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회>-‘에로, 그로, 난센스’ 여성혐오의 방식

2017.12.19

‘에로 그로 난센스’의 콘텐츠 안에서 모던걸이나 직업여성은 사치와 허영의 화신 또는 ‘에로서비스’ 제공자로서 재현되었다. 남성들은 이러한 콘텐츠를 구매하면서 여성들을 맘껏 조롱하거나 성적인 자극을 은밀히 즐겼다.

근대 이후 ‘여성해방’이라는 신조어가 출현하고 ‘여자도 인간이다’라는 사실이 ‘발견’되면서 여성운동의 주체들은 남성과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특히 부르주아 엘리트 ‘백인’ 남성들이 헤게모니를 쥐고 근대사회의 짜임새를 주도해나간 제국주의 국가의 여성들은 남녀차별을 비판하면서 남성과 동등한 교육과 정치 차명의 기회를 쟁취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세모 가두의 불경기 풍경/별건곤 1930년 12월호

세모 가두의 불경기 풍경/별건곤 1930년 12월호

보도 듣도 못한 조선사회 신여성들

반면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해방’이라는 신조어를 선전하는 데 열심이었던 사람들은 남성 지식인들이었다. 실력을 양성하여 문명개화에 도달하는 것으로 제국에 대한 열패감을 만회하려던 자들이었다. 이들은 ‘미개’의 영역에 속해 있다고 여겨지는 관습, 사상, 사람들을 맹비난하며 이 때문에 조선이 정치적으로 패배하여 자신들의 기회가 봉쇄되었다고 생각했다. 문명개화론자들의 관점에서 조선의 여성들은 집안에 갇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노예적 존재였다. 남성 지식인들은 여성들도 인간임을 각성하고 ‘학교’에 나와 ‘지식’을 익히고 민족의 발전에 ‘조력’하는 ‘해방’적 존재가 되라고 채근했다. 마치 서구와 일본의 여성들처럼.

식민지 조선의 여성들은 ‘여성해방’을 위해 제국의 여성들과 경쟁하는 위치에 놓여졌다. 그리고 그것은 초기 여성운동의 주체들이 여성들도 다닐 학교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데 명분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남성 지식인들은 조선의 여성들이 교육을 통해 양처현모의 실력을 쌓는 것이 민족을 위한 길이며 참된 여성해방의 방식이라고 설파했지만, 여성들의 교육경험은 양처현모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배운 여성들은 남편과 아이를 중심으로 설정해놓은 여성성 지배담론을 뛰어넘어 자아와 주변관계, 근대주체로서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했다. 엘렌 케이의 <연애와 결혼>을 읽고 남성 지식인들이 주목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잊지 말아야 하는 모성의 역할이었지만 배운 여성들은 영육일치의 연애관계에서 비롯된 평등한 여남 관계에 더 관심을 보였다.

1920년대 이후 사회적으로 가시화된 신여성들은 확실히 이전의 조선 사회에서는 보도 듣도 못한 새로운 여성들이었다. 교육과 전문직이라는 ‘스펙’을 갖추고 새로운 의식과 역할을 반영한 외양을 갖추어 갔으며 공개지면에 자신의 경험을 토로하면서 대항담론을 만들어가는 주체였다. 이들의 출현을 바라보는 남성 지식인들의 마음은 양가적이었다. 문명사회를 구성하는 데 빠질 수 없는 부분이라고 받아들이면서도 그들이 설정해놓은 여성성 안에 머물지 않는 신여성을 불온하다고 여겼다. 지배담론 하에서 신여성의 대칭적 존재는 구여성이었다. ‘신남성’이라는 언어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남성 지식인들은 ‘구여성’이라고 호명된 존재와 비교하고 경쟁시키면서 신여성을 남성의 영역에 파고든 존재가 아니라 여성의 기존 영역을 분할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정치의 시대였던 1920년대는 ‘민족해방’에 닿는 실력양성이든 혁명이든 가능하다고 여겨진 시대였다. 청년 지식인들은 그 시대적 소임을 수행하는 근대주체로서 자신의 위치를 짓고 싶어했고, 근대주체임을 입증할 수 있는 언설과 행위양식의 공란을 기입해나갔다. 그 중 ‘자유연애’는 필수항목이었다.

1930년 1월 12일 만평

1930년 1월 12일 만평

첩이 되는 신여성, 버림받는 구여성

그러나 다수의 기혼남과 다수의 신여성이 포진되어 있는 자유연애 시장 안에서 영육일치의 이상적 연애를 실현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첩이 되는 신여성과 버림받는 구여성이 다시 비교되었고, 이번에는 신여성이 민족의 발전을 저해하는 위치로 배치되었다. 심판자인 남성들은 삼각관계의 한 꼭짓점을 이루는 남성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강제결혼의 희생자, 욕망에 굴복한 가련한 인간이라는 동정의 언어로 이들을 구원할 따름이었다.

실력양성이나 혁명에 기대했던 정치적 열기는 10년도 못되어 사그라졌다. 문화통치라는 레토릭을 내세운 식민권력의 탄압 또는 친일화 정책 속에서 비가시화되거나 비정치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1930년대 이후 본격화된 세계 대공황과 군부체제 아래서 조선 사회는 갈 길을 잃어버렸다. 얼어붙은 경제환경 속에서 빠르게 빈곤화되는 한편에는 전시경기로 흥청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착실한 실력양성보다는 운이나 기회가 사람의 운명을 지배한다고 믿어졌다. 그나마 실낱같은 경제적 희망이었다. 제국주의 일본 남성의 정치권력이 대륙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조선 남성들에게는 정치적 좌절감이 스며들고 있었다.

불안과 좌절에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식민지 남성에게 파고든 것은 ‘에로 그로 난센스’의 감각적 쾌락이었다. 1930년대 초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자극이 미디어와 예술 등 문화공간을 중심으로 식민지 남성에게 확산되었다. 문화자본들은 ‘에로 그로 난센스’의 감각을 일깨우는 조선판 텍스트와 콘텐츠를 양산하고 팔아대면서 빈곤한 시대의 이윤을 챙겼다.

식민지 남성의 감각을 일깨우기 위해 문화자본이 동원하는 대상은 주로 모던걸 또는 직업여성이었다. 1920년대의 신여성은 1930년대에 모던걸 또는 직업여성으로 변주되었다. 조선 사회의 정치적 좌절과 경제적 불안이 커갈수록 신여성의 자유연애나 소비에 대한 남성 지식인의 ‘지적질’은 강도를 더해갔고, 남성 지식인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설계한 ‘근대 여성성’에서 이상적인 요소가 소거된 여성은 점점 신여성이라 불리지 않게 되었다.

‘에로 그로 난센스’의 콘텐츠 안에서 모던걸이나 직업여성은 사치와 허영의 화신 또는 ‘에로서비스’ 제공자로서 재현되었다. 남성들은 이러한 콘텐츠를 구매하면서 여성들을 맘껏 조롱하거나 성적인 자극을 은밀히 즐겼다. ‘에로’가 공원, 해수욕장 등 오락장이나 카페, 유곽 같은 유흥공간에서 남성 중심의 성적 욕망에 순응하는 여성의 재현이었다면 ‘그로’는 사치와 허영을 좇아 다른 남성에게 곁눈질하고 성적인 일탈까지 감행하는 여성에 대한 처벌의 방식으로 묘사되었다. ‘난센스’는 조롱의 대상인 모던걸과 직업여성, 그리고 이들의 연애상대인 ‘가짜 남성성’을 소유한 남성, 곧 무능과 허세에 찌들었으며 운과 기회를 잡아 신분상승을 하려는 남성을 우스꽝스럽게 전시하여 그 위선을 벗기고 공공의 손가락질 대상이 되게 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영화 미몽(1936)의 스틸 컷

영화 미몽(1936)의 스틸 컷

‘~걸’ 여성들에 대한 일상적인 성희롱

입학난과 취업난, 결혼난은 1930년대 청년과 지식인층이 겪은 대표적인 시련이었다. 1920년대 이상적인 남녀관계로 추구되었던 자유연애와 영육일치의 사랑은 현실의 물질적·관습적 조건들과 충돌하면서 갖가지 형태로 실패를 경험했다. 자유연애를 실천했다가 연애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누리지도 못하고 사회적 비난을 한 몸에 받았던 신여성들도 비교적 안전한 일부일처혼에 인생을 맡기는 것이 낫다고 여기게 되었다. 자유연애의 열풍 속에서 그나마 신여성과의 연애를 경험할 수 있었던 청년 지식층 남성은 결혼시장에서 불리한 위치에 서 있었다. 연애도 못하고 결혼도 하지 못한 남성들은 ‘에로’ 문화를 통해 에로스적 결핍을 메웠고, ‘그로’ 문화를 통해 자신보다 경제적으로 우월한 남성을 선택한 여성을 비난하고 처벌하면서 현실의 패배를 잊고자 했다.

1930년대 이 분야의 대표적인 콘텐츠라고 할 수 있는 영화 ‘미몽(迷夢)’의 부제가 ‘죽음의 자장가’인 것은 이 시기 경쟁에서 지고 좌절한 남성들에 대한 위로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건실한 남편과 딸을 버리고 화려함과 소비욕망을 좇아 다른 남자에게 가버린 애순이가 딸이 당한 교통사고의 원인제공자였다는 죄책감을 안고 자살하는 결론은 그 시절을 우울하게 살아야 했던 남성들의 자위방식이었다.

한편 1930년대 글쓰는 남성들은 여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나온 여성들을 과도하게 걱정했다. 특히 이 시기 ‘에로 그로 난센스’ 분위기를 타고 확장된 서비스업에 진출한 여학생들의 품행과 성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들의 걱정과 탄식은 대부분 백화점이나 전화교환국, 버스, 극장 등 직장에서 데파트걸, 헬로걸, 버스걸, 티켓걸 등 각종 ‘~걸’로 종사하는 여성들이 처한 일상적인 성희롱 상황에 대한 목격과 전문(傳聞)에서 비롯했다. 남성들은 현재 직업여성의 ‘정조’가 ‘무경비 지대’에 있다고 탄식하고 우려했다. 그리고 앞장서서 이들의 ‘정조’를 보호하기 위한 관리에 나섰다. 직업부인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남자들이 잡생각 못할 것을 항상 주의하시는 분’, 또는 ‘의복과 화장에 너무 사치하지 않는 분’, ‘남자들과 너무 함부로 놀지 않는 분’이 되어야 한다고 근엄하게 설교한 것은 조선 여성과 민족의 미래를 걱정했던 자칭 ‘오빠’들의 맨스플레인이었다. 1930년대 식민지 남성들의 ‘에로 그로 난센스’적 여성 재현이나 여성에 대한 분리, 경쟁, 관리는 여성혐오를 통해 ‘지배적인 남성성’을 확인하려는 욕망의 발현이었다. 그렇게 1930년대를 견뎌갈 수 있는 이유가 필요했던 것이다.

<박정애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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