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고종황제는 내가 지금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학교의 이름을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고 지었다.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서울에 세운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으로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의 전신이다. 나는 국악을 공부하고자 한국으로 유학 오기 훨씬 오래전, 조선이 1932년에 들여온 최초의 그랜드피아노 중 한 대가 배재대학교에 보관돼 있다는 글을 읽었다. 이는 배재대학교에서 교수직 제의가 왔을 때 수락한 중요 이유로 작용했다.
그 그랜드피아노는 현재 서울 정동에 있는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그 안쪽에 한때 조선 최초로 인가된 서양식 학교인 배재학당 건물이 있다. 이 학교는 조선 학생들에게 찬송가를 통해 최초로 서양 음악 중 일부를 소개해 주었다. 배재학당 창립자인 아펜젤러의 친구인 메리 스크랜튼이 1925년에 이화여전에 정식으로 음악학과를 설립한 이후, ‘음악’이라는 말은 한국에서 오로지 ‘서양 음악’만을 의미했다. 선교사가 이끈 서양식 교육에는 단지 찬송가뿐 아니라 서양의 고전 음악 악보와 서양 의약학, 그리고 영어가 함께 담겨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 학교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의 후학들이 오늘날 한국의 국가 예술 정책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른다. 교육부 홈페이지의 영어판을 보면 이주호 교육부 장관가 지난 5월 1일 전남의 창평초등학교를 찾아 ‘학교 예술 및 체육 활성화 방안에 대한 의견을 경청하는’ 사진이 나온다. 이 장관은 해당 보도에서 “지역 예술 및 스포츠 꿈나무들을 학교 교육과 연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또 평생 예술과 스포츠를 즐기는 전인적인 미래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라고 언급했다. 백번 동의하면서도 한 가지 아쉬운 대목이 있다. 이 장관의 언급과 함께 나란히 배치된 이른바 ‘예술’ 관련 사진에는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 수업을 받는 학생들만 보인다. 한국을 대표하는, 아니 대표해야 마땅할 국악 수업 현장 사진이 없다. 교육부의 영어 사이트에서 국악이라는 단어를 검색해도 “검색 결과 없음”이라는 메시지(‘Gugak’에 대한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만 뜬다. 교육부 홈페이지 한국어판도 마찬가지다. 대충 훑어봐도 ‘음악’(다시 강조하건대, 서양 음악을 의미함)이라는 단어가 ‘국악’보다 적어도 5배 이상 자주 언급되는 듯하다.
일제강점기에 국악은 한국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는 데 특히 어려움을 겪었다. 해방 이후에도 남과 북이 전쟁을 겪으면서 국악이라는 장르는 정치적 역할을 강요받았다. 우파는 우파대로 선전·선동과 의식 고양을 목적으로 하는 북한의 참여예술에 대항하는 한국 유산의 순수 전통 지킴이로, 좌파는 좌파대로 외세와 자본에 맞선 학생 운동의 상징으로 국악을 소비했다. 우파와 좌파 모두 국악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는 데 주력한 나머지 K팝을 주축으로 하는 한류 물결 속에서도 정작 국악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철저히 소외되고 있다. 이념의 경계가 예전처럼 엄격하지는 않지만, 젊은이들이 너무 오랜 세월 한국의 전통 음악인 국악과 단절된 결과, 이제는 바로잡고 싶어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조차 감이 잘 오지 않는 상황이 돼버렸다. 국악을 바탕으로 세계로 뻗어 나가려는 시도조차 별로 없는 실정이다. 한국인이 가장 잘할 수 있고, 한국이라는 나라를 세계에 가장 손쉽게 알릴 방법인데도 말이다.
전지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는 논문 ‘국악 교육의 본질과 한계에 관한 성찰’(2015)에서 국악의 본질에 관해 기술하면서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 하나의 ‘발명’에 상응하는, 인간의 존재와 예술 자체에 대한 반영이 아닌 … 일제강점기 순응주의적 교육의 잔재와 작품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및 권위주의가 결합하고 형성되어 나타난 결과물”이라고 표현했다. 만약 이것이 ‘국악’이라면 어느 누가 사랑에 빠질 것인가. 오늘날 한국에서 ‘국악’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현재 대전에 있는 배재대학교에서 ‘국악에서 K-Pop까지: 21세기 한류와 한국의 소프트파워 국력’이라는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이 수업은 소프트파워, 국가 브랜딩, 그리고 한류의 이슈들을 주로 살핀다. 물론 학생들에게 국악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함이다. 먼저 ‘국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여러 해가 가면서 점점 내가 기대하는 대답에서 학생들이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학생은 가야금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산조라는 단어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 사라지고 남은 현존하는 다섯 곡의 판소리에 대한 이야기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유명 밴드 이날치의 노래 ‘범 내려온다’(타이거 커밍다운)와 25현 가야금 앙상블이 연주하는 파헬벨의 캐논을 모두 국악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 여파로 대부분의 학생이 국악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음악도 라이브 콘서트에 가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는 사실을 접했다. 교육부의 ‘지역 예술… 자원과 학교 연계’ 지침에 맞춰 라이브 국악 공연 관람을 숙제로 내기 시작했다. 많은 학생에게 이런 체험은 생각의 변화를 일으켰다. 몇 가지 반응을 소개한다. “공연에 가기 전에는 가야금에서 옛날 소리만 나고 지루할 줄 알았는데 뭔가 요즘 노래 같은 느낌이 들었고 굉장히 참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국악에서 K-Pop까지: 21세기 한류와 한국의 소프트파워’ 수업의 리포트 과제로 아무런 관심도 안 가지던 국악 공연을 처음으로 접하게 됐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나라의 국악에 흥미와 재미를 느꼈고, 공연을 감상한 시간이 정말 의미가 있는 시간이 된 것 같다. 이번을 계기로 앞으로는 과제가 아니더라도 가끔 취미로 국악 공연을 감상할 계획이다. 내 인생에서 하나의 즐거움을 찾은 듯해 너무 만족스럽다. 우리의 이러한 노래들이 잘 보존돼 무관심으로 없어지지 않고, 잘 전승돼서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잘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2년 한국의 음악 교과서에서 국악 부분을 없앨지에 대한 논란이 갑자기 불거진 적이 있다. 지난 100년 동안 서양 음악이 한국인들과 한국의 전통 장르들 사이에 얼마나 깊은 골짜기를 파놓았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세계 문화에서도 보기 드문 독특한 정체성을 지닌 국악의 중요성을 감상하는 능력은 차치하고서라도 국악을 낯설게 생각해서 될 일인가. 국악에 대한 친숙함의 부족 현상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이는 학생들 탓이 아니다. 한국에서 대학생들을 지도했던 나의 경험으로 미뤄 학생들이 국악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와 사회가 이들에게 국악을 접할 방법을 알려주지 않고, 기회조차 제공하지 않는 탓이 크다. 학생들은 일단 내가 국악이라는 세상의 문을 열고 그 세계로 초대하기만 하면 이내 사랑에 빠졌다. 그들에게 국악을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는 몇 가지 요령을 조언해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배재대학교의 교수가 되기 전에 나는 10년간 알래스카의 크로스사운드(CrossSound)라는 뉴 뮤직(New Music) 축제의 공동설립자 겸 감독을 지냈다. 뉴 뮤직과 알래스카의 대자연은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알래스카 관객들은 하이킹이나 낚시, 또는 맥주 양조장에 가는 일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 낯선 음악의 세계로 관객들을 끌어들여 새로운 현대 음악 페스티벌을 만드는 작업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어쩌면 이제 한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국악을 좀 안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선조들의 독특한 음악 전통을 밑바닥부터 다시 국민에게 이해시키겠다는 각오로 접근해야 한다. 그만큼 국악과 한국인들이 서로 멀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국악은 더 이상 전통 음악이 아니라 새로운 음악이다. 예술 교육 또한 이 전제에서부터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30여 년 동안 한국에서 학교라는 제도권 교육의 바깥 영역에서 국악 교육을 지속해왔다. 국악 교육이 진정한 음악 교육의 영역으로 들어가려면 전지영 교수의 제안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국악 교육이 여러 한계를 극복하고 교육적으로 독창적인 지위를 이뤄가는 길은 국악이 권력에서 국민으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민족 고유의 음악으로, 작품이 아니라 삶에 초점을 두는 쪽으로 변화하는 데 있다”고 제안한다. 전폭적으로 동의한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이 이를 증명해준다. 30여 년 가야금을 공부하면서 민중의 음악으로서 국악을 체험했다. 가야금 병창과 산조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고취의 도구가 아닌 한국 역사의 흔적 그 자체였다. 세대를 지나온 스승들을 통해 나에게 전승됐고, 국악은 어느새 나의 내면을 파고들었다. 젊거나 나이 들었거나 구분 없이 모든 스승은 내게 그들의 예술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국악뿐만 아니라 보다 전인적인 인간이 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지금도 이보다 더 가치 있는 교육은 알지 못한다.
<조세린 배재대학교 서재필대학 교수·7공화국주춧돌포럼 문화정책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