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동 골목-지금은 사라진 달동네의 희미한 그림자

김천 자유기고가
2021.02.08

매봉산과 대현산, 응봉산은 모두 서울 성동구 금호동을 감싸고 있는 산이다. 매봉산 능선의 서쪽으로 북악까지 서울 강북의 대부분이 내려다보이고, 남쪽으로 한강과 그 건너 강남 일대가 한눈에 보인다. 금호동은 산과 비탈을 깔고 앉은 동네이다.

1990년대 인기 드라마 「서울의 달」 무대가 금호동 골목이다.

1990년대 인기 드라마 「서울의 달」 무대가 금호동 골목이다.

금호동의 옛 이름은 무수말이고, 무쇠 마을이란 뜻이거나 물가 마을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한자로는 수철리(水鐵里)인데 그 또한 비슷한 뜻이다. 금호동의 남쪽 기슭이 한강과 연이어 있고, 한때 대장간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지금의 금호동은 다리 건너 강남이 가까우며 지척에 서울 시내가 있어 꽤 매력적인 주거지로 주목받는다. 그런 입지에 힘입어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금호동의 주인이 됐다. 아파트가 있는 자리는 대개 블록집들이 어지럽던 비탈진 마을이었다. 금호동은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 중 한곳이었는데, 지금 그 자취는 찾아보기 어렵다.

예전 모습 그대로 간직한 골목도

금호동 재개발 사업은 하늘과 가까운 구역부터 진행됐다. 덕분에 능선을 따라 전망 좋은 위치는 모두 아파트단지 차지가 됐다. 금남시장을 중심으로 가파른 골목은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60년 동안 자리를 옮기지 않고 있다는 골목 안 부동산업체 주인은 “이 동네는 하나도 안 변했다. 건너편 산자락에는 무허가 집들이 많았지만, 이쪽으로는 예전에도 기와집이 많았다. 골목도 집들도 별로 변한 게 없다”고 했다.

골목 안엔 군데군데 공영재개발에 대한 안내문이 붙어 있다. 그러나 수십년 동안 재개발로 골목골목 사람들의 마음과 욕심이 쑥대밭이 된 터라 골목마다 재개발 추진에 대한 벽보가 붙어 있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다. 재개발이 되긴 하냐는 질문에 한 주민은 “작년에 한바탕 난리를 쳤는데 별 진전이 없다. 올 3월이 지나서야 결론 난다는 소리는 들었다. 가망성은 없어 보인다”고 했다. 주민들 분위기도 하자는 쪽과 말자는 편이 반반이라고 했다. 일이 없어서 부동산에 놀러 와 하루를 보낸다는 한 주민은 “공공 재개발 쪽으로 추진한다는 데 돼야 하는 것 아니겠냐”고 했다. 그는 목포에서 일을 찾아 서울로 와서 금호동에 눌러앉은 지 5년이 됐다는데, 요즘이야말로 최악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비탈에 채소밭이 대부분이었던 금호동에 사람들이 몰려든 것은 해방 직후의 일이다. 일제에 징용으로 끌려가 전쟁 재난을 입었던 사람들이 돌아와 정착했던 전재민 마을이 금호동에 있었다. 백범 김구 선생은 당시 서울 시내 곳곳에 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모친과 장남 장례식에 들어온 조의금을 기부했는데, 1949년에 그 일부로 금호동 전재민 마을에 그들을 위한 주택과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백범학원을 지었다고 한다. 김구 선생이 어렵고 힘든 동포를 아꼈던 마음이 전해진다. 아마도 금남시장 근처 골목 안에 집과 학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택과 학교는 한국전쟁 중에 사라졌고 지금은 낡은 사진과 금호동 길가 기념비 속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다.

40년 된 서점은 금호동의 명소이다.

40년 된 서점은 금호동의 명소이다.

금남시장 뒤편 골목 안 주민쉼터 벽에는 금호동의 오래전 사진들이 붙어 있다. 산비탈을 가득 메운 판잣집과 길과 집과 개천이 얼기설기 뒤엉킨 모습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1990년대 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드라마 <서울의 달>은 금호동과 옥수동 달동네가 무대였다. 드라마 속 좁은 골목과 구멍가게들, 단칸방에 세 들어 살던 이들의 이야기는 지금 보아도 슬프고 재미있다. 사라진 것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 유튜브에 올려 둔 <서울의 달>은 조회수가 많다. 집들은 달라졌고 사람들의 삶은 변했지만, 일과 밥과 꿈을 찾아 헤매는 모습은 지금이나 그때나 같기 때문일 것이다. 주민쉼터 벽에 기대서 담배를 피우던 중년의 사내는 “이 골목에 살던 사람들은 다 그대로다. 위쪽에 아파트 들어서면서 떠난 사람들 말고 여기 사람들은 그대로 머물러 살고 있다”고 했다.

버스정류소에서 골목으로 이어지는 샛골목마다 낮에 굳게 문을 닫은 주점이 야릇한 간판을 내걸고 있고, 여인숙을 닮은 낡은 여관들엔 ‘달방 있습니다’라는 푯말을 붙여 놓았다. 아무래도 골목 주점과 여관의 모습은 <서울의 달> 속 모습 그대로인 듯싶다.

비탈길은 모두 아파트단지로 이어진다.

비탈길은 모두 아파트단지로 이어진다.

현재도 드라마 <서울의 달> 속 모습

금호동엔 아주 오래된 동네 서점이 남아 있다. 도원문고. 주인장은 “서점 문을 연 지 올해 딱 40주년이 됐다”고 한다. 상가 건물 안 지하에 자리 잡은 책방은 크지는 않았지만, 구색은 갖추고 있고 계산대 옆엔 나름 시류에 맞는 책들이 꽂혀 있다. 학생 하나가 급히 들어와 참고서를 집어 들어 계산을 마치고 바삐 나갔다. 연초라 그런 듯 토정비결과 일력 그리고 수많은 참고서가 서점을 점령하고 있다. 책방 하느라 집 여러채 날려 먹었다는 주인은 “동네서점은 청소년들이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전초기지다.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 그 이상”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것이 이문도 박한 서점을 40년째 운영하는 이유라고 했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전국에 수천개 있던 서점들이 이제는 800에서 1000곳 정도만 남아 있다고 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론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곳 말고도 금호동 비탈진 골목엔 별난 서점 하나가 숨어 있다. 클래식 책방이란 이름의 서점은 ‘여성의 이야기가 고전이 되는 책방’이란 깃발을 내걸었다. 페미니즘 전문 서점이라는데 뜨문뜨문 문을 연다. 주말서점이라고 하나 대부분 일요일에, 그것도 오후 잠깐 문을 열 뿐이다. 주인은 평일에는 직장생활하고 일요일 오후에나 나와 문을 열고 일을 본다.

금호동 골목길엔 구역을 따라 동호로길 또는 독서당길, 금호산길과 무수막길 등의 이름이 붙어 있다. 그중 독서당길은 금호동을 관통하는 큰길이다. 세종대왕이 신하들이 경치 구경으로 머리도 식히면서 책을 읽으라는 뜻으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을 지었다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금호동에서 강남을 바라보는 풍광은 손에 꼽을 만큼 아름답다. 독서당 건물은 사라졌어도 길 위에 그 이름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금호동의 옛모습은 주민쉼터 벽에 오래된 사진으로 붙어 있다.

금호동의 옛모습은 주민쉼터 벽에 오래된 사진으로 붙어 있다.

금호동 사람들이 움직이는 중심지는 지하철 3호선 금호역과 5호선 신금호역이다. 역을 나서면 비탈 위 아파트단지로 이어지는 마을버스가 줄지어 서 있다. 대부분의 마을버스는 역에서 출발해 단지마다 사람을 내려주고 다시 태워 역으로 돌아온다. 역을 중심으로 중소규모 마트들도 있어 장을 보고 바로 귀가할 수 있다. 시간에 여유가 있는 이들은 독서당길을 잠시 걸어 내려와 금남시장으로 향한다.

금남시장이 있는 금호삼거리 일대는 그야말로 금호동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금호삼거리 근처에 병원과 학원, 마트와 상가들이 몰려 있다. 김이 솟는 만두와 찐빵 가게, 옷가게와 미용실도 수십년의 관록을 자랑한다. 금남시장에서 익숙하게 동태를 토막 치는 노인은 나이 80이 다 됐단다. 그는 50년 가까이 시장 길목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등은 굽었지만 눈빛은 아직 매섭고 칼을 다루는 손길은 녹슬지 않았다.

금남시장은 1949년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전재민 마을이 들어설 때 시장도 함께 문을 연 것이다. 당시 장사하던 이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그들의 다음다음 세대가 전을 열고 있다. 만둣집 할머니는 솥을 쌓으면서 “시장 규모가 예전보다 반의반이 줄어들었다”고 했다.

금남시장도 대부분 전통시장의 운명처럼 기울어 가는 모습을 감추기 어려웠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에 그 기울기가 더 가팔라지고 버티기 힘들어진 모습이 역력하다. 큰길 가 가게들은 그나마 행인의 발길을 붙잡아 두지만, 시장 안 가게들은 대부분 한가했다. 그나마 아파트로 이어진 길목 반찬가게들은 활짝 문을 열어두었다. 반찬가게 주인은 “젊은 층에 맞는 반찬 만들어 내놓고, 전보다 싼 값으로 판다. 장 봐 가는 사람보다 그냥 만들어 놓은 반찬을 사가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했다.

금남시장은 금호동의 오래된 역사이다.

금남시장은 금호동의 오래된 역사이다.

손님 따라 가게 주인들도 연령대가 낮아졌다. 시장 안에는 젊은 취향의 가게들도 많아졌다. 간식 가게 주인은 배달통을 들고 나서며 “이제는 배달 앱으로 주문도 받고 배달도 한다. 이 사태가 좀 더 계속되면 아무도 못 버틸 것”이라고 했다. 그는 문을 닫자니 살길이 없고 문을 열면 적자는 계속 쌓여 막막하다는 심사를 털어놓는다. 기름집 주인은 더 격하게 말을 보탰다. “사람들은 층층이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다. 바닥에선 이렇게 비명을 지르는데 저 위층에선 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다. 세상이 벽처럼 느껴지고 오늘 하루는 또 어찌 버텨야 할지 캄캄하다”는 것이다. 금남시장 뒷길엔 ‘행복길 사랑길 골목길’이란 문구가 붙어 있으나 사랑도 먹을거리가 있어야 하고 궁핍 끝에 행복이 있을 리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출장 채비를 하는 수도 설비 업체 사장을 보며 시장 상인이 “저 사람만 요즘 신이 났다”고 했다. 금호동이 지대가 높고 노후한 주택들이 많아 요즘 같은 추위에 수도가 얼어붙는 집이 많기 때문이란다. 오토바이에 장비를 챙기면서 사내는 “돈 벌어서 좋긴 하지만 수도가 얼면 마음이 짠하다”고 했다. 메뚜기도 한철이라 겨울 지나 봄이 걱정이라고 했다. 그를 거들던 중년의 사내는 “하도급 공사 일을 주로 하는데 요즘 관공서에서 나오는 일은 모두 끊겼다. 코로나19 때문인지 아무 발주도 나오지 않는다. 작년 한 해가 그랬는데, 올해는 또 어떨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뱉는다. 이 골목 안 사람들의 마음도 얼어붙고 시름은 깊어간다.

이름에는 지나간 시절의 사연이 남아 있다. 독서당이 있었거나, 대장장이들의 마을이었거나, 물가에 살던 이들의 터전이었던 흔적은 금호동이란 이름에 깃들어 있다. 다만 그것들은 지금 찾아보기 어렵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발자국이 구부러진 골목에 남아 있다. 사람들이 지나간 자취가 길에 남으니 이 마을 골목의 좁고 어지러운 모습에서 지금은 사라진 서울 달동네의 희미한 그림자를 엿볼 따름이다. 오늘 우리가 걷는 행로가 또 다른 길을 만들 것이다. 질병으로 어렵고 힘겨운 시절에 오늘은 또 어떤 걸음을 내디딜 것인지, 그 걸음이 어떻게 앞길을 만들어 갈 것인지 금호동에 푯말로 남은 백범주택이나 학교의 흔적에서 실마리를 찾게 된다. 금호동 골목길은 여러모로 흥미롭고 곡절이 많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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