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설동 골목엔 레트로와 보물이 있다

김천 자유기고가
2021.03.15

신설동은 우리말로 새말이다. 숭신방이란 지명을 신설계라 고친 후 갑오개혁 이후 신설동으로 불린다. 당시에는 한양이 확장돼 새로 들어선 신도시였다. 서울은 이후에 더 커져 동쪽 방면의 길들은 대부분 신설동을 거쳐 동대문을 통해 시내로 이어진다. 안암동 방향의 북쪽으로 향한 길과 청량리, 장안동을 거쳐 송파구로 이어진 도로가 만나는 신설동오거리는 늘 차가 막히는 교통의 병목이다. 지나치는 차량은 많지만, 어제의 새 마을은 오늘의 헌 마을이 됐다. 신설동의 골목 대부분은 고색을 입고 있다.

신설동 골목은 오래된 풍경이 남아 있다.

신설동 골목은 오래된 풍경이 남아 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신설동역과 2호선 신설동역 주변부는 큰길가에 새로 세운 오피스텔과 상업용 빌딩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수십년 전과 비교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큰길에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일제강점기에 지은 개량한옥들이 밀집된 미로를 만날 수 있다. 서울에서 흔치 않은 과거의 섬이다.

서울서 흔치 않은 과거의 섬

한옥 사이로 비좁은 골목은 그다지 길지 않아도 방향을 잃을 만큼 충분히 복잡했다. 어떤 집은 지은 지 100년은 돼 보인다. 수시로 고친 흔적은 집 전면에 얼룩처럼 남아 있다. 어떤 때는 회벽으로 미장을 했고, 그 옆 벽은 타일을 붙였다. 사이사이 벽돌로 쌓아올린 곳도 있다. 한집에 어느 곳은 시멘트로 그 옆은 타일로 붙인 모습도 보인다. 햇빛 대부분을 담과 담이 막고 서서 골목은 어둡고 냉랭한 느낌을 전한다. 게다가 한낮에도 행인을 볼 수 없었다. 그런 골목도 요즘엔 일부러 찾아오는 도시 유람객이 있다고 한다. 골목 입구엔 제법 큰 게스트하우스도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문을 닫은 상태라는데, 건물 벽엔 청사초롱을 든 아이들이 세상을 향해 웃음을 짓고 있다.

길가 쪽 한옥들은 공장과 가게, 또는 식당으로 아직도 건재하다. 신설동에 한옥들이 살아남아 있는 것은 이 지역 대부분이 획지 개발이라는 규제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기존 건물의 절반까지만 개발 가능해 신축은 엄두를 내기 어려운 곳이다.

대규모 개발이 비켜간 모습이다.

대규모 개발이 비켜간 모습이다.

나무로 지은 한옥들은 손을 많이 탄다. 지붕의 흙도 때때로 갈아주고 기와도 새로 얹어야 한다. 그런 성가심이 있어야 제 모양과 기능을 유지하는 까탈스러운 건축물이다. 요즘에는 시에서 등록을 받아 보수공사를 지원하는 사업도 벌이고 있다. 유독 눈에 띄는 한옥 한채가 있다. 한옥을 그대로 두고 위로 새 건물을 지어 올려 조화를 맞춘 집이다. 한옥의 뜰과 지붕선을 살려두고 양옥을 비켜 얹어 기능과 효율을 살렸다. 한옥을 현대식으로 뜯어고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재건축방식이라 상도 받은 건물이라고 한다.

골목길을 걷다 보면 공장과 창고들을 자주 보게 된다. 신설동은 동대문, 창신동, 용두동, 성수동으로 이어지는 동대문 밖 봉제 의류산업 사슬의 중요한 고리역할을 하고 있다. 원단 창고들이 신설동 골목골목에 자리 잡고 있어 주문에 따라 동대문과 창신동 봉제공장으로 물건을 실어나른다. 단추, 호크, 레이스 등을 취급하는 부자재 업체와 창고들도 곳곳에 있다. 길 건너 동묘 쪽은 가방과 신발 등 피혁창고가 많고, 신설동 쪽은 청바지와 봉제 의류 원단이 눈에 띈다. 신설동에서 청계천 쪽 건물 하나는 아예 의류 부자재 상가가 차지하고 있다. 때때로 아주 오래된 봉제 가공업체도 있는데, ‘큐큐, 나나이치’ 등 아리송한 현장 용어가 간판으로 붙어 있다. 뭐냐고 묻자 주인은 단춧구멍 가공 공장이란다. 동대문에서 팔리는 옷들은 대개 신설동 원단 창고에서 나와 이리저리 떠돌면서 하나씩 모양을 갖추고 물을 들여가며 장식을 붙여 완성된다. 이곳에서 옷의 여행이 시작된다.

일제강점기의 개량한옥 골목

일제강점기의 개량한옥 골목

의류 관련 창고뿐 아니라 철공소와 철재를 취급하는 업체도 골목마다 자리를 잡고 있다. 얼마나 됐냐고 묻자 종업원은 “한 50년 됐다”는 답을 들려준다. 이곳에서 실어낸 철재들은 용두동과 성수동 쪽 공장들로 간다고 한다. 그는 “예전엔 왕십리 쪽도 주물공장 철공소들이 많아 밤낮없이 공장이 돌아갔다. 지금은 명맥이나 유지하고 있다”며 분위기를 전했다.

신설동 골목의 집들과 공장들이 오래된 만큼 그 사이에서 살아남은 식당들은 대부분 평판이 높다. 한옥 한채를 차지한 추어탕집은 그중 인기 있는 곳이다. 쇠솥에 끓여나온 남원식 추어탕에 산초가루를 듬뿍 뿌려 부추김치를 곁들여 먹으면 시든 육신도 생기를 되찾을 만하다. 밤엔 추어튀김을 곁들인 술판도 자주 벌어진다. 그 아래 돌로 지은 집의 설렁탕도 근처 공장 노동자들의 단골집이다.

코로나 시대 노점 풍경

일제강점기인 1928년 신설동엔 경마장이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까지 이곳에선 말들이 달리고 모던한 경마꾼들이 한탕을 꿈꾸던 곳이다. 한국전쟁통에는 경마장이 비행장으로 바뀌어 소위 ‘에르나인틴(L-19)’이라 부르던 미군 정찰기들이 뜨고 내렸다. 전쟁 이후 경마장은 뚝섬으로 옮겼고, 그 터엔 학교와 공원 그리고 집들이 들어섰다. 지금의 동대문도서관과 우산각공원이 경마장 자리였다.

서울풍물시장이 신설동의 주인공이 됐다.

서울풍물시장이 신설동의 주인공이 됐다.

우산각공원 옆에는 신설동 인근 주민들의 원성을 사는 마사회 동대문지점 건물이 버티고 있다. 경마가 열리는 날 이곳에서는 화상중계를 통해 경마에 몰입하는 꾼들이 몰려든다. 질주하는 말들을 닮아서인지 마권 한장에 행운을 비는 이들은 늘 소란스럽고 거칠다. 요즘 코로나 19 덕분에 경마장 문은 닫혔고, 주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날이 풀리자 우산각공원 주변에는 경마장에서 본듯한 행색의 중늙은이들이 두셋씩 모여 종이컵에 든 커피를 홀짝거리며 심각한 대화를 하고 있다. 대충 어느 오락실의 기계가 잘 터진다던가, 수십년 전에 놓친 최고배당 경마의 정경을 소상히 얘기하고 있었다. 귀 기울여 듣는 이들은 때때로 탄성을 지르거나 짧은 신음을 뱉으며 놓쳐버린 행운을 반추하고 있다.

아직 쌀쌀한 날씨에도 풍물시장 주변 골목엔 앉은뱅이 좌판을 깐 노점들이 간간이 보였다. 그중 한 사내는 시계를 팔고 있다. “이게 감쪽같아 감정사들도 답이 안 나온다고 한다. 이런 건 무조건 사야 한다”며 목청을 높이는데 소위 짝퉁 시계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손님은 냉담하다. 아무래도 신통치 않아 보였는지 옆의 사내와 하다만 대화를 이어갔다. “청량리는 왜 안 보여?”, “지방 갔대”, “왜?”, “물건 나온 거 보러 간다던데…” 그들은 사람을 성씨나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동네 이름으로 불렀다.

골목 깊숙이 관록 있는 맛집들도 숨어 있다.

골목 깊숙이 관록 있는 맛집들도 숨어 있다.

오토바이 타고 가던 사내가 멈추자 다른 이가 다가가 말을 건넸다. “시계 하나 잡아가”, “있던 것들도 다 팔았는데 뭘 잡아”, “1만원만 주고 가” 사내는 시계를 눈에 붙이고 이리저리 살피다가 용두를 돌려본다. “이거 맛이 가기 직전이야.” 좌판 구경뿐 아니라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도 심심치 않게 재미있다.

요즘 이 골목의 주인은 풍물시장이다. 청계천 개발을 하면서 황학동 일대를 정비하려고 그곳에 있던 난장을 동대문운동장으로 옮겼다가 이곳에 말끔한 건물을 지어주었다. 예전 숭인여자중학교가 있던 곳이다. 건물은 구역으로 나누어 골동품과 구제 옷, 생활잡화와 장식품 등을 팔고 있다. 한쪽으로 막걸리와 국밥을 파는 식당가도 있고, 서울의 옛 골목 분위기를 재현한 전시관도 있다. 전시관 옆 이발관은 60년대식으로 꾸몄는데 실제 손님을 받아 머리를 깎고 있었다.

검정고시 학원부터 봉제공장까지

풍물시장 옆 우산각공원에는 게이트볼 경기장이 있다. 인조잔디에 내린 햇살이 조금 따듯해진 듯 노인들이 패를 짜고 경기를 한다. 목청껏 번호를 외치고 긴 채를 휘둘러 공을 쳐낸다. 어딜 봐도 고물이 된 노인들 같진 않아 보였다. 사람은 자기 앞에 놓인 시간을 쓰는 방식에 따라 늙어도 새로워지고, 젊어도 낡은 채 살아간다.

신설동 교차로는 한때 검정고시 학원이 둘러싸고 있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수도학원을 비롯해 고려학원 등이 신설동의 주인인 양 성곽처럼 교차로 주변을 에워쌌다. 그 시절 그렇게 많은 검정고시 학원이 필요했던 것은 시대의 사정과 주변 환경의 영향이 컸다. 60년대부터 지방에서 일자리를 찾고 기술을 배우러 서울로 올라온 이들이 겨우 자리 잡은 곳은 청계천 일대의 크고 작은 철공장이거나 동대문 봉제공장이다. 노동으로 지쳤어도 공부를 하려는 이들은 신설동 일대의 검정고시 학원을 찾았다. 일하고 밤에는 글을 배워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를 대신했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신설동을 오가며 노동과 학업을 했던 이들의 역할은 경제성장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지만,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번영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주목하지 않아도 국가나 재벌보다 그들의 헌신과 노고가 더 컸을 수 있다. 신설동에 아직도 남아 있는 한옥골목과 노인과 고물상들은 그들의 시대를 보여준다. 신설동 골목엔 고물이 변한 레트로와 보물이 있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kyunghyang.com>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매체별 인기뉴스]

      • 경향신문
      • 스포츠경향
      • 주간경향
      • 레이디경향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