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게이를 데려와 놓고 우리보고 좋아해 달라니 말이 안 되잖아.” 닉은 찰리와 만나고 있지만, 친구들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로 우선 소개부터 했다. 닉의 친구들은 찰리를 기껍게 여기지 않았다. 찰리는 일찍 자리를 떠났다. “말해봐. 찰리의 어디가 불만이야?” 화난 닉은 친구들에게 물었고, 저 말이 답변으로 돌아왔다. “찰리가 게이라 문제라는 거군.” 닉이 확인한다. 친구들 사이에서 게이 혐오 분위기를 주도하는 해리가 답한다. “이러지 마. 닉. 여기에 동성애 혐오자는 없어.”
1994년생 영국 작가 앨리스 오스먼이 2016년 연재를 시작한 만화 <하트스토퍼>의 한장면이다. 영국에서는 이미 2010년에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해당하는 평등법이 발효됐으니, 작가도 찰리와 닉도 성소수자 차별을 금하는 사회 속에서 10대를 보냈다. 그런데도 저런 동성애 혐오를 왜 그렸을까? 차별금지법으로는 부족한 걸까?
사실을 살피자면, 부족했던 게 맞다. 법만으로 사회와 개인이 단번에 바뀌지는 않는다. 10만명 이상을 대상으로 한 2018년 조사에서 영국 성소수자의 3분의 2가 차별을 염려해 공공장소에서 동성연인과 손을 잡지 않는다고 답했다. 40%는 언어폭력 및 물리적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고등학교에서 게이임이 아우팅된 찰리도 힘든 경험을 했다. 찰리를 만나고서 바이섹슈얼로 자신을 정체화한 닉은 이제 혐오와 차별을 더 피부 깊숙이 느낀다.
<하트스토퍼> 곳곳에서는 차별금지법 이후의 사회가 그 이전의 사회, 곧 한국의 지금과는 다르다는 것도 드러난다. 앞선 장면만 해도 그렇다. 혐오 발언의 말풍선이 덮어버렸던 세 친구는 이후 닉을 찾아와 사과한다. “미안해. 우리가 해리에게 그만하라고 말렸어야 했어.” 시간이 지난 후 해리도 찰리에게 사과한다. 이들이 잘못을 깨닫는 과정이 그려지지는 않지만 그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혐오를 자유롭게 발언하게 두고 잘못을 깨닫지도 못하게 하는 우리 사회에는 없는, 차별금지법과 그것이 만든 사회적 분위기다.
<하트스토퍼>는 차별금지법 이후의 세계에서 동성 간 사랑이 어떤 모습일지 차분히 알려준다. 그 세계에서는 성소수자가 연애한다는 사실을 주변에 공표하고 친구와 가족의 축복과 응원을 받으며 사랑할 수 있다. ‘만화로 본 세상’ 칼럼에서 다룬 한국 작품의 성소수자들은 가족의 반대에 부딪히거나(<환절기>), 아예 고백하기를 포기하거나(<각자의 디데이>), 정말 소수의 친구에게만 자신의 연애를 알릴 수 있었다(<모두에게 완자가>·<남남> 등). <하트스토퍼>의 세계에서는 찰리와 닉뿐 아니라 트랜스젠더 여성도, 레즈비언 커플도 친구들의 축복 속에 만남을 이어간다. 가족도 “네가 행복하다니 나도 행복하구나”, “엄마에게 말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느끼게 만든 적이 있다면 미안해”라고 말한다. 어려움도 남았지만, 지지가 더 크다. 이런 사회가 그저 왔을 리 없다.
법이 제정되더라도 성소수자들은 여전히 힘들 것이다. 하지만 숨지 않을 수 있고, 사회의 지지와 응원을 느낄 수 있다. 혐오와 차별을 일삼던 이들도 법과 사회의 압력 아래 변할지 모른다. 이런 삶이, 이런 사랑이 가능한 사회가 가까이 있다. 입법을 미루고 미루는 이들에 의해 지연되고 있을 뿐이다. 더 이상 미루지 않길, 나도 더 이상 이런 글을 쓰지 않아도 되길, 마음 다해 바란다.
<조익상 만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