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신안 보물선에 밀수품이 800만개나?

신안 보물선에서 출토된 동전. 총 800만개나 됐고, 무게가 28t에 이르렀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신안 보물선에서 출토된 동전. 총 800만개나 됐고, 무게가 28t에 이르렀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30, 50, 70, 700, 900, 1500. 무슨 숫자조합일까요. 올해(2023)에 유독 많이 붙은 ‘~주년’의 수식어입니다.

백제금동대향로 발굴 30주년과 천마총 발굴 50주년이고요.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입니다. <고려도경>을 쓴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 방문(1123) 900주년이 됩니다. 백제 무령왕의 장례식(523)이 거행된 지 1500주년이고요.

그런데 얼마 전에 올해가 또 하나의 ‘~주년’이었다는 사실을 알린 행사가 열렸더라고요.

그것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신안 보물선’이 1323년(충숙왕 10) 원나라 경원(저장성 닝보·浙江省 寧波)을 출발한 지 700주년이 된 해라는 겁니다. 얼마 전(11월 11일) 고려대에서 ‘신안선 출항 700주년 국제 심포지엄’이 열렸답니다.

새삼 ‘신안 보물선’ 인양 이야기가 새록새록 떠오르더군요.

■도자기 6점의 기적

1975년 8월 20일이었습니다. 증도 방축리 앞바다에서 조업 중이던 어부(최형근씨)의 그물에 청자꽃병을 비롯한 중국제 도자기 6점이 걸렸습니다. 최씨는 그러나 이 도자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 해역에서는 1950년대부터 어민들의 그물에 곧잘 중국제 청·백자가 걸려 올라왔는데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답니다. 이 도자기를 요강 혹은 개밥그릇으로 사용했거나 엿과 바꿔먹기도 했다죠. 최형근씨는 인양한 도자기들을 그냥 집 마루 밑에 넣어 두었답니다. 그나마 엿 바꿔 먹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던 거죠.

해가 바뀐 1976년 1월 초등학교 교사였던 동생(최평호씨)이 형 집을 찾아와 마루 밑 청자 이야기를 듣게 됐습니다. 여기서 동생 최평호씨의 ‘촉’이 발동됩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물건임을 알아차린 최평호씨는 신안군청에 신고했습니다.

그해 9월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사건이 터졌습니다. 도굴꾼 이모씨가 이 해역에서 인양한 청자화병 등 122점을 팔아넘기다 검거된 겁니다. 더는 좌시할 수 없었던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은 발굴단을 꾸려 사상 처음으로 수중발굴에 나섭니다.

본격 조사 결과 해저 20m에서 확인된 난파선의 규모는 깜짝 놀랄 만했습니다. 최대 길이 34m, 최대 폭 11m이고요. 승선 인원 100명 정도의 200t급 대형 선박으로 추정됐습니다. 1984년까지 9년 동안 11차례의 인양 결과는 ‘경천동지’, 그 자체였습니다. 유물은 모두 2만3502점에 달했고요. 동전 800만개, 자단목 1017개, 선체 조각 445개가 인양됐습니다.

신안선에서 인양된 동전. 배 가장 아랫부분에 깔려 있던 자단목 위에 총 66종류의 동전이 놓여 있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신안선에서 인양된 동전. 배 가장 아랫부분에 깔려 있던 자단목 위에 총 66종류의 동전이 놓여 있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하카다행 무역선의 침몰

이 배가 언제 어디서 출항했으며, 어디로 가는 무역선이었는지 초미의 관심사가 됐죠.

선적된 물품에 달려 있던 명문 목간 364점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 목간에는 상품의 종류와 수량, 선적 일자, 수령인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는데요. 오늘날의 ‘택배 송장’이죠. 이중 ‘지치 3년’명 목간이 눈에 띄었습니다.

‘지치(至治)’는 원나라 영종의 연호(1320~1323)입니다. ‘지치 3년’이면 1323년(충숙왕 10)이 됩니다.

그와 함께 ‘4월 22일, 23일, 5월 11일, 6월 1~3일’ 목간과 함께 ‘경원로(慶元路)’명 청동추가 나왔습니다. ‘경원’은 지금의 저장성 닝보(浙江省 寧波·절강성 영파)를 가리킵니다. 도착지는 하카다(博多·지금의 후쿠오카)가 유력했습니다. 목간 중에 ‘하코자카궁(崎宮)’ ‘조자쿠암(釣寂巖)’ 등 하카다의 신사와 사찰 이름이 보였거든요.

이 배는 1323년 4~6월 세 차례에 걸쳐 화물을 선적한 뒤 경원(닝보)을 떠나 일본 하카다로 향하던 중에 신안 앞바다에서 악천후를 만나 침몰하고 만 겁니다.

■동전 800만개의 정체

‘신안 보물선’ 유물 중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아무래도 중국제 도자기였죠.

하지만 저는 상대적으로 대접받지 못한 유물에 관심을 가졌는데요. 그런 측면에서 이번 학술대회 발표문 중 에노모토 와타루(榎本涉)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연구원의 논문(‘일본과 원나라 무역의 시박사 무역과 밀무역’)이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이 신안선에 밀수품이 다량 적재돼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한 건데요. 그 밀수품이란 선체의 밑바닥에서 자단목(1017개) 위에 덮여 있던 800만개의 동전이라는 겁니다. 무게가 28t에 달했습니다. 동전은 대부분 끈에 꿴 채로 확인됐는데요. 끈은 비록 썩었지만, 그 흔적은 남아 있었어요.

인양 과정에서 동전의 소유주마다 달아둔 목건이 나왔습니다. 그 종류가 66종에 달했는데요. 신(기원후 8~23)에서 제작된 화천 및 후한의 오수전(25~219)부터 원나라 지대통보(1310)까지 1300년 동안 중국에서 제작·유통된 동전이 끊임없이 쏟아졌습니다. 심지어 안남(베트남)제 동전(천복통보·天福通寶)까지 나왔습니다.

신안선은 최대 길이 약 34m, 최대 폭 약 11m, 최대 깊이 약 3.7m의 대형 선박이었다. 100명 정도가 승선할 수 있는 200t급 선박으로 해양실크로드를 대표하는 무역선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신안선은 최대 길이 약 34m, 최대 폭 약 11m, 최대 깊이 약 3.7m의 대형 선박이었다. 100명 정도가 승선할 수 있는 200t급 선박으로 해양실크로드를 대표하는 무역선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신안선에 밀수품이 존재했다?

그런데 ‘동전 800만개=밀수품’일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겁니다. 발표자는 몇 가지 사례를 듭니다. 즉 신안선이 출항하기 70여 년 전인 1250년대 남송의 관리 포회(1182~1268)가 남송 조정에 올린 장계입니다.

“일본선이 경원(공인무역항)에 도착하기 전에 (무역이 불허된) 인근 지역에 들러 동전을 공공연히 (불법) 거래 …일본인이 좋아하는 것은 동전뿐 …중국인들은 일본선이 가져오는 물건을 시가의 10분의 1로 구입 …시장의 동전이 동이 날 지경….”

또 신안선 출항 후 17년 정도 뒤인 1340년 무렵 원나라 문인 허유임(1287~1364)이 “(중국 남부 해안)에서 ‘섬나라 오랑캐(島夷·일본인)’와 빈번하게 이뤄진 (불법) 거래를 관청이 통제하지 못했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당시 중국에서 동전의 수출은 불법이었는데요. 그럼에도 동전 밀수가 끊이지 않았답니다.

이유가 있어요. 남송대에 이르러 지폐와 동전 병행정책을 펴기 시작했고요(1160년대). 게다가 금나라(1215)와 원나라(1270)가 동전 사용을 금지하고 지폐(보초와 교초) 사용을 공식화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중국에서 동전이 필요 없게 됐죠.

■밀수품은 동전 28t

그럼 일본 쪽 사정은 어떨까요. 일본에서는 683~958년까지 13종의 동전이 발행됐는데요.

동전을 주조하는 비용보다 액면 가치가 높은 화폐를 유통한 게 문제였어요. ‘주조비용<액면가치’의 차액에서 얻은 재정수입을 노린 거죠. 이렇게 동전을 찍어대니 어찌 됐겠습니까. 동전이 화폐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됐죠.

결국 일본 동전은 11세기 말이 되면 거의 유통되지 않았답니다(고은미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 교수). 그래도 경제활동에서 화폐가 없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래서 중국의 동전이 대량으로 수입·유통된 겁니다.

정리해볼까요. 중국에서 동전은 수출금지 품목이었지만 (동전이 사라진) 일본에서는 그 수요가 생겼고요.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시가의 10분의 1 가치로 일본 물품을 살 수 있었죠. 그러니 동전의 밀수출입이 성행했습니다.

그 당시 신안선이 출항한 경원은 공인된 무역항이었는데요. 따라서 경원항에서는 정상적인 물품을 싣고, 인근 지역에서는 동전과 같은 밀수품을 선적했다는 겁니다. 그것이 이번에 발표된 일본학자의 논문입니다.

■동전을 화폐로 사용?

1195년(남송 영종)에 주조한 경원통보(왼쪽)와 1068~1077년(북송 신종) 연간에 만든 희령원보(가운데), 1310~1311년(원 무종) 시대에 제작된 지대통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1195년(남송 영종)에 주조한 경원통보(왼쪽)와 1068~1077년(북송 신종) 연간에 만든 희령원보(가운데), 1310~1311년(원 무종) 시대에 제작된 지대통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신안선뿐 아니라 일본으로 (밀)수입된 동전은 어떻게 화폐로 활용됐을까요.

일본에서 출토되는 동전은 낱개가 아니라 꾸러미 단위로 묶여 있던 흔적이 역력하다는데요. 신안선에서도 66종의 다양한 동전이 꾸러미의 형태를 보이며 인양됐죠. 일본에서는 그렇게 다양한 동전의 구성비를 일정하게 맞춘 흔적이 보인답니다. 무게를 일정하게 만들어 신뢰성을 높였다는 겁니다(고은미 교수).

실제 12~15세기 일본에서 수많은 중국 동전이 시중에 유통됐다는 방증 자료가 있는데요. 13세기 승려 잇펜(一遍·1239~1289)의 생애를 그린 그림을 한번 볼까요. 사람들이 저잣거리에서 동전으로 물건을 구입하거나, 땅에 묻는 장면이 묘사돼 있습니다. 또 수입한 중국 동전을 사용한 1187년의 토지매매기록도 있어요.

■청동대불 조성용?

그러나 단순한 화폐로만 쓰이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예컨대 신안선의 동전이 ‘청동대불 조성용’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즉 일본은 헤이안 시대(794~1185)부터 동 생산량이 감소하기 시작했고요. 이에 따라 동의 생산량이 계속 낮아졌지만, 일본의 동 수요량은 늘고 있었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불교가 민중 속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던 시기였죠.

이에 따라 경통(經筒·경서와 경문을 넣는 통)과 청동대불의 주조가 대거 이뤄졌는데요.

일본의 ‘3대 대불’ 중 하나인 ‘가마쿠라 대불(鎌倉大佛)의 금속성분을 분석하자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납 성분이 19.57%에 달했는데요. 이게 의미심장한 분석입니다. 신안선에서 인양된 북송 시기의 동전 5개를 분석한 결과 납 성분이 21.13~45.40%였던 겁니다. 신안선에서 출토된 북송 시기의 동전과 가마쿠라 불상의 성분이 비슷하다는 거죠. 그렇다면 가마쿠라 대불이 바로 북송에서 수입한 동전을 녹여 조성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래서 요즘에는 수입 동전 중 일부는 화폐로, 일부는 청동대불용으로 나눠 썼다는 수정론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목포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된 자단목. 고급 가구재로 쓰이는 자단목이 선체의 밑바닥에 1017점이나 깔려 있었다. 목포해양유물전시관 제공

목포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된 자단목. 고급 가구재로 쓰이는 자단목이 선체의 밑바닥에 1017점이나 깔려 있었다. 목포해양유물전시관 제공

■명품 원목에 새겨진 부호

이번 학술대회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끈 발표문이 있었는데요. 신안선 밑바닥에 적재한 자단목(1017점)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인도나 동남아, 중국 남부가 원산지인 자단목은 박달나무처럼 단단해서 불상이나 고급 가구, 공예품의 원자재로 쓰이죠. 그런데 신안선에서 인양된 자단목마다 표면에 새겨진 한자 부호나 숫자, 혹은 아라비아 숫자가 주목을 끕니다.

한자 중에는 ‘대일(大一)’명이 51점으로 가장 많고요. 그 뒤를 ‘일정(一丁·32점)’과 ‘품(品·13점)’, ‘팔(八·10점)’ 자가 잇고 있습니다. 이외에 ‘대길(大吉)’, ‘일본(一本)’, ‘팔팔(八八)’, ‘대+십(大+十)’, ‘품(品)’명 자단목도 있습니다. 로마자를 새긴 자단목이 241점이나 됩니다. 이와 함께 ‘본(本)◈’처럼 글자와 문양이 복합적으로 표현된 명문도 보이고요. 삼각형, 원, 꽃무늬, ‘원안의 팔(八) 자와 이(二)’ 자 문양도 흥미롭습니다. 이밖에 삼각형이나 동그라미, 산(山) 모양의 문양도 독특한데요.

그동안 이러한 명문과 문양, 부호를 두고 이 자단목의 소유주나 상단을 표시한 것으로 해석했는데요.

‘세키가하라 전투 병풍’.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이 전쟁터를 가득 메우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일본 기후시 역사박물관 소장

‘세키가하라 전투 병풍’.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이 전쟁터를 가득 메우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일본 기후시 역사박물관 소장

■일본 무사 가문의 문장?

그런데 이번에 열린 학술대회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주인’이 조심스럽게 특정됐습니다. 즉 자단목에 기재된 문자와 문양 가운데 상당수가 중세 일본의 무사 및 유력 가문의 문장(紋章), 즉 가문(家紋·가문의 표지로 정한 문양)일 가능성이 짙다는 견해입니다(정순일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기존 연구에서 ‘품(品)’과 ‘클로버’, 두 겹(세 겹) 육각형 문양, 글자 이(二)에 동그라미를 친 것으로 읽었던 문양이 그렇다는 겁니다. 예컨대 ‘세 개의 비늘(三つ鱗·미쓰우로코)’ 문양은 가마쿠라 막부의 집권직을 계승하며 가마쿠라(鎌倉·1185?~1333) 시대의 지배자로 군림한 ‘호조(北條)씨’와 관련된 물품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또 ‘동그라미에 두 줄 그은 문양(丸に二つ引き·마루니 후타쓰히키)’ 역시 가마쿠라 시대의 무사 가문인 ‘아시카가(足利)씨’와의 연관성이 제기됐습니다. 이 밖에도 신안선 적재 화물을 포장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름모, 세 개의 별(동그라미), ‘대길(大吉)’ 등 나무상자 겉면의 문양 또한 일본 열도의 특정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됐습니다(정순일 교수).

신안 보물선이 발견된 전남 신안 증도(시루섬) 앞바다. 1975년 8월 20일 이 해역에서 조업 중이던 어부(최형근씨)의 그물에 청자꽃병을 비롯한 중국제 도자기 6점이 걸린 게 계기가 됐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신안 보물선이 발견된 전남 신안 증도(시루섬) 앞바다. 1975년 8월 20일 이 해역에서 조업 중이던 어부(최형근씨)의 그물에 청자꽃병을 비롯한 중국제 도자기 6점이 걸린 게 계기가 됐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이 밖에도 자단목의 ‘괭이밥(片餐·가타바미)’ 문양은 일본 여러 무사 가문의 문장으로 쓰이고 있더군요.

그래서 제가 ‘가문(家紋·かもん)’을 검색해보았는데요. 예부터 스스로의 가계, 혈통, 집안,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표시했답니다. 일본에선 현재 241종류 5116문 정도의 개별 가문이 있다고 합니다. 무사 시대에 들어 펼쳐진 크고 작은 전쟁에서 피아를 구별하기 위해 사용했답니다. 제가 이 논문이 분석한 자단목의 문양과 일본 지식백과 등에 등장하는 무사 가문의 문장을 비교해보았는데요. 비슷한 문양이 제법 있더라고요. 흥미로운 문제 제기여서 향후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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