이러한 조처(쇠고기 추가 협상)가 없었다면 나는 한·미 FTA 비준안에 서명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 측은 한국 내 미국산 쇠고기 소비량이 급증했다는 것을 근거로 들어 “소비자 신뢰가 회복됐다”고 주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축산협회는 지난해 한국 내 미국산 쇠고기 판매액이 지난해에 비해 140% 급증했다고 밝혔다.

농림수산식품부 관계자는 “소비자 신뢰 회복의 기준을 정의한 바 없고, 미국 측이 우리를 설득해야 하는 입장에서 칼자루는 우리가 쥐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지환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bald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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