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신인류 아고리언, 한국사회를 변화시키다

2008.12.30

촛불·노트북·디카로 무장한 ‘시민 지성’
온·오프 경계 허무는 힘의 원천은 ‘속도’

[커버스토리]신인류 아고리언, 한국사회를 변화시키다

“‘아고라’가 2008년 한국 사회 변화의 핵심 키워드였던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의 말이다. 김 교수가 말하는 아고라는 단지 포털 다음이 운영하는 토론 사이트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특수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서 아고라다. ‘변화’ 역시 미 대통령 당선자 오바마의 구호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는 거대한 흐름, 그 가운데 아고라, 아고리언으로 대표되는 ‘시민 지성’이 반복적으로 호명되는 것이다. 이 2008년 올해의 인물로 아고리언을 꼽은 이유다. 삼성경제연구소도 12월 17일 발표한 ‘2008년 10大 히트 상품’ 보고서에서 ‘주요 이슈마다 화제를 일으켜온 인터넷 토론방’을 4위로 꼽았다. 주요 언론사 토론방과 함께 거론되었지만, 역시 핵심은 ‘아고라’다.

'아고라’에 따라붙는 것은 촛불시위다. 촛불은 2008년 5월부터 타오른 것이 아니다. 2002년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당시 학원강사 김기보씨의 제안에 따라 켜진 촛불이 그 시발점으로 이야기된다. 촛불은 2004년 국회의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 가결 철회 운동 때도 불붙었다. 촛불은 대표적인 평화적 시위문화, 의사소통 방식으로 등장했다. 2008년 누리꾼은 2005년 서울시장 당시 촛불을 들고 ‘사학법 개정 반대’ 시위를 하는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 당직자들의 사진을 찾아냈다. “야간 촛불시위는 불법”이라는 정부·여당의 주장은 조롱거리가 됐다. 2002년과 2004년 촛불과 2008년 촛불이 다른 한 가지가 있다면, 아고라의 존재다.

다음 서비스 아고라는 2004년 12월 24일 첫선을 보였다. 다음은 뉴스토론방을 바탕으로 이 서비스를 만들어냈다. 아고라를 운영하고 있는 미디어다음 뉴스팀 관계자는 “오픈 당시에도 화제가 됐고, 2006년과 2007년을 거치면서 여러 이슈도 만들어냈지만, 2008년에 벌어진 일은 우리 입장에서 당황스러운 일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지난봄과 여름 촛불시위. 누리꾼은 자발적으로 ‘토론의 성지 아고라’라고 적힌 깃발을 들고 거리에 나왔다. 이들의 ‘오프라인’ 활동의 준거는 아고라였다. 온라인 ‘아고라’에서 진행되는 논의와 상황, 정보는 즉각적으로 ‘오프라인’ 촛불에 전달됐다. 유비쿼터스 환경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를 허물었다. 시민은 촛불과 함께 노트북과 디지털카메라를 들었다. 와이브로 무선인터넷 덕분에 거리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집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는 시민들에게 전달되고,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즉석 토론은 다시 오프라인의 시위대 활동에 참고가 되었다. 시청 앞 광장에서 KBS로 향하는 거대한 촛불의 물결은 그렇게 연출된 것이다.

2008년 히트 상품 ‘인터넷 토론방’

2004년 탄핵무효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탄핵무효’ ‘민주수호’ 구호가 적힌 종이를 들어보이고 있다. <김정근 기자>

2004년 탄핵무효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탄핵무효’ ‘민주수호’ 구호가 적힌 종이를 들어보이고 있다. <김정근 기자>

첨단 IT 기술로 무장한 한국의 광우병 반대 촛불시위는 해외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시위 현장에서 노트북을 손에 든 젊은이들이 순식간에 동영상으로 제작, 인터넷에 띄워 경찰의 거친 진압을 막았다”고 소개했다.

촛불시위 초기부터 아고라와 주요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한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아고라가 갖고 있는 최대의 장점이자 힘의 원천은 ‘속도’라며 이렇게 평가했다.

“매체적 속성을 갖고 있는 다른 인터넷, 예컨대 블로그나 카페는 트랙백이나 댓글 등으로 피드백이 오는 경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반면 아고라에서는 반나절 단위로 여론과 전략, 전술이 형성됐다. 블로그나 다른 커뮤니티에서 하지 못한 역할을 아고라가 맡은 것이다.”

그에 따르면 블로그나 메타블로그, 그리고 카페와 같은 커뮤니티는 일상적 커뮤케이션 공간이며 이탈리아 사상가 그람시의 견해를 빌리자면 일종의 ‘진지’ 역할을 한다. 촛불시위와 같은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그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곳이 ‘아고라’다. 누리꾼은 다시 ‘아고라’에서 부상한 ‘정보’를 제각각 블로그나 카페에 퍼 나른다. 올린 글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과 토론, 새로운 정보의 교류와 실천 전략 등을 논의할 때 아고라와 같은 온라인 광장의 유용성이 2008년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것이다.

새롭게 형성된 이 ‘패턴’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배적인 사회운동 형태가 될 것이라고 사회학자들은 전망하고 있다. 조대엽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시민사회의 참여 형식을 놓고 볼 때 70년대, 80년대, 90년대를 특징짓는 운동 형태를 각각 재야·민중·시민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라며 “2004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또 다른 ‘제4의 결사체’가 주도하는 운동 형태가 바로 촛불시위”라고 말했다.

‘제4의 결사체’는 유연, 탈조직, 온라인화가 특징이다. 조 교수는 “형식이나 규모에서 제한이 없고, 이슈의 제한이 없을 뿐 아니라 온라인 논의 구조를 통해 소통의 횟수가 많아지면서 공감대가 커지면서 온·오프라인을 넘나들 수도 있는 유연자발 집단이라는 것이 특징”이라며 “2008년 촛불집회에서 그 양태를 확연히 드러낸 것이 아고라·아고리언”이라고 덧붙였다.
올해 촛불시위 초기, 정부 당국자는 이 ‘새로운 유형의 결사체’의 실체를 깨닫지 못한 것 같다. 촛불시위를 통해 자발적으로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시위 참가자들이 거리행진을 하다 경찰에 막히자 즉석에서 시민악단의 북장단에 맞춰 춤추고 있다. <정지윤 기자>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시위 참가자들이 거리행진을 하다 경찰에 막히자 즉석에서 시민악단의 북장단에 맞춰 춤추고 있다. <정지윤 기자>

연행된 누리꾼은 풀려난 뒤 취조받은 내용을 다시 아고라에 올렸다. 그들이 받은 질문은 “당신은 아고라의 회원인가요” “손 팻말의 내용은 누가 알려준 건가요”였다. 아고라의 사용자들은 구시대적 조직표에 끼워 맞추려 애쓰는 그들의 모습에 배꼽을 잡았다. 그렇다고 진짜로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 한 IT 관련 업계 전문가는 “청와대나 관계 당국이 촛불시위 주요 국면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각계 전문가 의견을 모니터링했고, 실제로 당국 관계자가 나를 만나 의견을 청취한 적도 있다”면서 “이와 관련해 비공식적으로 여론조사도 하면서 꼼꼼히 여론 동향을 체크했던 것으로 안다”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그는 청와대가 결론을 잘못 내린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 전문가는 “인터넷 여론에 대해 초기 대응을 잘못해 문제가 커졌고, 커지기 전에 싹을 잘랐어야 한다는 것이 나름의 결론이었던 것 같다. 보복성이라고까지 말하기는 그렇지만 진화할 방법을 모르니 포털을 규제해 풀려고 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촛불이 시작된 5월 다음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세무 조사가 있었다. 세무 조사는 이례적으로 두 차례 연장되면서 8월 초까지 이어졌다. 결론은 40억4000만 원 추징이었다. 다른 포털에 부과한 추징금 규모와 비교해도 이례적이다.

업계에서는 “아고라가 촛불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에 대한 ‘괘씸죄’였다”는 것이 중론이다. 다음의 한 관계자는 개인 의견을 전제로 “일상적인 세무 조사라고 했지만 기간도 두 달이 넘고, 제대로 업무를 못 볼 만큼 강도 높은 조사였는데 (이명박 정부가) KBS나 다른 기관에서 보여준 전형적인 행태를 안 떠올렸다면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외부적으로 비치는 다음의 행보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다음의 전 고위 임원은 당시 석종훈 사장의 행보를 두고 “탄압을 받든 안 받든 뭔가 비전을 제시하고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데, 너무 납작 엎드려 있던 것이 아니냐”고 비판했을 정도다.

유연함·탈조직으로 촛불시위서 맹위
2004년 말에 첫선을 보인 아고라가 2008년 촛불시위 국면에서 이슈의 중심으로 ‘갑자기’ 떠오른 까닭은 무엇일까. 물론 촛불시위 이전에도 아고라가 만들어낸 이슈가 없던 것은 아니다. 2005년 아고라 누리꾼은 전여옥 당시 한나라당 대변인의 ‘대졸 대통령’ 발언과 관련해 공식 사과를 요청하는 청원을 제기한다. 이 청원은 6531명의 서명을 이끌어냈다. 결국 당시 박근혜 당대표가 공식 사과하고 전 대변인이 사과의 뜻을 밝히는 성과를 냈다.

촛불시위가 절정에 달했던 6월, 다음 아고라의 페이지뷰와 방문자 수도 절정에 달했다. 소강 상태를 빚던 트래픽은 경제논객 미네르바가 출현하면서 하반기에 다시 상승했다. <랭키닷컴 제공>

촛불시위가 절정에 달했던 6월, 다음 아고라의 페이지뷰와 방문자 수도 절정에 달했다. 소강 상태를 빚던 트래픽은 경제논객 미네르바가 출현하면서 하반기에 다시 상승했다. <랭키닷컴 제공>

이밖에도 인사동 쌈지길 유료화 철회, 2007년도 태안자원봉사 지원 모금 등의 ‘희망 모금’은 사회적 변화를 이끈 온라인 실천으로 남아 있다. 김호기 교수는 “2006년과 2007년 사이에 소위 ‘집단 지성’이라고 불리는 인터넷 공론장에서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라고 말한다. 즉 서프라이즈 등으로 대표되는 종전의 인터넷 공론장이 소위 ‘논객’이라는 엘리트 중심으로 이뤄졌다면, 정치적 변화라는 측면에서 ‘민중주의’, ‘시민 지성’으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김 교수가 보기에 아고라와 같은 인터넷 공론장의 매력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거의 완전한 형태로 실현된다는 데 있다. 단지 누군가 제공한 콘텐츠를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글을 쓸 수 있고, 반응을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 짧은 형태의 댓글이나 답글, 링크 등 여러 형태로 정보나 자료 제공의 용이성도 아고라가 가진 장점이다.

여기에는 오프라인 신문매체로 대표되는 기존 공론장이 신뢰를 잃은 것도 크게 작용했다. 쇠고기 협상 국면에서 정부 편을 든 주류 보수매체에 대한 실망이 역설적으로 급속도로 인터넷 공론장의 신뢰로 전환된 것이다. 김 교수는 “언론매체처럼 정보가 종합적이지 않지만, 기존 공론장이 제공하지 않던 전문 정보뿐 아니라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보장했다는 것”이라며 “기존 공론장이 사회적 권위를 잃었기 때문에 아고라에 대한 폭발적 관심이 일어났다”고 풀이했다. 아고리언은 블로그와 인터넷 커뮤니티 그리고 검색을 통해 정보와 지식을 생산했고, 적극적으로 담론을 만들어 나갔다.

아고리언과 소통의 중요성을 제일 먼저 깨달은 것은 언론이다. KBS와 YTN의 구성원이 차례로 아고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SBS노조도 “보수매체의 논조를 따라가지 않기 위해 내부에서 노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치권이 뒤를 이었다. 김성훈 한나라당 디지털 위원장은 “한나라당은 인터넷 사이드카 법안을 추진하고 있지 않다”는 해명 글을 아고라에 올렸다. 이에 질세라 백원우 민주당 유비쿼터스 위원장도 글을 올려 인터넷 탄압과 촛불 인권유린에 대한 공개토론을 한나라당에 제안했다.

촛불시위가 진정 국면에 접어들면서 아고라에 대한 참여율도 눈에 띄게 줄었다. 랭키닷컴의 통계를 보면, 촛불시위가 한창이던 6월 절정을 이뤘던 페이지뷰는 8월과 9월 4분의 1로 줄었다. 방문자 수도 3분의 2가량 줄었다(표 참조). 누리꾼은 여기에 1, 2차에 걸친 아고라 개편도 일조했다고 주장했다. 포털의 정권 눈치 보기 결과라는 것이다. 게시물 차단이나 촛불시위 참가자 구속도 아고라와 같은 ‘포털 제공 서비스’에 대한 불신을 가중시켰다. 일부 누리꾼은 대안으로 만든 ‘아고리언’ 사이트(http:// agorian.kr)나 아예 검열과 삭제를 피해 해외 서버에 구축한 ‘대한민국 네티즌 망명지’(http://exilekorea.net)와 같은 사이트로 이동했다.

다시 아고라가 주목받은 것은 아고라 경제방의 미네르바 활동이 부각되면서다. 미네르바는 ‘인터넷 경제대통령’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마침내 정부도 아고리언과 대화에 나섰다. 기획재정부가 올린 첫 글은 ‘종부세 개편은 부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글이다. 9월 23일이다. 기획재정부가 미네르바가 올린 글을 언급하며 해명 글을 올린 것은 한 달 뒤인 10월 25일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다음 아고라에 직접 글을 올린 것은 처음이지만 이전 정부부터 정부는 국민과 직접 소통한다는 면에서 온라인 홍보를 강화해왔다”면서 “미네르바라는 개인에 대응하기 위해 글을 올린 것은 아니며, 미네르바를 직접 지칭한 것도 딱 한 번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아고라의 빛과 그림자

온라인 ‘아고라’에서 제시한 아이디어는 즉각적으로 오프라인으로 전달돼 퍼포먼스로 이어진다. 온·오프의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점에서 2008년 촛불시위는 한국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상징하고 있다. 지난 7월 촛불시위 참가자들이 ‘명박산성’을 패러디한 ‘삼양산성’을 서울 시청 정문 앞에 쌓고 있다. <경향자료 사진>

온라인 ‘아고라’에서 제시한 아이디어는 즉각적으로 오프라인으로 전달돼 퍼포먼스로 이어진다. 온·오프의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점에서 2008년 촛불시위는 한국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상징하고 있다. 지난 7월 촛불시위 참가자들이 ‘명박산성’을 패러디한 ‘삼양산성’을 서울 시청 정문 앞에 쌓고 있다. <경향자료 사진>

아고라에는 ‘빛’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도 존재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유식 DC인사이드 대표는 “일부 DC인사이드 사용자가 아고라에 대한 ‘파블로프의 개’ 실험 결과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집단 지성이라기보다 집단 패닉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아고리언은 허위로 내용을 작성해도 ‘자신들의 편’처럼 보이면 무조건 찬성을 클릭한다는 일부 누리꾼의 비아냥을 소개한 것. 조화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9월 발표한 ‘사이버액티비즘과 숙의 민주주의의 가능성’이라는 논문에서 “아고라와 같은 촛불시위 관련 인터넷 게시판을 분석해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반대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을 배척하는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언론이나 논문 등 공신력 있는 정보보다 주로 인터넷 정보와 개인적 경험에 근거해 정치적 사안에 대한 주장을 펼치는 것도 보인다”면서 “아고라 등에서 보이는 토론문화는 충분한 의견과 토론을 거친 ‘숙의 민주주의(deliberate democracy)’와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아고라 좀비’나 ‘프락치 논란’이 그것이다. 신진욱 교수는 “아고라가 배타적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고리언의 책임이라기보다 도저히 ‘숙의’가 안 되게끔 전체주의적 입장에서 공격을 반복적으로 수행한 사람의 문제”라며 “소위 ‘알바’로 불리는 사람들을 대면하는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왜곡된 일부 아고리언이 생겨났다”라고 말했다. ‘정보의 신뢰성’ 문제와 관련해서도 그는 “보수언론이나 쇠고기 정국 당시 정부의 주장처럼 공식 권위를 빌려 생산되는 정보는 신뢰할 만한 내용인가. 또 당시 그곳에서 절실했던 정보를 제공해줬나”라고 반문했다. 전형적인 괴담 프레임에 기초한 주장이라는 지적이다. 그는 “직접 면접한 대부분 온라인 공론장 경험자들의 공통점은 지난 촛불을 계기로 굉장히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라며 “정보의 소스가 무척 다원적이어서 나름의 방식으로 스스로 걸러 자신의 입장을 만들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 때문에 시민들 모두 분열적으로 괴담에 휩쓸렸다고 말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주목할 만한 것은 촛불시위가 2008년 하반기 잦아들었고, 누리꾼이 일상의 커뮤니케이션장으로 돌아갔지만 여론의 흐름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직접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긴장’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2008년 봄과 여름 촛불을 이끈 배경 조건은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신 교수는 “촛불시위가 촉발되던 당시는 소위 ‘민주주의 10년의 끝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겁이 없었지만, 탄압을 경험한 후에야 참여함으로써 치러야 할 대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라며 “그 문턱을 어떤 조건이나 방법으로 넘을 것인지가 중요한 변수”라고 덧붙였다.

김호기 교수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한국 사회의 변화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넘어섰다”면서 “이미 우리의 삶 자체가 네트워크화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 다음에 존재하는 인터넷 공론장으로서 아고라의 역할은 줄어들지 몰라도, 곧바로 또 다른 아고라가 대치해 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우리가 ‘아고라’를 계속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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