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력-평범하고도 비범한 여성들의 능력

조경숙 만화평론가
2021.07.19

‘여자력(女子力)’은 일본에서 통용되는 단어로, 여자로서 자신을 꾸밀 줄 아는 능력 등을 뜻한다. SNS에 번역돼 공유되는 ‘여자력 테스트’에는 ‘손톱이 예쁘다’, ‘1만원 이상의 좋은 샴푸를 쓴다’, ‘요리가 특기’와 같은 문항들이 포함돼 있다. 반대로 ‘여자력이 없는 테스트’에는 노브라로 외출한다거나 입술이 건조하고, 무뚝뚝한 표정을 짓는다는 항목이 빼곡히 쓰여 있다. 특정한 성향을 여성 고유의 성품으로 치환한다는 점에서 ‘여자력’은 성차별적 혐의를 지닌 용어다.

<여자력>(AJS, 골왕&자룡, 고사리박사, 김이랑, 뼈와피와살 지음) / 문학동네

<여자력>(AJS, 골왕&자룡, 고사리박사, 김이랑, 뼈와피와살 지음) / 문학동네

그러나 최근 출간된 <여자력(女自力)>은 이 단어를 통째로 뒤집어엎는다. 다섯명의 여성 창작자가 그려낸 단편 만화집 <여자력>은 ‘초능력자’를 주제로 한 다섯편의 단편만화를 실었다. 이 작품들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키워드를 통해 ‘여자력’이 가진 성차별적 관념을 반박한다.

첫 번째는 ‘흑백’이다. 여자력은 네일아트, 미소, 패션 감각 등 채색된 아름다움을 강요하지만, 이 만화는 의도적으로 흑백을 고집한다. 흑백만화라 하더라도 최소한 표지에서만큼은 컬러를 쓰는 데도 불구하고, 이 만화는 의도적으로 표지와 일러스트, 굿즈에서까지 캐릭터들을 흑백으로만 그렸다. 무채색의 세계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그 누구도 고전적 아름다움을 재현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두 번째는 ‘능력’이다. <여자력(女自力)>은 ‘여자력(女子力)’의 한자를 다르게 쓰면서 여성이 가진 그 자신의 힘을 강조한다. 다섯개의 작품 모두에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퍽 대단한 능력을 갖춘 건 아니다. <함안군 가야리 땅문서 실종사건>의 ‘무엇이든 찾아드립니다 사무소’ 과장은 의뢰인들에게 그들이 미처 떠올리지 못하는 기억을 다시 되짚을 수 있게 돕는다. ‘모사랑’은 이 능력을 통해 할머니가 자신에게 전해주려 한 땅문서의 위치를 되찾고, 나아가 할머니의 장례식에 다시 한 번 참석할 수 있게 된다.

<조용한 세상의 미소>에서 ‘미소’가 가진 초능력은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살아남기에 하등 쓸모없어 보이지만, 능력을 통해 ‘승아’를 구해낸다.

초능력을 가진 캐릭터들이 능력을 통해 마주하는 건 바로 ‘나’다. 여기에 마지막 카운터어택이 숨어 있다. 이들은 각자 나름의 걸출한 능력이 있지만, 오로지 그것에만 기대 문제를 해결하는 건 아니다. 능력을 이해하는 다른 이와 만나고 마음속에 솟아난 용기를 마주할 때, 이 모든 것이 퍼즐처럼 조각을 이뤄 캐릭터들은 새로운 나의 모습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야사>의 ‘무위’가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던 악몽의 정체를 밝히고, <바람이 불면>의 ‘이선형’이 비로소 문밖으로 나오며, <죽음으로부터>의 ‘다야’와 ‘루비’가 오래된 오해를 풀고 함께 새로운 시야를 여는 것처럼. ‘여자력’이 손톱/식성/취향 등으로 분절된 ‘나’에 집중할 때, <여자력>은 관계의 확장을 통해 통합된 ‘나’를 마주하자고 제안한다.

<여자력>은 책 자체로도 의미가 크지만, 이 작품에 참여한 작가들 모두 이전부터 유의미한 여성서사를 시도해오고 있었다는 점에서 기획의 묘를 더한다. <여자력>을 읽고 나서 참여한 작가들의 작품도 한 번씩 찾아보기를 권한다. 하나같이 여성의 이름을 다시 쓰는 걸출한 수작이다.

<조경숙 만화평론가>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매체별 인기뉴스]

      • 경향신문
      • 스포츠경향
      • 주간경향
      • 레이디경향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