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뚫고 빛을 본 <기생충>

박효재 국제부 기자
2020.02.24

비영어권 작품으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거머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한국 사회의 암울한 현실을 외국인의 눈으로 다시 돌아보게 했다. 영국 BBC와 가디언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한국의 독특한 주거구조인 반지하에 주목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예술인을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됐던 블랙리스트에 봉 감독의 이름이 올랐던 사실을 언급했다.

BBC는 2월 10일 ‘서울의 반지하에 사는 진짜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반지하 주택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기사에 소개된 오기철씨(31)의 반지하 주택에는 빛이 거의 들지 않는다. 여름에는 습기와 곰팡이와 싸워야 한다. 사막의 극한기후에도 살아남는 다육식물도 오씨의 집에서는 살아남지 못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창문으로 그의 집을 들여다볼 수 있고, 10대 청소년들이 그 앞에서 침을 뱉기도 한다. 오씨는 “한국에서는 좋은 차와 집을 갖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반지하는 가난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봉준호 감독이 2월 9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받은 트로피를 바라보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봉준호 감독이 2월 9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받은 트로피를 바라보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 <변호인>에서 인권변호사 송우석 역을 연기한 배우 송강호 / NEW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 <변호인>에서 인권변호사 송우석 역을 연기한 배우 송강호 / NEW

BBC는 반지하를 영어 ‘Banjiha’로 표현했다. 영국의 주거형태와 일 대 일로 대응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반지하는 남북 갈등에서 비롯된 역사적 산물이다. 1968년 북한의 청와대 습격 사건으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1970년 건축법을 개정했다. 국가 비상사태 시 모든 신축 저층 아파트의 지하를 벙커로 사용하도록 의무화한 것이다. 처음에는 이 공간을 거주지로 임대하는 것이 불법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주택난이 심해지고 정부는 주택을 충분하게 공급할 여력이 안 되자 반지하 임대를 묵인했다. 1984년 주택법이 개정돼 반지하 주택 건설 요건이 완화되면서 반지하 주택은 더욱 늘어났다. 여기에 IMF 사태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반지하는 빈곤층·미취업 청년 등에게 새로운 주거 대안으로 자리 잡았다.

반지하에 사는 이들의 계급상승 욕구를 그린 <기생충>은 블랙리스트라는 것이 계속 있었더라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워싱턴포스트는 칼럼을 통해 <기생충>의 아카데미 성취를 “한국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신문은 이전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봉 감독은 물론 배우 송강호와 영화 제작을 지원한 이미경 CJ그룹 부회장까지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등 이념 성향이 다른 예술인들을 전방위로 탄압했다고 지적했다.

박근혜 정부는 1만 명에 달하는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 봉 감독의 <살인의 추억>은 경찰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영화, <괴물>은 반미주의 영화, <설국열차>는 시장경제 자체를 부정하고 저항을 부추기는 영화로 평가됐다. 신문은 송강호는 201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는 <변호인>에 출연한 후 압박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캐스팅 제안이 끊긴 것을 말한다. 이 부회장은 사임 압력을 받기도 했다고 전했다.

블랙리스트가 계속 존재했다면 <기생충>이 결코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다행히도 블랙리스트는 2016년 대중에 공개됐고,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 동력으로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박효재 국제부 기자 mann616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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