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경제정책과 중도의 지혜

서중해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
2023.01.30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3월 <노예의 길>이 영국 런던에서 출판됐다. 이 책은 그해 9월에 미국에서 출판됐고, 이듬해 4월에는 세계적 잡지 ‘리더스다이제스트’에 축약돼 소개됐다. 40대 중반의 오스트리아 출신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계기가 됐다. 책은 ‘계획경제는 정부에 권력이 집중돼 개인의 자유가 희생되는 노예의 길을 열 것’이라는 충격적인 경고를 담고 있다.

이 책은 발간 즉시 논쟁을 불렀다. 상당수 지식인은 부정적인 비판을 보냈다. 그런데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노예의 길>을 위대한 책이라고 상찬하는 편지를 하이에크에게 보냈다. “우리가 말해야 할 바를 그토록 훌륭하게 서술한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책 속에 있는 모든 경제적 의견을 수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본인은 거의 모든 것에 동의합니다. 동의뿐만 아니라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케인스는 책의 한계를 지적하는 비판을 이어갔다. 자유시장과 계획경제를 이분법으로 나눠 중간이 없는 접근으로는 현실의 경제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지적이었다.

케인스와 하이에크는 경제사상에서 정부의 역할을 두고 한 치의 양보 없이 대립했지만, 사적으로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이에크가 런던의 공습을 피해 케임브리지로 왔을 때 케인스는 하이에크가 사용할 사무실을 주선해줬다. 영국학술원 회원으로 하이에크를 추천한 것도 케인스였다. 케인스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둘은 인간적으로는 아주 잘 지내지만, 그의 경제이론은 ‘쓰레기’라고 표현했다. 하이에크는 경제학에 대한 케인스의 영향이 ‘기적이면서도 비극’이라고 평가했다. 당초 하이에크가 런던정경대로 오게 된 것도 케인스 경제학에 대한 그의 비판이 계기였다. 하이에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케인스 혁명이 전개되는 동안 외로운 방관자였지만 케인스 경제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는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하이에크와 케인스의 존중과 대립

경제사상의 흐름을 보수와 진보로 크게 구분하면, 하이에크는 보수 진영에서도 더욱 우파에 속한다. 그는 인플레이션을 근본적으로 방지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독점하는 화폐 발행을 민간에게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환지폐(지폐) 체제에서 국가는 과도한 화폐공급으로 필요한 자금(전쟁비용 등)을 쉽게 조달할 수 있는데, 그 피해가 모두 시민에게 돌아간다고 했다. 무정부주의를 보수 극우라고 한다면, 그의 경제사상은 극우까지는 가지 않지만,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지점에서 극우에 이웃한다(정작 하이에크는 자신을 보수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다. 국가권력을 등에 업고 변화에 저항하는 보수주의는 진정한 보수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진보와 보수를 대표하는 두 경제학자는 사상적으로 대립했지만 인간적으로는 서로를 존중했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동시대의 위대한 철학자들인 비트겐슈타인과 카를 포퍼는 사상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서로 적대적이었다. 경제학자들은 철학자들보다 현실적이어서 그랬을까.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경제학자 하이에크(사진 왼쪽). 영국의 대표적인 경제학자 케인스. /경향신문 자료사진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경제학자 하이에크(사진 왼쪽). 영국의 대표적인 경제학자 케인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하이에크 경제학의 핵심 주제는 경제시스템에서 지식·정보의 문제다. 경제란 무한대로 많은 정보를 처리해 사회적으로 최적의 결과를 산출하는 복잡한 시스템이다. 시장경제는 중앙의 관리 없이도 자발적인 질서를 형성한다. 가격시스템이 정보 처리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때문이다.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하이에크가 한 강연의 제목이 ‘가정된 지식(The pretense of knowledge)’이었다. 물리학과 같은 자연과학과 달리 경제학자가 다루는 숫자는, 즉 정보는 측정 가능한 정보만을 제공한다. 이들 정보는 경제시스템의 진정한 작동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많은 경제학자가 이들 숫자가 진정한 경제 관계를 나타낸다고 가정하고, 나아가 정책을 특히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 정책을 제시한다고 하이에크는 비판했다.

컴퓨터로 모든 가능한 데이터를 수집해 초고성능의 슈퍼컴퓨터를 사용하면 중앙 집중의 정보 처리가 가능한데, 그러면 계획경제도 가능하지 않을까. 계획경제를 실행할 계산이 가능하려면 컴퓨터의 속도가 무한대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물리적 한계가 존재한다. 더 근본적인 사안은 가격이라는 정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무한처리 능력의 슈퍼컴퓨터조차 무용지물이 된다는 점이다. 1930년대의 대공황, 1997년의 아시아 외환위기, 2008년의 세계금융위기, 최근의 코로나19 팬데믹 같은 극한의 경제 상황에서는 경제계산에 필요한 정보가 생성되지 않는다. 이런 극한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경제시스템 작동은 데이터로 드러나지 않는 미지의 영역을 남긴다. 이러한 상황을 케인스는 경제시스템에 내재하는 근본적 불확실성으로 표현했다. 케인스가 간파한 경제시스템의 불확실성은 계산의 영역을 떠나 있다.

경제체제의 근본 문제에 대해서 케인스와 하이에크는 용어는 다르지만 인식을 같이한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두 경제학자는 완전히 갈라선다. 케인스는 인간의 판단력과 이성적 사고의 힘을 믿었다. 선별된 엘리트 집단이 제한된 지식으로도 자유방임 상황보다 더 우월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정보가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투자를 결정하는 기업가나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 지도자들의 판단력을 높게 평가했다. 하이에크는 반대의 경우를 보았다. 정치 지도자들의 잘못된 판단과 이를 지지했던 군중은 전체주의의 길로 들어섰다. 히틀러 같은 파시스트들이나 공산주의 체제의 등장은 모두 개인의 자유를 희생한 대가였다. 불황과 같은 어려운 경제문제는 시장 기능으로 회복할 수 있도록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확실한 세계경제, 현실적 처방은 

오늘날 세계경제는 많은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후유증으로 인플레이션이 세계경제를 엄습한 가운데 글로벌 공급망 문제와 에너지위기, 기후변화 등으로 올해 세계경제 전망은 밝지 않다. 이 상황을 극복하려면 민간과 정부 모두의 비상한 노력이 필요하다. 경제학은 어찌 됐든 현실에 대한 처방을 제공해야 한다. 케인스가 지적한 중도의 지혜가 절실하다. 언제나 올바른 처방을 내릴 수는 없다. 오류 가능성은 늘 있다. 하이에크의 경제사상이 과학과 비과학의 구분은 오류 가능성 여부라고 한 카를 포퍼의 과학철학과 만나는 지점이다. 하이에크는 포퍼를 노벨문학상 후보로 여러 차례 추천했다. 앙리 베르그손이나 버트런드 러셀과 같은 철학자가 노벨문학상에 선정된 전례가 있어서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추천은 실현되지 않았다.

<서중해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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