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소박한 겉모습에 담긴 고집스러운 ‘진심’

김도환 브랜드 디렉터·㈜도빗 이사
2020.09.07

이안 감독의 영화 <색, 계>에서 필자가 최고로 꼽는 명장면이 있다. 1940년대 중국 내 급진파 항일단체가 친일파 핵심 인물인 정보기관장 이모청(양조위 분)을 암살하는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을 위해 왕자즈(탕웨이 분)는 신분을 속이고 이모청에게 접근한 지 3년 만에 신임을 얻는다. 마침내 암살 준비를 마친 당일, 이모청은 왕자즈에게 6캐럿짜리 분홍색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면서 “보석 따위엔 관심 없지만 그걸 낀 여자의 손가락이 보고 싶다”며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이솝 매장에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 이솝코리아

이솝 매장에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 이솝코리아

왕자즈는 큰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채 밖으로 나가면 누군가 노릴 것이라는 생각에 반지를 빼려 한다. 그때 이모청은 “그대로 끼고 있어”라고 말한 뒤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지켜주겠소.” 그 순간, 암살을 계획했던 왕자즈의 마음은 흔들린다. 변심한 왕자즈가 이모청에게 도망가라고 말한 덕분에 그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무사히 목숨을 구한다. 3년 이상을 계획한 암살자의 마음이 흔들린 이유는 6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 때문이 아니라 ‘지켜주겠다’는 진심 때문이었다.

이름뿐인 ‘자연주의’에 대한 거부

브랜드를 브랜드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진심이다. 사실 예전부터 지금까지 브랜드란 소비자의 마음을 얻기 위한 전략으로 여겨져 왔다. 브랜드 전문가들은 광고와 마케팅, 디자인 등의 요소들을 통해 진심을 표현하는 것도 하나의 전략으로 다룬다. 하지만 훌륭한 브랜드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진심은 하나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지 전략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1987년 호주에서 설립된 미용 제품 브랜드 ‘이솝(Aesop)’은 소비자에게 한결같은 진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창업자 데니스 파피티스는 이발소를 운영하는 부친의 영향을 받아 1980년대 중반 멜버른에서 작은 미용실을 열었다.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그에겐 한 가지 불만이 있었다. 시중에서 판매하고 있는 대부분의 모발용 제품에 화학물질이 잔뜩 들어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건강한 헤어스타일을 완성하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제품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화학에 대한 사전 지식은 없었지만, 그는 미국과 호주를 오가며 자신의 마음에 드는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을 다했다. ‘1회분 생산량에 포함된 방부제 수치는 0에 가까워야 한다’는 원칙을 세워 최고의 품질을 추구했다. 화학물질과 유기농 재료를 여러 방법으로 섞어가며 최상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실험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그는 최초로 천연 오일을 첨가한 헤어 염색제를 개발했다. 이후 재료·원료에 관한 과학적인 연구 방식에 매료된 그는 건강한 헤어스타일에 필요한 제품을 중점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고, 1996년부터는 얼굴과 몸 등 피부 전체를 관리하는 제품까지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이솝의 제품 개발 정책에 대해 ‘자연주의를 표방한 유기농 제품’이라는 인식도 자리 잡았지만 정작 창립자 파피티스는 오히려 ‘자연주의’라는 용어가 진실을 왜곡한다고 주장한다. 식물성 재료가 들어갔다고 해서 완전히 천연성분으로만 제품을 만든다는 잘못된 인상을 줘선 안 된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반드시 효능과 안전성이 입증된 성분만을 사용한다는 원칙을 강조한다. 실제로 이솝의 모든 제품은 무방부제를 기본으로, 다양한 식물성 성분을 함유해 최상의 효과를 끌어내기 위해 애쓴다. 즉 천연성분의 효능을 극대화해 폭넓게 활용하는 방침을 고집하고는 있지만, 이를 판매를 위한 전략으로 이용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이솝의 고집은 포장 디자인이나 마케팅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솝에겐 포장 디자인이란 개념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미용 브랜드가 화려하고 세련된 그래픽을 가미한 포장 디자인에 미사여구로 점철된 홍보문구를 넣어 소비자를 유혹하지만, 이솝은 정반대다. 그들은 별다른 디자인 요소 없이 브랜드와 제품 이름, 성분명과 사용법만을 꾸밈없이 제품에 표기한다. 자외선으로부터 내용물을 보호하기 위한 갈색 유리병을 거의 모든 제품군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나, 2012년부터는 종이 쇼핑백 대신 천 소재의 에코백에 담아 제공한다는 점만이 이들의 포장에서 드러나는 고유한 개성이다.

인근에 서점·꽃집이 있어야 매장 개점

또 이솝은 어떠한 상업용 광고도 진행하지 않는다. 창업 25주년을 맞았을 때를 보면 그들은 자사 홈페이지에 파일 하나만 업로드했다. 바로 이솝이 세워진 1987년부터 25년 동안 매년 출판된 도서 중 꼭 읽어야 할 책과 함께 각국의 추천 서점 25곳을 선정한 목록이었다. 이러한 행보에 대해 파피티스는 한 인터뷰에서 “고객이 책을 읽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행복을 느낀다면 고객의 피부도 좋아질 것이라 생각한다”면서 그들이 지니고 있는 진심을 전하는 소박한 커뮤니케이션을 진행했다.

그 대신 이솝이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 초점을 맞추는 지점이 하나 있다. 바로 자사 매장의 공간 디자인이다. 특히 이탈리아 출신의 영화감독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루카 구아다니노와 협업해 만든 로마 매장은 독보적이다. 거친 돌과 장밋빛 대리석, 짚묶음 등 다채로운 재료를 활용해 고대 로마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한편, 제품이 돋보일 수 있도록 채광과 조명도 고려해 현대적인 요소를 반영한 공간도 함께 연출했다. 어느 도시에서나 그 도시의 문화와 철학을 기반으로 매장을 설계하는데, 인근에 서점과 꽃집이 있어야 매장을 열 수 있다는 원칙과 맞물려 서울에서는 한남동의 한 쇼핑몰에 매장을 차렸다.

이들의 고집스러운 진심이 느껴지는 사례를 전하며 글을 맺을까 한다. 필자가 직접 겪은 일이다. 처음 창업을 한 사무실 한쪽에 따로 작은 서점을 하나 열었을 때 손님용 화장실에 두기 위해 이솝의 손 세정제를 사뒀다. 그리고 세정제를 끼울 수 있는 전용 금속 거치대도 함께 구입하고자 매장에 문의했다. 그런데 매장 직원은 본사에 전화하라고 했고, 본사에 전화하니 사무실 건물의 내·외관 사진을 찍어달라는 의아한 요청을 했다. 이후 이솝 글로벌 본사에서 최종 승인을 해야 전용 금속 거치대를 판매할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그때 느꼈다. 자신들의 진심을 알리기 위해 소비자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작은 요소 하나까지 꼼꼼히 따지는 고집과 원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 어떤 행보를 보여왔는지도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김도환 브랜드 디렉터·㈜도빗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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