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월드컵이 ‘남아공 과거사’ 치유할까

글·사진(요하네스버그·케이프타운)|국제부 이청솔 기자
2010.05.25

오랜 인종차별정책으로 범죄 증가·경제불안 등 사회모순 만연

지난 4월 15일 오전 남아프리카공화국 경제 중심지 요하네스버그에서 만난 대니 조던 남아공 월드컵 조직위원장은 “서구 언론들은 우리가 경기장도 다 짓지 못했다고 했지만 경기장은 이미 완성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같은 날 오후에 찾은 사커시티 경기장 외부에서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지만 공사장 관계자들은 “맨홀이나 보도블록 등 일부 외부 시설 공사가 남았을 뿐 경기장 안은 이미 완벽하다”고 말했다. 조던 위원장은 남아공 월드컵에 대한 우려를 “또 다른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로 규정했다. 아프리카 첫 월드컵에 대한 일방적인 폄훼라는 것이다.

‘외부인은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알려질 만큼 치안이 불안한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의 외곽 알렉산드리아 슬럼 지구.

‘외부인은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알려질 만큼 치안이 불안한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의 외곽 알렉산드리아 슬럼 지구.

그러나 1994년 ‘백인 정권’이 무너진 후 들어선 이른바 ‘흑인 정권’이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는 끊이지 않고 있다. 현 정부는 도덕성 측면에서 우위에 섰지만 통치력은 미흡했다는 것이다. 남아공 정부는 공무원을 선발할 때 인종 간 인구 비율을 고려하고 있다. 아파르트헤이트를 거치면서 교육·복지 등 모든 권리를 누리지 못한 흑인들이 정부에 대거 진출하게 되자 치안이 나빠지고 전력 공급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등 각종 부작용이 나타났다. 오랜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한 사회 모순이 현재의 민주정부 아래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는 1948년 백인만의 총선에서 국민당이 승리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아파르트헤이트 정부를 이끌던 국민당은 네덜란드계 후손 아프리카너(보어인)들이 지지 기반이었다. 또 다른 백인 집단인 영국계는 역사적으로 늘 보어인들과 갈등을 빚어 왔다. 남아공에 먼저 발을 디딘 것은 네덜란드인이었다. 이들은 17세기 중반 케이프타운에 보급기지를 건설하며 남아공에 진출한 반면에 영국인들은 19세기 초에야 남아공 땅을 밟았다.

흑인정권 이후 치안 급속히 나빠져
그러나 영국계가 재빨리 지배권을 확립하자 네덜란드계 후손들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내륙으로 이주했다. 이들의 이동 경로가 때마침 토착 흑인 부족인 반투족의 행로와 겹치면서 1838년 수많은 전투와 유혈 학살극이 벌어졌다. 

당시 벌어진 일은 보어인들에게 집단적 기억으로 남아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단초가 됐다. 보어인들은 집권 이후인 1949년 백인과 유색인의 결혼을 금지했고, 1953년에는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이 극장·식당·병원 등 공공시설을 함께 사용하는 것을 막는 등 악명 높은 반인권 ‘범죄’를 저질렀다.

지난 4월 15일에 찾은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대학 캠퍼스에서 흑인과 백인 학생들이 따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지난 4월 15일에 찾은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대학 캠퍼스에서 흑인과 백인 학생들이 따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현재의 남아공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 가운데 상당수는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유산이다. 1994년 이후 남아공 사회의 치안은 급속히 나빠졌다. 폭압적 통치를 일삼던 백인 정권이 물러나면서 나타난 문제다. 요하네스버그가 속한 하우텡 주(Gauten province)의 줄임말인 GP는 ‘갱들의 천국(Gang’s paradise)’을 의미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보통 ‘무능한 흑인 정부’가 그 원인으로 지목된다. 실제 1994년 최초의 민주선거 이후 탄생한 정부들이 예전 백인정권만큼의 통치력을 발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흑인들은 오랫동안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육 과정에서 백인과 유색인은 철저히 분리돼 있었고, 흑인의 경우 필수교육 과정에서 수학이 빠져 있을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범죄율 급등이 사회가 정상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분석도 있다. 흑인 거주 지역인 타운십에 주로 존재하던 범죄가 사회 전반으로 확대됐다는 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타운십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백인 정권 관심 밖의 일이었고, 타운십 대부분이 슬럼화하면서 범죄가 만연했다. 흑인들의 생활권이 넓어지고 인종 간 접촉이 확대되면서 치안 문제가 드디어 백인들에게도 관심사가 된 것이다. 케이프타운 대학 사회학과 멜리사 스테인 교수는 이를 ‘범죄의 민주화’라고 지칭했다.

흑인 실업률 40%, 극심한 빈부 격차
범죄율 급등의 뒤에 숨어 있는 사회문제는 경제적 불안이다. 극심한 빈부 격차와 고용 불안으로 잠재적 범죄자가 양산되고 있다. 남아공은 중국, 인도, 브라질과 함께 거대 개발도상국의 대표주자로 불릴 정도로 1994년 이후 성장을 거듭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을 압박하기 위해 가해진 서방의 경제 제재가 사라지면서 잠재력이 발휘된 것이다. 또 고용 시스템에서 배제돼 있던 유색인이 새로운 노동력으로 편입된 것도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1994년에 20%던 실업률은 현재 20% 후반대를 기록하고 있다. 2003년에는 31%까지 치솟기도 했다. 특히 백인 실업률은 4%에 머무는 반면에 흑인은 약 40%가 실업자다.

고질적인 남아공의 고실업은 아파르트헤이트 말기 서방의 경제 제재가 남긴 유산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남아공 정부는 인플레이션 관리에 치중하는 등 방어적인 경제 정책으로 일자리 창출에 실패했다. 인종 간 경제력 격차 해소를 위해 흑인경제력강화정책(BEE)을 시행했지만 이도 소수의 흑인 부자만 배부르게 해 줬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BEE로 인한 두뇌 유출도 경제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정부에서 공무원을 선발할 때 인구 비례에 따라 뽑는 등 아파르트헤이트 시절과는 전혀 다른 선발 기준이 적용되자 ‘무능한 흑인들에게 일자리를 뺏기고 있다’고 느끼는 백인 고급 두뇌들이 고국을 등지는 것이다. 요하네스버그 대학에서 만난 보어인인 에밀(금융관리학과 3학년)은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면서 “BEE는 분명한 역차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출발선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기준에서 경쟁하게 하는 것은 무리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남아공은 흑인, 백인, 아시아계, 혼혈 등 다양한 인종이 함께 살고 있다고 해서 ‘무지개 나라’라고 불린다. 그러나 무지개의 여러 색깔이 겉돌지 않고 함께 어우러지게 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세계 과거사 청산의 모델이 된 진실화해위원회(TRC)를 만들어 무차별적 보복 없이 아파르트헤이트의 아픈 기억을 밝히고 화해의 장을 마련한 것은 그 노력의 하나다.

긍정적인 것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기억이 적은 남아공 젊은이들의 생각이다. 요하네스버그 대학에서 만난 학생들은 다른 인종의 친구들과 어울려 생활하는 것이 어색하다고 했다. 인종에 따라 문화가 다르고 가정교육의 영향이 커 관심사에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이들은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 당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우리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면서 “기회만 된다면 다른 인종 친구들을 더 사귀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백인 포도농장주 에바(72)는 “과거의 잘못은 우리 세대의 일”이라면서 “젊은이들에게 크게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요하네스버그·케이프타운)|국제부 이청솔 기자 taiy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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