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문제는 문해력이 아니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2023.03.06

우연히 대한민국 대통령실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대통령의 말과 글’이란 메뉴가 있다. 이곳에 올라온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과 연설문을 읽다 보면 ‘한국에서 말과 글의 기능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하게 된다. 대통령은 분명 말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의미가 담긴 언어적 표현이라기보다 물리적 소리와 문자의 무의미한 연쇄에 가깝다. 이건 그저 대통령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일정 시간을 채우기 위해 말을 하고, 정해진 지면을 채우기 위해 글을 쓰지만, 아무런 의미도 전달하지 않는 언어 사용자가 많다. 교장 선생님 훈화, 주례사, 기관 홈페이지의 대표 인사말, 학술대회 개회사, 정치인의 연설, 저명인사의 신문 칼럼 등 비슷한 사례는 여기저기에 널렸다. ‘어쩌고저쩌고’나 ‘중얼중얼’로 대체해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은 말과 글을 듣거나 읽다 보면 리터러시(literacy)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리터러시의 의미

흔히 문해력으로 번역하는 리터러시는 단순히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다. 유네스코는 텍스트나 디지털 정보를 식별하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창조하고 소통하는 능력(스킬) 일반을 리터러시로 정의한다. 즉 글을 쓰고 정보를 생산하는 활동 역시 리터러시의 핵심이다. 개인의 이해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 유의미하려면, 애초에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문해력은 리터러시의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은 리터러시의 핵심 구성 요소지만, 결코 전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의 문해력 논의는 대부분 ‘요즘 애들’에 대한 한탄으로 시작한다. 물론 ‘사흘’을 4일로 이해하고 ‘심심한 사과’를 따분하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황당한 일이지만, 과연 이게 리터러시의 가장 중요한 문제일까? 포털사이트에서 문해력을 검색해보라. 문해력 사교육 광고가 첫 페이지를 도배한다. 리터러시를 문해력으로 축소하고, 문해력을 다시 어휘 이해력 정도로 간주하며, 이걸 사교육 상품으로 가공하는 경향 자체가 한국의 리터러시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 아닐까?

리터러시는 일차적으로 개인의 능력을 의미하지만, 이 능력은 말, 글, 지식, 정보 일반을 생산하는 사회적 시스템의 일부분이다. 리터러시의 문제를 다루려면 이 시스템 전체를 봐야 한다.

일단 교육 과정을 보자. 입시 교육을 비판하며 “학교는 지식 전달이 아니라 인성 교육에 집중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지식 전달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기초 교육 과정의 유일한 목적은 대입이고, 대학 교육의 목적은 취업이다. 시험에 대비한 훈련 과정만 존재할 뿐, 지식 전달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교육 과정이 없다. 대학원에 간 뒤에야 시험 대비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한국의 석·박사 이수율은 OECD 평균보다 매우 낮다. 더구나 한국의 대학원이 과연 지식 그 자체를 다루는 곳이라 말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런 교육 시스템은 당연히 텍스트를 이해하고 쓰는 능력을 길러주지 못한다. 수능 국어영역이나 법학적성시험 따위는 텍스트 독해력을 요구하지만, 이런 종류의 시험이 리터러시 강화에 얼마나 기여할지는 불분명하다. 주어진 텍스트를 읽고 문제를 푸는 능력,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텍스트를 능동적으로 찾아서 이해하고 재가공하는 능력은 다르기 때문이다. 대입이나 취업 논술시험을 준비하는 것만으로 텍스트 작성 능력이 길러지지도 않는다. 글쓰기를 잘하려면 무엇보다 쓰고 싶은 욕망이 있어야 하고, 구조화된 논변의 형식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들어 있어야 한다.

리터러시의 무용함

사회적 수준에서 리터러시 강화가 필요한 이유는 대략 두 가지다. 첫째는 개인의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서, 둘째는 시민과 시민이 합리적 언어로 소통하기 위해서다.

한국에서는 첫 번째 이유가 그다지 절실하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교육 과정 전체가 시험을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교육 과정을 마치고 실무에 투입된 이들은 큰 혼란을 겪게 된다. 타인과 언어로 소통하는 방법을 제대로 교육받은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실무 현장에서 이런 교육이 충분히 제공되지도 않는다.

시민과 시민의 합리적 소통에 관한 사회적 요구도 강하지 않다. 합리적 소통이란 타당한 근거에 따라 말과 글을 생산하고 전달하는 활동이다. 하지만 공적 공간에서 근거의 타당성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소수다. 자기주장의 전제와 논리 구조를 아무리 자세히 설명해봐야 ‘그래서 결론이 뭐야?’ 혹은 ‘당신은 어느 편이야?’라는 반응이 돌아오기 일쑤다. 다수가 집중하는 것은 논리와 근거가 아니라 말을 하고 글을 쓰는 행위가 가져올 실질적 이익과 불이익이다.

대통령실 홈페이지에 올라온 대통령의 발언을 보자. 그중 상당수는 말하려는 바의 핵심을 알 수 없다. 누군가는 대통령의 지적 능력을 탓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무의미한 소리를 늘어놓는 인물도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발언의 내용보다 어디에서 누가 누구를 향해 발언했는지가 더 중요하다. 한국의 유권자는 정치인의 리터러시를 대의 민주주의의 결정적 요소로 간주하지 않는다.

한국 문화의 특징 중 하나는 리터러시와 지식에 대한 무관심이다. 한국의 대졸자 비율은 70%에 육박하지만, 독자는 정확한 글이 아니라 쉽게 읽히는 글을 선호한다. 언론사는 ‘중학교 2학년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글’을 기사 작성의 기준으로 삼는다. 정부기관은 시민과 소통하기 위해 형식화된 텍스트가 아니라 알록달록한 시각적 이미지를 만든다.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콘텐츠 상품으로 유통되지만, 정작 고급 지식을 생산하는 인력과 시스템은 너무나 부족하다. 이쯤 되면 허약한 리터러시와 지식 생산 시스템으로도 유지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 모두의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

지금 진지하게 고심해야 할 문제는 사회·정치적 삶에서 말과 글이 차지하는 지위가 무엇인지다. 언어적 소통 능력 강화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 언어 사용 환경을 반성적으로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당연한 소리지만, 말과 글을 소홀히 대하는 사회가 제대로 유지되기는 어렵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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