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이걸 사면 나를 어떻게 만들까’에 답하다

김도환 브랜드 디렉터·㈜도빗 이사
2020.08.24

영국의 비평가이자 소설가인 존 버거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사람은 사물을 결코 한 가지 시각에서만 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시각은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시각 안에 들어온 사물을 훑어보면서, 동시에 사회 속 자신의 위치도 가늠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볼 수 있게 되자마자 타인도 우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버거는 타인의 시선과 우리의 시선이 결합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가시적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게 된다고 덧붙였다.

서울 강남구에 있는 더콘란샵 매장에 다양한 생활용품이 진열돼 있다. / 더콘란샵

서울 강남구에 있는 더콘란샵 매장에 다양한 생활용품이 진열돼 있다. / 더콘란샵

다소 투박한 표현이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오늘날의 과시적 소비를 반영하는 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특히 각종 소셜미디어(SNS)가 발달하면서 과시적 소비는 더욱 크게 주목받고 있다. 우리는 여행을 가서 고급 호텔에 숙박하거나 현지 유명한 맛집에 들르면 어김없이 자신의 SNS에 게시한다. 또는 비싸거나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한정판 상품을 구매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일기처럼 일상을 기록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지인들에게 자신이 그런 값비싼 소비를 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고 과시하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과시적 소비가 오늘날의 브랜드란 개념을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가 된 면도 있다. 과거의 마케팅이 제품의 독특한 특징이나 기능 등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면, 현재는 소비자가 제품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이끌어내는 것이 표준적인 마케팅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비슷비슷한 상품과 서비스가 넘쳐나는 시장에서 소비자는 사양을 꼼꼼히 비교해 따지며 장점을 찾기보다는 집단적인 정체성을 고려해 구매하게 된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머리에 호소하면 사람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할 수 있지만, 마음에 호소하면 사람들을 당장 움직일 수 있다”고 플라톤에게 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지점이다.

가구를 바라보는 소비자의 관점 변화

‘더콘란샵(The Conran Shop)’은 이처럼 ‘내가 이걸 사면, 이것은 나를 어떻게 만들어줄까?’라는 소비자의 물음을 잘 이끌어낸 브랜드로 꼽힌다. 더콘란샵은 영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이자 실내장식 전문업체 ‘해비타트’의 창립자인 테렌스 콘란이 1973년 런던에 처음으로 문을 연 가구·생활용품 편집매장이다. 프랑스 파리와 일본 도쿄 등에 이어 세계에서 12번째로 세워진 매장이 2019년 11월 서울에도 개점했다.

더콘란샵이 국내에도 개점한 배경엔 가구를 바라보는 소비자의 관점 변화가 한몫했다. 소비자는 과거와 달리 과시적 소비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가구가 생활을 풍요롭게 도와주는 도구이자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촉매제로 바라본다. 비싼 가구를 사서 사치하는 자신을 뽐내는 대신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드러낼 수 있는 질 좋은 제품을 사는 쪽으로 변한 것이다. 소비자들은 ‘제품=나’라는 정체성을 이끌어내는 요소의 하나로 가구나 실내장식 제품을 선택하고 시장 또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이에 발맞춰 자연스럽게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케아, 자라 홈 등 해외의 유명 편집매장들이 이미 국내에 앞다투어 진출했고, 다른 브랜드들 또한 지속해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만 봐도 쉽게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그런데 더콘란샵은 다른 가구, 생활용품 편집매장과는 전혀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생활용품부터 어린이용 제품, 패션 잡화, 미용 관련 제품 등 다양한 범주의 제품을 취급하고 있다. 모든 매장은 편안하게 구경하고 이동할 수 있게 동선을 설계했고, 전문적인 직원이 손님을 동반하며 맞춤형 구매를 제안하기도 한다. 또한 이들이 내세우고 있는 고급 편집매장이란 인식을 뒷받침하기 위해 알바 알토, 르 코르뷔지에, 미스 판 데어 로에 등 세계적인 디자인 거장들의 작품을 위시한 260여개 고급 브랜드 제품도 한 자리에 모았다.

그러나 더콘란샵이 더욱 비범하게 보이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들은 단순히 비싸고 좋은 제품만 선별하지 않는다. 창립자 테렌스 콘란은 자신의 취향을 바탕으로 자신도 원할 만한 제품을 큐레이팅해 소비자들에게 다른 방식의 삶을 제안해왔다. 더콘란샵에 앞서 콘란이 1964년 창립한 해비타트를 보면 알 수 있다. 해비타트는 가난한 학생들이나 젊은 독립생활자들이 처음 집을 꾸밀 때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생활용품들을 판매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콘란은 이때도 철저히 자신이 원하는 제품만을 만들어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선별해 추천했다.

과시보다는 자기 정체성 중시하는 소비

특히 콘란은 소비자들이 견본으로 삼을 수 있도록 자신의 집을 카탈로그에 직접 싣기도 했다. 그가 펴낸 생활문화 잡지 <하우스 북>에서도 소비자가 기대하는 집안 모습의 한 예시로 유명 디자이너의 가구가 다른 평범한 가구들과 자연스럽게 조화된 거실 사진을 선보였다. 단순한 구매를 넘어 소비자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이들의 전략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제품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이끌어내게 하는 마케팅을 40년 전부터 이미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콘란은 해비타트에 이어 더콘란샵에서도 자신의 취향에 따라 철저히 제품을 선별했지만, 소비자의 취향에 따라 변화를 줄 수 있는 여지도 만들어두었다. 다시 말하면 취향에 대한 결정권을 소비자의 몫으로 남겨둔 셈이다. 그는 많은 개별 상품을 제안해왔지만 그 모두를 아우르는 취향을 매장에 오롯이 담아 다른 차원, 즉 삶의 방식에도 변화를 시도하라고 소비자에게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더콘란샵 서울 매장을 방문했을 때 필자의 이목을 끈 것은 상품마다 꼬리표에 디자인 배경과 의도를 적어둔 점이었다. 구체적으로 기입된 내용을 보니 마치 미술관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하나의 브랜드 매장이 초대형 상업공간이자 동시에 현대 디자인 역사를 집약해 보여주는 미디어 공간이면서, 또한 앉고 만지는 경험을 통해 소비자의 디자인 감각을 키워주는 교육 공간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별화된 시각을 바탕으로 고른 상품들을 보며 소비자들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과시 대신 자신의 정체성과 취향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된다. 많은 기업도 더 비싸고, 더 많고, 더 좋은 것을 제안하기보다는 ‘다른 것’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자사의 경쟁우위를 창출할 수 있도록 차별성에 기반을 둔 브랜드를 세워나가는 방법이 소비자의 마음에 호소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결국 소비자의 몫으로 남겨진, 취향에 대한 결정권은 이러한 브랜드와의 만남에서 만들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김도환 브랜드 디렉터·㈜도빗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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