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동-한때 강북에서 알아주던 ‘불타는 화양리’

김천 자유기고가
2021.01.25

서울 광진구 화양동은 서울 동부의 거점지역이다. 화양동이란 공식적인 이름을 따로 두고 사람들은 아직도 그 마을을 화양리라 부른다. 한때 강북에서 좀 놀아본 사람이라면 ‘불타는 화양리’의 기억이 있을 터이다. 폭주족 오토바이들의 집결지기도 했고, 화양극장에서 보던 동시상영 영화를 추억으로 간직한 이도 있다. 그러나 지금 화양리는 고요하다.

광진구 화양동은 서울 동부지역의 대표적인 유흥가 골목이다.

광진구 화양동은 서울 동부지역의 대표적인 유흥가 골목이다.

화양리(華陽理)란 지명은 ‘볕 들고 꽃 피는 곳’이란 뜻이 담겨 있다. 세종대왕이 왕실 목장이 있던 이 일대에 정자를 짓고 ‘화양정(華陽亭)’이라 했다 하여 지명의 유래가 됐다는 설이 있다. 화양정은 조선이 사라질 때쯤에 벼락을 맞아 불탔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화양리가 단종의 귀양과도 연관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요즘 애들’ 취향과 유행 보여줘

역사적인 사실을 뒤로 두고 오늘의 화양동 골목길은 1970년대에 만들어졌다. 1967년 서울의 택지공급을 위해 토지구획정리 사업지구로 화양동 일대가 지정됐다. 70년대 초부터 집장사들이 골목골목 같은 크기 같은 모양으로 집을 지었다. 그때 생겨났던 반듯한 골목길을 따라 대부분 비슷한 모양의 집들이 들어섰다.

화양동 일대에서 젊은 유행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화양동 일대에서 젊은 유행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화양동은 서울의 유흥가 중 젊은이들의 거점이라서 골목 안 가게들은 온통 먹고 마시고 노는 곳들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흥청망청한 기세는 꺾였지만, 역에서 가까운 골목길은 여전히 밝고 젊은이들의 발길은 그치질 않는다. 곳곳에 문을 닫은 집도 보이나 오히려 개업 화환이 줄 서 있는 가게도 있다.

화양초등학교 뒷골목은 요즘 젊은이의 취향과 유행이 어떤 것인지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식당 메뉴와 카페의 인테리어, 노래방의 인기곡 목록에서 가게 업종까지 대부분은 20대 초반 젊은이들의 정서를 담고 있다. 젊은이 상대로 장사를 하려면 반드시 화양동 상권을 분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지금은 말끔하고 깨끗이 번했지만, 이곳은 20여년 전만 해도 골목골목 붉은 등이 켜진 집창촌으로 유명했다. 지금 그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골목 입구에서 열심히 가게 안내 전단을 나눠주는 호객꾼도 있다. 그가 전하는 것은 신장개업 주점 안내장. 안쓰럽게도 대부분은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바삐 지나쳤다. 잘 맞추면 최신 휴대폰을 준다는 실내 사격장 종업원도 몇 안 되는 행인을 간절히 바라보고 있다. 인터넷으로 소문난 가게 앞에서 인증사진만 찍고 돌아가는 젊은 연인도 볼 수 있다. 시절은 확실히 얼어붙은 모습이다. 모이지 말라는 말을 모두가 지키는 것은 아니어도, 조심하는 태도는 유흥가 골목에서도 확실했다.

화양제일시장이 화양동의 대표적인 시장골목이다.

화양제일시장이 화양동의 대표적인 시장골목이다.

물끄러미 골목을 쳐다보는 고깃집 주인에게 “어때요?” 묻자 “죽겠어요”라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다시 동네 분위기를 물어보니 “지난해까지는 곱창집과 무한리필 고깃집, 수제맥줏집들은 그런대로 장사가 됐다. 지금은 가게 문 열기가 무섭다. 누구는 집세 깎아준다는 소리도 들리는데 이 건물 주인은 어림도 없다. 대부분 건물주는 월세 내릴 생각을 눈곱만큼도 하지 않는다. 도대체 앞이 안 보인다”고 한탄했다.

화양동 골목이 생긴 것은 50년이 됐지만, 그 위의 집들과 사람들의 삶은 송두리째 변했다. 부동산 업자의 말에 따르면 “대략 20년 터울로 바뀐 것 같다. 처음엔 대부분 단독주택이었는데, 이층집으로 바뀌는 데 20년 정도 걸렸고, 그다음부터 다세대에 다가구들로 바뀌었다. 골목 안 대부분은 아직도 다가구 주택들이고, 2000년대부터 더 높은 건물들이 들어섰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화양동 골목은 지금까지 대략 3번쯤 꼴을 바꾼 셈이다.

강남에 밀리지 않는 고급빌라 가격

역에서 가까운 골목길이 온통 유흥가 일색인 데 비해 한걸음만 더 들어가면 대부분 보통의 주택가가 이어진다. 유흥가와 경계를 두고 있는 곳에는 온통 ‘소음 금지, 흡연 금지’ 경고판이 붙어 있다. 장을 봐가던 노인은 “술 먹고 노래 부르고 난리 치고 싸우고 아주 시끄러워 죽겠는데, 요즘엔 좀 조용하다”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화양동 골목은 다양한 세대와 계층이 공존하는 곳이다.

화양동 골목은 다양한 세대와 계층이 공존하는 곳이다.

오래된 주택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빵집과 세탁소, 치킨집과 호프집들이 낡은 간판을 이고 줄을 섰다. 복덕방은 다양한 가격대의 물건으로 손님을 끌고 있었다. 복덕방 주인은 “여기는 방들이 다양하다. 대학생들을 위한 아주 싼 방도 있고, 직장인에 맞춘 풀옵션 원룸 투룸도 있다. 비싼 고급빌라는 가격대가 강남에 밀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서울 다른 지역에 비해 월세가 낮은 편이라고 한다.

아주 오래된 집들은 칸칸이 방을 들여 대학생들에게 세를 놓는데 학생들은 대부분 1년 단위로 계약을 한단다. 형편이 나은 집들은 개축해 다가구주택으로 바꿨단다. 나름 역세권에 근처에 뚝섬 한강공원도 있는데도 대규모 재개발은 비켜 지나갔고 대형 아파트단지도 찾아볼 수 없다.

팬더믹 사태로 유흥가 골목은 활기를 잃었다.

팬더믹 사태로 유흥가 골목은 활기를 잃었다.

이층집 철 대문에 방마다 사는 이들의 이름을 붙여놓은 명패가 눈에 띈다. 지층에 방이 4개, 1층에 3개, 옥탑에 방 1개가 있다. 2층은 주인집이다. 한눈에도 나이 든 이의 필체였지만 방마다 거주인의 이름을 꼼꼼히 써서 붙여둔 모양이 인상 깊다. 어느 집은 우편함의 방 번호가 명패를 대신하고 있다. 1층이라 이름 붙인 지층엔 방이 3개, 2층에만 방 8개가 있고, 3층 7개. 이층집 한집에 모두 20개 가까운 가구가 살고 있다. 이곳엔 집주인이 살지 않고 모두 세를 놓고 있다. 대부분 1인 가구거나 학생들의 하숙방으로 짐작되는데, 다닥다닥 붙은 문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역 가까운 곳, 자기 짐을 두고 몸을 눕힐 방 한칸을 빌릴 수 있으니 형편이 나은 편이라 믿어야 한다.

주택가 골목 깊은 곳에 가정식 백반집도 보이고 반찬가게도 있다. 학생들이거나 직장인들이 저 가게에서 찬을 사 와 한끼 끼니를 해결할 것이다. 동전빨래방이 곳곳에 있고, 중고 가전과 가구 가게도 눈에 띈다. 화양동 골목의 한 구역은 온통 홀로 사는 이들을 위한 시설들이 몰려 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골목 하나는 시장이 자리 잡고 있다. 화양 제일 전통시장 골목. 한 구역을 지나치는 골목길이라 아주 길지는 않지만, 골목 양옆으로 가게들은 겹치는 물건 없이 다양하기 전을 벌리고 있다. 반찬가게에서 어물전과 정육점, 꽃집과 과일가게뿐 아니라 찐빵과 만두를 파는 가게도 있다. 시장 골목 어귀엔 양말을 잔뜩 실은 트럭이 싼 가격으로 행인을 부르고 있다. 시장 골목 옆엔 슈퍼마켓도 눈에 띈다. 역시 1인용 상품을 다양하게 갖추고 있고, 반찬가게에서 흰쌀밥을 1인분씩 담아 파는 모습에서 동네 사정을 엿볼 수 있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형태의 집들이 골목을 채우고 있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형태의 집들이 골목을 채우고 있다.

지금은 지명이 사라진 모진동

골목에 버린 헌 가구를 정리하던 주민은 이 동네 터줏대감이라며 “아버지가 화양리에 자리를 잡고 쌀집을 오래 했다. 20년 전에 돌아가시면서 가게를 접었는데, 그때 외상장부 공책이 다섯권이 나왔다. 돈 없어도 밥은 먹으라고 쌀을 내주셨는데 나중에라도 쌀값 가져온 사람은 하나도 없다”며 웃었다. 그때랑 지금이랑은 동네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다. 주민 모두가 서민이라 집안 사정을 미뤄 짐작하며 한 골목에서 오래도록 얼굴을 마주 대하고 살던 시절은 지났다. 길어야 한두 해, 짧으면 몇 달 만에라도 살 곳을 옮겨 다녀야 한다. 게다가 화양동 주민 대부분은 자기 집 한채 없이 방 한칸을 얻어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는 중에도 부동산 업자와 함께 집을 보러 다니는 젊은이들을 간혹 볼 수 있었다. 얼핏 들리는 대화는 “전세 대출을 받을 수 있나?” “전세 보증은 들어 줄 수 있나?” 등이다. 이 동네는 이사철이 따로 없다는 것이 동네 주민의 이야기였다.

골목길이 북쪽으로 향할수록 최근에 지은 대형 빌라들이 눈에 띈다. 필로티 구조로 집을 지으면 5층까지 올릴 수 있도록 규제가 풀려 2000년대 이후 짓는 집들은 모두 그렇게 짓는다고 한다. 어떤 곳은 고급 주택의 꼴을 하고 있지만, 어떤 집은 위로 쌓아올린 원룸의 형태였다.

화양동 일대의 골목길에 꽤 다양한 계층이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대학생들의 하숙촌 분위기부터 신혼부부의 비둘기집, 한쪽으론 어린이집과 놀이터를 볼 수 있고, 아이를 앞세워 걷는 젊은 부모들의 모습도 보인다.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고 골목 안을 치우는 노년의 집주인들도 골목의 주인공이다. 가장 어려운 시절을 견뎌냈고 혼돈 속에서 버텨 화양동 골목에 자기 문패를 걸어 남기는 데 성공했다. 한때 중국인들이 모여들어 대림동 분위기가 났던 때도 있었다는데 지금은 별다른 흔적이 남지 않았다. 이곳이야말로 서울의 골목 중 가장 다양한 연령대가 공존하는 공간이 아닌가 싶다.

골목 안을 부지런히 배달 오토바이들이 오간다. 오토바이에서 내리는 배달부에게 요즘 배달이 늘지 않았냐고 묻자 “이 동네는 학생들이 많이 빠져서 예전보다 오히려 줄어들었다. 사람들이 지갑이 말랐는지 별로 많이 시키지 않는다”고 답한다. 모두가 어려움을 견뎌야 하는 시절이다.

화양동 일대는 본디 화양동과 모진동이 있었는데, 모진동은 흡수돼 이름이 사라졌다. 모진동이란 이름의 유래도 여러 설이 있지만, 대충은 모진 사람들이 살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화양동을 떠올리면 한자는 다르지만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성어와 영화가 생각난다. 아마도 일생에서 가장 아름답게 사랑하는 빛나는 순간을 뜻하는 말이다. 화양동 골목을 걷는 이들은 모두 마음속 화양연화를 가졌거나 닥쳐올 좋은 날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정말 힘든 시절이라 모두가 모질고도 모질게 살아남아 다시 볕 들고 꽃피는 따듯한 봄날을 만나야 한다. 이 겨울이 지나면 화양동 골목에 또다시 꽃피는 시절이 닥치리라 믿는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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