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

박형남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2021.01.18

공직선거법상 선거재판 결과에 따라 당선인 신분 상실, 공직 취임 제한 등 신분상 불이익이 부가되고 선거결과가 무효로 된다. 선거재판에서 유·무죄와 양형은 매우 중요한 이유다. 각종 선거가 끝나면 후보자들은 꼬투리라도 잡아 상대방을 고소·고발하고, 검찰은 공소시효 기간(6월)에 수사하고 기소 여부를 결정하기에 바쁘다. 법원은 선거전담 재판부를 두어 법정처리 기간 1년 내에 마무리하려 노력한다. 2020년 7월 대법원은 유력정치인 사건에서, 공직후보자 토론회에서 발언은 선거인의 정확한 판단을 그르칠 정도로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한 것이 아니라면 다소 과장되었거나 다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을 때 허위사실공표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미주알고주알 고소·고발 ‘정치의 범죄화’

민주화에 따라 형성된 1987년 헌정체제에서 정치권력이 수시로 교체되고 헌법재판소가 활성화되면서, 정치·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나 갈등이 정치과정에서 해결되지 못하고 재판을 거쳐 결정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조금만 생각하면 과거청산, 대통령 탄핵 여부, 신행정수도 건설 법률의 위헌, 간통죄 위헌, 존엄사 허용, 국가보안법 폐지 여부, 양심적 병역거부가 떠오른다. 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정치의 사법화’라고 부르면서 그 원인을 다양하게 설명한다. 민주화 이후 위헌법률심사제도가 정착되고 사법부의 독립이 강화됐다. 정치권의 분열로 국회가 효과적인 정책결정에 실패하거나 정치적 결정에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졌다. 헌법규범이 생활화되고 시민이 기본권을 지키려는 의식이 확산됐다. 시민사회와 공익단체가 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해 공익소송을 내는 일이 늘어났다. 우리나라에서는 치열한 선거운동이나 입법과정에서 발생한 소소한 것까지 미주알고주알 폭로하고 고소·고발전을 벌이면서 ‘정치의 범죄화’까지 증가했다.

정치의 사법화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대의제 민주주의와 실질적 법치주의를 채택한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종래 힘의 논리에 의해 막후에서 비공식적 방법으로 해결되던 정치적 사안이 민주주의 과정에서 공개적으로 논의되고, 정치과정을 통해 해결되지 못한 사안이 사법부 판단영역으로 넘어오는 것이다. 서구 선진국에서는 사법부가 재판을 통해 인종차별 종식, 여성의 낙태권과 소수자 보호, 공립학교에서 종교교육과 이민정책 등을 결정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떤 학자는 공론장에서 정치적으로 해결돼야 할 쟁점이 사법적으로 해소돼 삼권분립의 견제와 균형 원리가 위협받는다고 비판한다. 선거로 선출되지 않아 ‘민주적 정당성’이 없는 사법부가 국가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해서 의회주의를 위협하고 민주주의를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다른 학자는 선거절차의 결함과 의회의 분열로 인해 정치적 결정과 입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정치의 사법화는 민주주의에 필요하고 바람직하다고 반박한다. 입법권의 남용을 억제하고 권력자의 초법적 행위에 대처해서 민주주의를 다지고 실질적 법치주의를 구현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정당이나 국회 등 정치권이 적절한 결정을 하지 않았거나 사법부에 책임을 떠넘긴 측면이 많다고 본다. 결론이 올바른지에 대한 논쟁은 많으나, 사법권이 국민주권과 정치권력을 무시하거나 뛰어넘었다는 평가는 소수다. 시민에게는 ‘누가’ 결정했는지보다 ‘어떤’ 결정인지가 더 중요하다. 오히려 폭로·고소·고발 로 벌어진 형사사건에서 판사가 법적 판단으로 결론을 내면, 극도로 편향된 생각과 정치적 이념에 따라 판결을 불신하거나 찬양하는 ‘한국형’ 정치의 사법화가 더 큰 문제가 아닐까.

‘누가’ 보다 ‘어떤’ 결정인지가 더 중요

정치의 사법화는 역으로 정치권력이 사법부 판단을 유도하려 하거나 재판이 정치적 쟁점으로 비화하는 ‘사법의 정치화’를 초래한다. 정치의 사법화가 일상화되면 재판에 대한 정치권과 시민의 관심도 커질 수밖에 없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은 다양한 방법으로 재판에 대해 압력을 넣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우리나라 정치가 양극화 현상을 보일수록 팬덤 현상을 보이는 시민은 지지하는 세력의 정치적 입장에 우호적으로 결론이 나면 ‘명판결’, ‘소신판사’라고 추켜세우고, 반대 경우 판사에 대한 출신지나 친인척, 사생활에 대해 신상털기에 나선다. 사회·정치적 분열행태와 수사과정에서 공정성 시비가 그대로 법원을 흔든다. 어떤 판사는 부적절한 언행이나 판결 이유로 정치적 편견을 드러내서 정치적 논란과 시비의 중심에 서기도 한다. 이런 현상이 증폭되면 법치주의와 사법부의 신뢰는 위기를 맞는다.

정치의 사법화는 기본적으로 사법의 독립이 보장되는 곳에서 문제가 되므로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는 민주주의와 사법시스템이 발전하면 어느 정도 일어날 수밖에 없다. 원칙적으로 정치·사회적 갈등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사법부는 이를 촉진하고 보완하는 역할에 그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판사는 힘의 논리나 수의 다과를 의식하지 않고 치밀한 논증과 수사로 정치권과 시민을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바로 그 점에서 정치와 사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판사는 일상생활에서나 재판에서나 정치적으로 행동하지 않아야 한다. 정치인에게 때로 요구되는 부정직성과 당파성, 냉혹성을 판사가 보여주는 경우, 정치권은 사법의 민주적 정당성 부족을 문제 삼고 언론은 더 세게 비난할 것이다.

글 첫머리에 언급한 사건에서 대법원은 선거과정에서 고소·고발이 이어지고 수사권이 개입되면 선거결과가 검찰과 법원의 사법적 판단에 좌우돼 민주주의 이념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토론회 공방과정에서 금지(법적 규제)의 척도가 낮아질 경우 토론회 질이 낮아지고 유권자 관심이 떨어져 선거의 공정을 훼손한다고 반박하는 소수의견도 있다. 이 판결은 새로운 법리를 이끌어내려고 법원이 지향하는 목적을 드러낸 점에서 이례적이다. 앞으로 그 잣대가 정파를 가리지 않고 모든 후보자에게 적용된다면 불공정 논란은 사라질 것이다. 법원이 정치적 권한을 스스로 억제한 것은 한국형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다만 다른 사람 눈에 티는 보면서 자기 눈에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공직후보자들의 발언에서 옥석을 구분하는 일은 유권자 몫으로 남게 됐다.

<박형남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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