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나

2010.01.05


[커버스토리]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나

<Weekly경향>은 신년호부터 2010년 연중기획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를 시작합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와 박태균 서울대 교수가 역사적 사건의 현장을 방문해 탄탄한 학술적 배경과 현장에서 길어낸 상상력을 결합한 글들을 번갈아가며 매주 선보일 예정입니다. 두 사람은 각기 사회학자와 역사학자의 시선으로 우리 근현대사 100년의 좌표를 설정한 역사적 사건들의 의미를 진지하고도 날카로운 필치로 조명할 것입니다. 총 30여 회 분량으로 민족, 평화, 민주주의, 노동의 미래를 역사적 사건을 통해 탐색할 이 시리즈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합니다. <편집자주>

2010년을 맞이하며 새삼 역사는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2010년은 여러 의미에서 뜻 깊은 해다. 경술국치(1910) 100주년이자 한국전쟁(1950) 60주년, 4월 혁명(1960) 50주년, 전태일 분신(1970) 40주년, 광주민주화운동(1980) 30주년이 되기 때문이다.

이들 역사적 사건은 모두 지난 100년 동안 우리 역사를 이끌어 온 문제적 사건이다. 경술국치가 지난 20세기 전반에 식민지 시대를 연 비극적 사건이었다면 한국전쟁 역시 20세기 후반에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지은 비극적 사건이었다. 4월 혁명은 한국 민주주의의 출발을 알리는 사회운동이었으며, 광주민주화운동은 1987년 민주화 시대를 연 사회운동이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1970년에 있은 전태일 분신은 산업화의 그늘을 보여 준 일대 사건이었다.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마라’를 외치면서 자신의 몸을 불사른 전태일은 고도성장의 진정한 주역이었으되 그 성장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자를 대표하는 존재였다. 2010년은 이렇듯 민족과 산업화, 민주화와 평화에 대한 열망이 한 순환을 이루는 교차점이라 할 수 있다.

경술국치 100주년과 한국전쟁 60주년
돌아보면 20세기 우리의 현대사는 이 사건에 담긴 상징의 역사이기도 하다.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거대한 물결 속에 뒤늦게 근대(modernity)를 이루고자 했지만 우리의 구조적 조건과 주체적 역량은 모두 취약했다. 그 결과가 바로 1910년 경술국치였다.

나라를 상실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새도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나라는 이미 사라졌다”고 망국의 슬픔을 탄식한 매천 황현 선생의 자결은 경술국치가 지니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것은 자생적 근대의 실패이며, 그 근대 내에서 배태해야 할 가치와 제도의 좌절을 의미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열린 민주화의 시대가 23년이 지났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서 민족, 평화, 민주, 노동의 미래는 더없이 불투명하다. <경향신문>

1987년 6월 항쟁으로 열린 민주화의 시대가 23년이 지났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서 민족, 평화, 민주, 노동의 미래는 더없이 불투명하다. <경향신문>

결코 짧지 않은 식민지 시대를 지나 기회는 다시 주어졌다. 1945년 일제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었다. 해방은 말 그대로 빛을 다시 찾은 광복(光復)이었다. 그러나 광복의 환희를 느끼던 당시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는 냉전시대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우리처럼 미군정이 실시됐고, 중국에서는 내전이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한반도에는 분단의 그림자가 짙어져 가고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당시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에 우리가 피동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좌·우 합작과 남북협상이 추진됐지만 우리의 주체적 역량은 냉전의 시작이라는 객관적 상황에 압도됐다.

이런 구조적 조건 아래에서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수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고, 전쟁의 생생한 체험은 의식과 무의식에 깊은 상흔을 남겨 놓았다. 분단은 더욱 고착될 수밖에 없었으며, 동북아는 냉전의 진열장이 됐다.

무릇 모든 일에는 첫 단추를 꿰는 게 중요한 법이다. 그러나 광복 이후 우리의 ‘나라 만들기’는 처음부터 버거운 상황 아래 놓여 있었다. 냉전분단체제라는 구조적 조건 아래 권위주의 정권의 통치는 강화됐으며, 모더니티의 기획은 다시 지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험난한 ‘나라 세우기’의 과정이었다.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
‘나라 세우기’에 부여된 두 개 과제는 다름 아닌 산업화와 민주화였다. 먼저 4월 혁명이 일어났다. 민주주의의 가치가 자유와 평등에 집약돼 있다면 우리 현대사에서 근대 민주주의의 기원은 19세기 후반 동학농민혁명과 독립협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960년 4월 혁명을 통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다시 한 번 분출했다. 어떻게 평가하든 4월 혁명은 광복 이후 한국 민주주의 운동과 제도화의 원점을 이뤘으며, 경로의존성의 출발점을 제공했다.

4월 혁명의 빛과 그늘 속에서 추격산업화가 시작됐다. 세계시간 속에 뒤처진 만큼 추격산업화는 경제 발전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전략으로 나타났다. 수출은 가파르게 증가하고, 성장은 빠르게 이뤄졌다. 그러나 추격산업화의 이면에는 짙은 그늘이 형성돼 가고 있었다. 1970년 11월 전태일의 분신은 바로 이 그늘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광복 이후 한국 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위해 쉼없이 달려왔지만 심화되는 사회 양극화는 우리 사회의 황량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사진은 2009년 1월 용산참사가 발생한 남일당 건물. <김영민 기자>

광복 이후 한국 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위해 쉼없이 달려왔지만 심화되는 사회 양극화는 우리 사회의 황량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사진은 2009년 1월 용산참사가 발생한 남일당 건물. <김영민 기자>

산업화의 진정한 주체는 정부도, 기업도 아니라 산업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던 노동자였다. 추격산업화가 압축적이던 만큼 노동자 계급 형성도 압축적으로 진행됐다. 특히 육체노동자 계급의 임금과 생활 조건은 열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기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민주주의 아래 평등한 존재로서의 당연하고도 당당한 요구가 전태일의 희생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1970년대 권위주의의 통치 아래에서 숨죽이고 있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1980년 5월 다시 분출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신군부가 주도한 쿠데타에 맞선 광주 민주화운동이었다. 광주 민주화운동은 비록 무자비하게 탄압됐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사회운동을 다시 한 번 점화시켰으며, 짧은 시간의 시민민주주의의 실험은 민주화운동의 정신적·문화적 자산을 이뤘다. 광주 민주화운동의 가치와 열망은 결국 1987년 6월 항쟁과 민주화 시대의 개막을 가져 왔다.

현대사의 빛과 그늘
이 역동의 현대사를 돌아보는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은 복합적이다. 한편으로는 광복과 민주주의를 향한 우리 선조들의 고투(苦鬪)가 자랑스럽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놓인 현재적 상황을 지켜보면 적잖이 착잡하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열린 민주화 시대가 23년이 지났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서 민족, 평화, 민주, 노동의 미래는 더없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위기에 직면한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물론 교착 상태에 놓인 남북한 평화공존, 회귀하는 권위주의 통치, 심화되는 사회 양극화가 바로 우리 사회의 황량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나라 세우기’를 위한 민족의 자립, 인간적인 산업화와 질 높은 민주화를 위해 쉼 없이 달려 왔지만 국민 다수의 삶에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불안이 갈수록 커져 온 것이 우리 사회의 현주소다.

당장 현실을 둘러보라. 갈수록 심화되는 사회 양극화도 큰 문제지만 높은 사교육비를 지불하고 대학에 들어가도 청년실업이 기다리고, 취업경쟁을 뚫고 운 좋게 자리를 잡아도 퇴출의 불안을 안고 살아가며, 자녀를 결혼시키고 난 다음엔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쓸쓸한 노후를 맞이해야 하는 게 바로 우리 사회의 서글픈 자화상이지 않은가.

거시적인 상황 또한 결코 만만치 않다. 지난 2008년 가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수정이 요구돼 왔음에도 여전히 새로운 비전과 대안은 가시화되고 있지 않으며, 동북아는 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세계사적 헤게모니 쟁탈의 일차적인 현장이 되고 있다. 오는 11월 대표의장국으로 G 20 회의를 주재할 정도의 국제적 위상이 제고됐음에도 우리 앞에 놓인 지역적·세계적 조건은 험난하기만 하다. 한국 사회는 과연 어디에 서 있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가.

미래에 대한 모색으로서의 역사
이제 역사의 한 순환점에 서서 사회학과 역사학을 공부하는 우리 두 사람은 지난 100년의 우리 역사에 대한 탐구를 시작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산업화 시대가 열린 1960년대에 태어났다. 산업화 시대의 한가운데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대학에 들어와 한 사람은 광주민주화운동을 지켜보고 한 사람은 6월 항쟁을 체험했다.

그리고 대학원에 진학해 우리는 ‘긴 20세기’라 부를 수 있는 현대 한국의 역사와 사회를 공부했다. 식민지 시대는 우리 민족에게 무엇이었는가를 비롯해 광복과 정부수립, 한국전쟁과 분단체제, 산업화와 민주화는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고민하고 탐구해 왔다.

삶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냈지만 우리는 때로 우리 사회 밖에서 우리의 역사와 사회를 돌아보기도 했다. 한 사람은 독일과 미국에서 사회학적 시각으로 서구사회의 산업화와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에 주는 함의를 고민했다. 또 한 사람은 미국과 일본에서 역사학적 시각으로 한국과 미국,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우리 현대사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탐구해 왔다.

사회학과 역사학을 20년 넘게 공부하면서 우리는 2010년을 맞이해 역사란 무엇인가의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에드워드 H 카가 강조하듯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바로 이 대화 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모색하는 게 역사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경술국치 100주년, 한국전쟁 60주년, 4월 혁명 50주년, 전태일 분신 40주년,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을 중심으로 이제 우리는 우리 현대사를 현재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미래적 과제를 탐색해 보고자 한다.

‘4월 19일, 시골에 와서’
이 기획을 준비하면서 오랜만에 신경림 시인의 시집에서 ‘4월 19일, 시골에 와서’를 다시 읽어 봤다. “밤새워 문짝이 덜컹대고 / 골목을 축축한 바람이 쓸고 있다. / … / 나는 남한강 상류 외진 읍내에 와서 / 통금도 없는 빈 거리를 헤매면서 / … / 그날의 함성을 생각했다.”

우리 두 사람은 4월 혁명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 텍스트들을 통해 배우고 익혔을 뿐이다. 그러나 텍스트 속에 숨쉬고 있는, 고뇌하고 절망하고 또 그 가운데서 희망을 일궈가던 선조들의 치열한 삶 앞에 새삼 숙연해지곤 했다.
역사는 무엇인가. 신경림 시인의 시를 이어서 읽는다. “4월이 와도 바람은 그냥 차고 / 살구꽃이 피어도 흐느낌은 더 높은데 / … / 진달래도 개나리도 피고 / 꺾이고 밟히고 다시 피는 4월 / 밤은 좀체 밝아오지 않았다.”

권위주의 시대에 신경림 시인이 가졌던 비관주의를 돌아보는 우리의 마음 역시 적잖이 쓸쓸하다. 아니 이 시에는 밤을 넘어 새벽을 맞이하려는 열망, 미래에의 강렬한 희망이 담겨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새로운 미래는 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지나간 과거에 대한 성찰을 요청한다. 그리고 그 성찰은 분별 있는 이성과 열렬한 열정의 균형감각을 요구한다. 지난 100년 현대사의 새로운 순환점에 서서 우리 두 사람은 우리 삶의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조심스레 열어가고자 한다.

김호기

[커버스토리]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나

1960년 경기 양주 출생
연세대 사회학과 및 동대학원 사회학과 졸업
독일 빌레펠트대 사회학 박사
미국 UCLA 초빙연구원
현재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노무현 대통령 취임사 기초위원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
한국정치사회학회 부회장
진보와개혁을위한의제27 공동대표
미국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 코리아
데모크라시 프로젝트 공동에디터

주요 저서 : <현대 자본주의와 한국사회>(1995), <한국의 현대성과 사회변동>(1999), <말, 권력, 지식인>(2002), <세계화 시대의 시대정신>(2007), <한국 시민사회의 성찰>(2007) 등

박태균

[커버스토리]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나

1966년 서울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 및 동 대학원 국사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방문연구원
현재 서울대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교수

KBS <인물현대사>·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자문연구원, <역사비평> 편집위원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퍼시픽 어페어스(Pacific Affairs)> 편집위원

주요 저서 :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1994), <조봉암 연구>(1995), <한국전쟁>(2005),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2006), <원형과 변용: 한국 경제개발계획의 기원>(2007) 등


김호기<연세대 교수·사회학>·박태균<서울대 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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