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 가장해 관권·자본이 유착한 토지수용

고태우 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수료
2017.08.01

여전히 한국 사회는 ‘공익사업’이라는 명분 아래 희생공간을 찾고 있다. 강정과 밀양의 아픔은 현재도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고, 언젠가 내 앞마당에서 비슷한 일이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1933년 11월 총독부를 찾은 장진지주회 대표자들.(조선중앙일보 1933.11.15) 한국언론진흥재단

1933년 11월 총독부를 찾은 장진지주회 대표자들.(조선중앙일보 1933.11.15) 한국언론진흥재단

조선질소비료회사 110㎞ 분기(分岐) 송전선 철탑 건설용지인 함주군 운남면 흥덕리 산 11번지 임야 … 매수 교섭은 수개월을 두고 지주 운남면 운흥리 송재열(宋在烈)씨와 10명이 시종일관하여 문중(門中) 전원의 승낙이 없이는 안 되며 조상의 묘가 있는 곳이니 절대로 팔 수 없다고 하여 드디어 교섭의 결렬로, 지난 16일 회사 당국은 드디어 토지수용령 적용 신청을 제출하여 왔다고 한다. - <동아일보> 1935년 12월 20일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조선질소)는 1927년 일본의 신흥재벌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일본질소)가 함경남도 흥남에 설립한 회사로,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공업화에 중추 역할을 담당하며 일제의 대륙 침략을 뒷받침했다. 조선질소는 조선총독부의 협조를 받아 함경남도 일대에 부전강·장진강 수력발전소를 세우고 거기서 생산되는 전기로 화학비료를 만들어 부를 축적했다. 위 기사의 송전선은 장진강 수력발전소에서 조선질소 흥남 공장으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었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미국 방문 때 장진호 전투 추모연설에서의 장진호는 바로 이 장진강 발전소가 세워지면서 만들어진 호수다.

기사를 읽다 문득 밀양 송전탑 사건이 떠올랐다. 주민과 한국전력 사이의 10년 넘는 갈등 과정에서 주민 두 분이 자살로 내몰렸고, 마을공동체가 파괴되었다. 송전탑 설치공사가 끝났지만 여전히 많은 주민들이 보상금을 거부하며 계속 싸워오고 있으며, 투쟁은 전국의 다른 송전선로 설치지역 주민들과 연대한 탈핵 및 에너지 전환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1930년대와 2000년대, 삶의 터전에서 내몰릴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저항이 유사한 구조로 반복되고 있다. 2013년 7월 밀양 주민들이 국회 앞에서 송전탑 건설 반대 집회를 벌이는 사진. 연합뉴스

1930년대와 2000년대, 삶의 터전에서 내몰릴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저항이 유사한 구조로 반복되고 있다. 2013년 7월 밀양 주민들이 국회 앞에서 송전탑 건설 반대 집회를 벌이는 사진. 연합뉴스

1930년 상황과 겹쳐지는 밀양 송전탑
다시 1930년대 상황이 겹쳐진다. 산골마을에 발전소를 짓기 위해 도로와 철로가 놓였고, 수력발전을 위해 댐이 건설되고 인공호수가 조성되었다. 발전소가 지어지자 수백㎞ 떨어진 도시와 공장에 닿을 전선이 설치됐다. 수몰지구와 도로 및 송전탑 주변 수천 명의 주민들은 자신의 땅 일부를 내놓거나 이주해야 했다. 이 과정도 10년이 넘는 지난한 세월을 필요로 했다. 여기에는 협상과 갈등, 폭력과 투쟁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으며 토지 수용의 문제가 놓여 있다.

토지 수용을 뒷받침하는 제도로서 토지수용령은 일본이 한국을 점령한 직후인 1911년에 제정되었다. 수용령의 목적은 ‘공공의 이익이 되는 사업’을 위하여 필요할 때 토지를 수용하거나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법령은 크게 네 가지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사업을 일으키는 기업가가 토지를 수용하거나 사용할 권리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토지 관계인과 협의해야 했다. 둘째, 수용 협의가 원만하지 않을 경우 기업가가 재결 결정권을 갖고 있는 지방장관(도지사)에게 재결을 신청할 수 있었다. 셋째, 만약 지방장관의 재결 결정에 불복할 경우 기업가나 관계인은 조선총독에게 재정을 청구할 수 있었고, 총독의 결정이 내려지면 이를 무조건 따라야 했다. 넷째, 토지 수용이나 사용으로 토지 관계자가 입는 손실은 기업가가 보상해야 했다.

‘병참기지 조선’ 토지수용령 대폭 확대
지방장관과 총독의 결정, 두 차례의 법적 협의절차가 존재하여 얼핏 보면 문제가 없는 듯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수용령은 수속절차와 보상과정에 대한 규정이 지극히 소략했다. 법의 해석과 운용에 자의성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는 의미이면서, 수용 협의 및 보상절차가 힘의 크기, 곧 권력관계에 의해 좌우될 수 있음을 뜻한다. 또한 지방장관과 총독의 행정권이 압도적이어서, 행정관청과 이해당사자가 의견이 맞지 않을 때 이를 조정하고 판단할 제3자가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가장 큰 문제로는 총독의 재정명령이 최종 심급으로서 관계자들의 소원제도나 행정소송권이 보장되지 않았다. 만약 조선총독부나 경기도지사가 도로공사를 위해 스스로 기업가가 돼 수용 신청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토지 관계인은 총독부나 경기도의 수용을 거부하고 싶거나 보상과정에서 부당함을 느껴도 사업을 기획한 장본인인 경기도지사에게 재결 신청을 하거나 총독부의 수장인 총독에게 재정 신청을 해야 했다. 곧 토지 관계인의 요구가 실질적으로 반영되기 어려운 제도적인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토지 수용 범위는 더욱 확대되고 그 적용도 강압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일본은 세계대공황 위기를 탈피하기 위해 세력 확대를 꾀했고, 만주를 침략하고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군부를 중심으로 제국을 군사화하였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병참기지’ 조선에서도 군수공업화와 각종 개발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토지수용령은 특히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8년 이후 수용 가능 범위가 대폭 확대되었다. 인조석유제조사업, 항공기제조사업, 경금속제조사업, 유기합성사업과 조선주택영단사업에 관한 부분이 추가된 것이다. 군수공업 분야의 공장기지 매수라든가 전쟁 수행과정에서의 도시계획에 필요한 용지 매수 등 모두 전시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법 개정이었다. 전쟁에서 빨리 승리하고 싶은 지배권력의 욕구에 따라 토지 수용도 점차 형식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토지 관계자들의 권리 보호가 더욱 취약해져갔음을 의미한다.

공익을 표방했던 토지 수용은 식민통치 당국과 대기업 등 사업가의 개발 목적을 위해 활용되는 과정에서 식민지민의 권리가 쉽게 무시되는 등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통치당국은 공공사업, 국가의 사업에 대하여 사익(私益)을 절제 또는 억제해야 한다는 식의 언술을 구사했다. 또한 수용을 공고하고 그 타당성을 조사해 판정을 내리는 과정을 독점하면서, 거의 예외 없이 대자본과 유착하며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뒷받침했다.

장진강 수력발전소 건설 사례로 돌아가 보자. 1927년 일본 재벌인 미쓰비시(三菱)가 장진강 개발권을 획득했다. 미쓰비시는 장진군수와 장진경찰서장 등 관권의 힘을 빌려 용지 매수를 무리하게 시도하다 900명에 달하는 장진군 지주회의 반발 끝에 사업을 철수했다. 1933년 일본질소가 개발권을 인수하여 발전소 공사를 재개했다. 일본질소는 토지 매수 협상을 마무리하지 않은 채 공사를 시작해 지역사회와 충돌을 빚었다. 주민들은 대책기구를 조직하고 여러 차례 함남도청과 총독부에 탄원서를 제출하며 활발히 대응했다. 그럼에도 결국 토지수용령이 적용되고 총독부 및 도와 군청, 경찰의 지원을 받으면서 일본질소는 1935년 제1발전소 건립에 성공했다. 이후 1937년 제2발전소를 위한 제2저수지 확장공사에 이르기까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장진강을 둘러싼 일본 대자본과 지역주민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장진군 주민들은 넉넉하지는 않아도 자신이 경작한 농작물로 생활을 유지하는 데 큰 지장이 없었다. 또 부자와 빈자가 두드러지지 않고 계층별 격차가 거의 없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발전소 건설문제로 고향을 떠나야 하는 것을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오랜 기간 동안 그들의 조상들이 가꾸어온 마을과 선조들의 무덤이 있는 산 높고 물 맑은 정든 고향을 등지는 것, 그동안 쌓아온 친척과 친구와의 관계가 끊어질 수도 있는 점들을 우려했다. 강제이주는 원주민의 문화 자체가 통째로 저수지 물밑으로 수장되는 것을 의미했다.

장진 사례뿐 아니라 1930년대 공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토지수용령은 식민권력의 전쟁 수행과 개발사업에 필요한 토지 매수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식민당국과 대기업은 매수 협상보다는 ‘국익’과 ‘공익’을 앞세워 수용령을 밀어붙였다.

수용 대상지의 지주와 주민들은 부당하게 높은 보상가를 고집하고, 반도의 개발과 국책 수행에 악영향을 주는 존재로 치부되었다. 식민당국과 개발업자들은 지가가 높게 뛰어 당초 예산으로 매수가 불가능할 경우 토지수용령을 적용하여 예산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는 행정비용·개발비용의 축소이면서 동시에 식민지 인민에 대한 개발비용의 전가로 볼 수 있다. 지배권력과 지역사회 사이의 합의가 실패하고 위로부터의 일방적인 압력만이 가능해진 상황을 보여준다.

장진강수력발전소 전경 (<조선전기사업사>(朝鮮電氣事業史), 중앙공론협협회(中央日韓協會), 1981, 356쪽) 필자 제공

장진강수력발전소 전경 (<조선전기사업사>(朝鮮電氣事業史), 중앙공론협협회(中央日韓協會), 1981, 356쪽) 필자 제공

끊임없는 희생체제, 어떻게 벗어날까
1962년 토지수용법이 제정될 때까지 일제가 만들어놓은 토지수용령은 살아남았다. 토지수용법을 통해 수용 및 사용 심의기관으로 중앙 및 지방 토지수용위원회가 설치되고, 수용위원회의 재결에 불복하고 이의신청할 수 있는 절차가 마련되었다. 2002년 이 법이 폐지되고 새롭게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이 마련되었다.

점차 수용 대상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법적 개선이 이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역대 통치권력은 안보와 경제발전이라는 ‘국익’을 명분으로 토지 수용 대상자들의 목소리를 묵살하거나, 법으로 보장된 그들의 권리마저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뿐만 아니라 ‘공익’과 개발을 빌미로 주민들의 소유권과 거주권을 쉽게 제약하는 수십 개의 다른 법령들도 탄생했다. 일례로 1954년에 제정되어 행정강제를 뒷받침한 법률로, 그 법적 남용이 비판받았던 행정대집행법은 61년 만인 2015년에 비로소 처음 개정되었을 따름이다. 용산참사, 제주 강정마을, 밀양 송전탑 설치 문제, 구룡마을, 4대강 사업 와중의 두물머리, 사드 배치 과정의 성주 등도 모두 행정대집행이 남용되었거나 추진 과정에 있었던 사례들이다.

여전히 한국 사회는 ‘공익사업’이라는 명분 아래 희생공간을 찾고 있다. 폭탄을 없앨 것을 고민하기보다 어디로 폭탄을 돌릴 것이냐에 더 초점을 맞춰 왔다. 공장과 대도시 사람들이 손쉽게 전기를 사용할 때 누군가는 생존을 걱정하며 눈물을 흘려 왔다. 강정과 밀양의 아픔은 현재도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고, 언젠가 내 앞마당에서 비슷한 일이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국가권력이나 자본, 도시를 위해 끊임없이 누군가의(또는 또 다른 생명체의) 희생을 요구하는 체제, 이는 여전히 ‘내부 식민화’가 지속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진정한 탈식민은 언제 가능할까? 우리는 어떻게 인간과 인간이 공존하는, 나아가 호모 사피엔스만이 아닌 여러 생명체까지 조화로운 체제로 만들어갈 수 있을까?

<고태우 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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