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부 언론이나 특정 시민단체 등에서 편의점 판매 의약품의 품목 확대, 의약품의 배달 허용과 같은 규제 완화를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흔히 신자유주의자들이 그러하듯, 의약품 관련 규제가 완화되면 시장에 공급이 늘어나 의약품 가격이 내려가고, 서비스 품질은 올라간다고 주장한다. 약국의 숫자가 늘어나 의약품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고 제약 관련 서비스 범위가 커지니 소비자들로선 이득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폴란드는 왜 규제 완화에 역행할까
폴란드에서는 2017년 4월 대통령이 ‘약사를 위한 약국(pharmacies for the pharmacists)’ 법안에 서명했다. 전문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 한국에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내용의 법안이었다. 약국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을 약사로 한정했고, 거리 및 인구에 따른 신규 개설 규정까지 포함했다. 폴란드뿐만 아니라 에스토니아, 헝가리, 우크라이나와 같은 국가에서도 의약품 관련 정책에서 자유도를 낮추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들 나라가 흔히 세계적인 추세라고 알려진 규제 완화에 역행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약국 개설과 관련된 약사법의 변천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폴란드는 2002년 당시 불어오던 신자유주의의 바람 앞에서 개인이나 회사가 총 약국 수의 10% 범위에서 누구나 약국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런 규제 완화 조치가 40% 정도의 국민이 농촌에 거주하는 폴란드의 의약품 접근성을 개선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폴란드는 2017년 기준 국민 10만명당 약국 수가 약 39개로 전 세계에서 다섯 번째를 기록할 만큼 많은 약국이 생겼다. 약 41개의 한국 바로 다음 순위를 차지했다. 이러한 약국의 증가는 그러나 2005년에 5%도 채 되지 않던 대형 체인약국이 전체 약국의 약 40%에 도달할 정도로 급증한 결과가 만든 착시효과일 뿐이었다. 한국에서 대형 백화점과 마트가 그러하듯 이러한 대형 체인약국들은 도심지에만 약국을 신규로 개설했다. 국민의 절반가량이 농촌에 거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약사의 12.8%만이 농촌에서 근무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또한 도시권역에서의 약국 증가에 따른 과도한 경쟁은, 흔히 민영화라고 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수익성 강화라는 목적과 결합해 의약품과 연관한 보건의료 서비스 제공이라는 약국의 공적인 목적보다는 약국 체인의 수익성 강화를 위한 운영에 집중했다. 일반의약품 및 건강기능식품에 대한 광고가 급증했고, 약국들은 다양한 마케팅을 통해 국민에게 약을 권유했다. 그리하여 폴란드는 다른 유럽연합 국가들과 비교해 국민소득 면에선 상대적으로 열세였지만, 일반의약품 및 식이보충제의 소비 규모는 EU 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상황에 다다랐다. 더 나아가 영리 위주의 약국 기업들은 자국 소비자가 아닌 외부로 눈을 돌렸다. 더 많은 이익을 노리고 의약품을 다른 EU 국가로 역수출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정작 폴란드 국민의 의약품 접근성이 심각하게 나빠지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결국 이러한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던 폴란드 정부는 약국 개설과 관련한 규제를 강화하기로 했고, 앞에서 설명한 ‘약사를 위한 약국’법을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지금은 약사만이 약국을 개설할 수 있다. 특정 지역에 몰아서 약국 문을 집중적으로 열 수도 없다. 이처럼 약국 공공성 강화의 중요성을 깨달은 폴란드 정부는 2020년 3월에는 약사에게 지정된 의약품에 대한 처방권을 부여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갔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따른 의료붕괴 상황을 막고자 약국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대형 체인약국에 의해 공적 목적 상실
그렇다면 이는 폴란드에 국한된 특수한 상황일까? 2006년과 2014년 2차례에 걸쳐 오스트리아 보건연구소에서 ‘규제 완화의 교훈’이란 소제목하에 유럽 9개국을 대상으로 수행한 Vogler S 등의 연구보고서를 살펴보면, 각국의 무분별한 약국의 설립 및 의약품 취급에 대한 규제 완화가 국가 보건 의료체계에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지 등의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게 나온다. 노르웨이의 경우 2001년 이전에는 한국과 유사하게 약사가 아닌 사람의 약국 설립을 금지했으나, 2001년 관련 규정 폐지 이후 약국 숫자가 급증했다. 앞의 폴란드의 사례와 동일하게 도시지역에만 한정적으로 약국이 문을 열었으며, 불과 4년 만에 대형 의약품 도매업체가 설립한 체인에 소속된 약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80%에 달했다. 자본에 의한 독점적 지배체제 구축이었다. 이는 특정 업체에 의한 의약품 수급 및 가격통제로 이어졌다.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규제를 받지 않는 대부분의 의약품 자유판매 국가들에서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특정 이해관계자가 절대적인 시장 지배력을 확보함으로써 경쟁이 극도로 제한됐다.
시골 및 변두리 지역의 약국 접근성 악화는 말할 것도 없고, 규제를 지속적으로 강하게 가하는 다른 국가들과 비교할 때 자유판매 국가들은 의약품 서비스의 품질 및 공공성 측면에서도 열악한 모습을 보였다. 예를 들면, 의약품의 즉각적인 이용을 보장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핀란드의 약국은 다빈도 의약품에 대해서는 최소 재고량을 지키도록 하는 규정이 있다. 노르웨이도 유사한 법 규정이 있지만, 사문화돼 버리고 만 까닭에 의약품이 품절되는 사태마저 왕왕 발생했다. 대형 체인약국의 수익성 강화를 위해 별로 돈이 되지 않는 필수의약품 재고량은 최소화하고, 의약품 배송 횟수 역시 큰 폭으로 줄여버린 결과였다. 가격은 오히려 올라갔다. 특정 이익세력의 독과점으로 인상폭이 더 커졌다. 일반의약품에다 건강기능식품 판매 마케팅까지 판을 치면서 국민 전체가 의약품에 지출하는 비용 또한 급증했다. 경쟁 증가와 비용 억제를 명분으로 내걸고 규제 완화를 도입했지만, 이러한 목표가 실현됐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게 오스트리아 보건연구소가 연구보고서를 통해 내린 결론이다.
한국에서도 2011년 24시간 운영 가능한 편의점에서 일부 의약품 취급을 허용하는 내용의 법 개정이 이뤄졌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흘렀다. 약국과 편의점을 합한 의약품 구매 가능한 장소가 20여 곳 이하인 지역을 기준으로 보면, 편의점보다 약국의 숫자가 더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021년 기준 전국 편의점 점포 수가 5만1475개이고, 약국은 2만3773개임을 고려할 때 유럽의 사례와 연결 지어 생각한다면 이러한 숫자의 차이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실제 제도 시행 시점인 2011년 기준으로 편의점과 약국의 숫자가 비슷했던 점까지 고려하면, 편의점의 급격한 증가는 이미 의료접근성이 충분한 도심지역 위주로 이뤄져 왔다는 뜻이다.
코로나19로 2021년 타이레놀이 품절된 사태가 있었다. 대형공급자에 의한 공급망 불균형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현상이었다. 대형 유통 업체가 관여하는 편의점이 물량을 쓸어가면서 동네 약국의 타이레놀 품절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의약품 접근성이 떨어지는 시골 지역으로 내려갈수록 이런 부작용은 커질 수밖에 없다. 약국에 대한 규제 완화로 자본에 의한 전체의약품의 독과점이 지금보다 심화된다면 과연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지겠는가.
신자유주의자들은 공공성이 강한 다양한 분야에서조차 민영화와 규제 완화를 끊임없이 외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규제 완화는 그들이 말하는 장밋빛 미래보다는 상대적 약자들의 소외로 결론이 날 뿐이다. 특히 국민건강보험제도라는 공공성에 기반한 한국사회의 보건의료 시스템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규제 완화는 더욱 위험천만한 일이다. 부작용 역시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최첨단 의료기술이 앞다퉈 발표되는 시대에 아직도 많은 국민이 야간에 치료를 받을 응급실을 찾지 못해 ‘뺑뺑이’를 돌다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태가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비급여 진료로 대표되는 의료의 상업화가 빚어낸 비극이다. 의약품에 대한 무차별 규제 완화가 초래할 디스토피아 역시 먼 곳에 있지 않다. 보건의료정책 전문가인 척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늘 예시로 드는 미국에서 서민들은 보험사의 강요로 인해 직접 약국에서 약을 받을 권리를 빼앗기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결국 동네 슈퍼에 산처럼 쌓여 있는 진통제와 수많은 광고로 강요된 각종 영양제에 돈을 소모하며 자신의 건강을 저당 잡히고 있다. 의약품 규제 완화론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힘을 얻는다면 이들이 지배할 한국의 의료 시스템 역시 그 미래는 미국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박현진 약사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약준모) 회장·약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