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가습기 살균제의 원료 물질(CMIT·MIT)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롬앤하스는 한 업체로부터 “이 물질을 가습기에 넣어도 되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당시 롬앤하스에서 근무하던 A씨의 답변은 “절대 안 된다”였습니다. ‘위험성을 알았기 때문에 팔지 않은 것인지’ 묻자 A씨는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몰랐기 때문에 판매할 수 없었다. 안전성에 대한 실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충격이었습니다. 다시 생각하니, 당연한 말 같았습니다. 모르면 안 팔아야지요. 그런데 왜 충격을 받았을까요. 한국 기업들이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994년 이 물질을 이용해 최초의 가습기 살균제를 출시한 SK도, 2002년부터 같은 제품을 판매한 애경도 위험성을 알지 못한 채 제품을 팔았습니다.
굳이 수십 년 전 얘기를 꺼낸 이유는 가습기 살균제 관련 형사재판에서 SK·애경의 변호인단이 “(제품 출시) 당시의 과학기술로는 (사용 농도의) 100배, 200배로 실험을 했다 하더라도 제품의 결함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문장 하나를 반복하고 싶습니다. 모르면 안 팔아야지요.
이 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간 법정에서 이들 변호인단은 상식에도 의문을 제기할 만큼 끊임없이 의심하는 태도로 ‘과학’을 활용했습니다. 모든 불확실성을 배제하면서 과학적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의 신’이 있다면, 이들 같은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1·2심 형사재판 내내 변호인단은 검찰 측이 가습기 살균제의 건강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 제출한 동물실험 등 연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고, 그 결과 1심에선 무죄 판단을 받았습니다. 그랬던 이들이 제품 출시 전 안전성 검증에 대해서는 ‘실험을 했어도 몰랐을 것’이라며 너무나도 관대한 태도를 취하는 게 모순으로 보였습니다. 대체 왜 그때는 ‘이 제품이 안전한 제품이 맞나’라는, 반드시 해야 할 질문도 던지지 않았던 걸까요.
오는 11일 항소심 선고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출시돼, 가장 먼저 피해자들에게 고통을 줬지만, 아직도 형사책임은 지지 않고 있는 기업에 재판부는 어떤 판단을 내릴까요. ‘모르면 안 팔아야 한다’는 상식을 회복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