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공계 위기”와 “문송합니다” 의 숨은 진실

2017.04.11

이해당사자가 이렇게 많은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묘책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공계 위기든 인문학의 위기든, 거기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풀어내기 위해서는 숫자가 아니라 사람에 눈을 돌려야 한다.

대략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최상위권 대학 또는 연구소에 소속된 과학기술자와 공학자들은 상당히 자부심이 높았다. 지속적인 호황 속에서 과학기술계 직종들은 경제성장의 주역으로 인정받아 사회적 위상이 높아졌고 비교적 안정된 일자리가 꾸준히 공급되었다. 지금은 상당히 낯설게 들릴 테지만, 학력고사 또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이과 수석은 진학 희망학과를 묻는 질문에 대체로 물리학과 또는 전자공학 계열의 학과라고 답하곤 했다. 정원 270명의 거대 학부였던 서울대 전기전자제어계측공학부(전전제)가 정원 190명인 의예과보다 커트라인이 높던 시절이었다.

이 ‘좋았던 옛 시절’을 돌아갈 수 없는 과거로 만들어버린 것은 1997년 한국 사회를 강타한 외환위기였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한 구조조정의 와중에 상당수의 기업 부설연구소들이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같은 이공계 출신이라도 의사와 한의사 등이 독립사업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 비해, 기업의 피고용인인 연구원들은 감원의 칼날을 맨몸으로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2002년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린 상위권 학생들의 이공계 기피현상 세미나. /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2년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린 상위권 학생들의 이공계 기피현상 세미나.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공계 위기’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른바 ‘이공계 위기론’은 이를 계기로 처음 불거졌다. 외환위기 직후 몇 해 동안 대학 이공계 학과의 입시 경쟁률이 크게 낮아지고, 의대나 한의대에 비해 커트라인도 크게 떨어진 것이다. 의대에 진학하고도 남는 성적으로 물리학과나 전전제에 진학하는 것은 더 이상은 훌륭한 선택이 아니라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판단이 반영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공계 대학 교수들이 앞장서서 정부의 대책을 촉구했다. 이들은 각종 대중매체에 한국 경제의 고속성장을 이끌어온 고급 이공계 인력의 수급이 어그러질 수도 있다는 우려를 쏟아냈고, 그에 따라 ‘이공계 위기 해결’을 목표로 내건 각종 토론회와 공청회 등이 각지에서 개최됐다. 이들이 바랐던 것은 대체로 좋았던 과거, 즉 전국에서 가장 성적이 높은 학생들이 최상위권 이공계 대학과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줄을 서던 시절로의 회귀였다. 따라서 정부에 요구한 대책도 주로 대학과 대학원에 학생들이 많이 들어오도록 장학금 혜택을 늘려 달라는 것이었다. 정부가 1999년부터 총 3조원이 넘는 예산을 들여 ‘두뇌한국(BK) 21’ 사업을 추진한 것은 이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당사자인 학생과 학부모들의 생각은 달랐다. 안정적인 전문직 이공계 일자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학교 다니는 동안 장학금을 늘리는 것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학생과 대학원생들은 또 다른 지점을 주목하고 있었다. 장학금도 모자라고 안정적인 일자리도 적다면 차라리 유학이라도 쉽게 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공계 병역특례제도의 개편에 대해 교수와 학생들은 사실상 반대 목소리를 냈다. 교수들은 대학원생들이 해외로 빠져나가 국내 연구인력이 부족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병역특례제도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반면, 학생들은 병역에 묶여서 유학을 포기하는 일이 줄어들도록 병역특례제도를 간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엇갈린 시선들을 비교하다 보면, ‘이공계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누구의, 무엇이, 왜 위기였다는 것인가? 교수들에게 위기란 학생이 줄어들어 연구실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었을 테고, 학생들에게 위기란 학위를 마쳐도 ‘좋은’(구체적으로는 나와 고교 성적이 비슷했는데 의대나 치대를 선택한 옛 친구와 비슷한 수준의 보상과 안정성을 기대할 수 있는) 일자리가 지극히 제한되어 있는 데다가 간혹 생기는 그런 일자리마저 유학파에게 뺏기는 것이었을 테고, 국가나 기업에게 위기란 학부나 석사 수준의 훈련을 마치고 대학이 아닌 직장을 찾는 이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뜻했다. 이렇게 현상에 대한 인식이 다르니 각기 다른 주체가 제시하는 해법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었다.

2006년 고려대 교수들의 인문학 선언. ‘인문학 위기’의 발단이 됐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6년 고려대 교수들의 인문학 선언. ‘인문학 위기’의 발단이 됐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말할 기회도 못얻고 뒤편에 있는 이들

그런데 이것이 다일까? 여기에서도 목소리를 내지 못한 이들이 있지 않을까? 본교 출신인지 또는 성적이 좋은지 등을 따져가며 대학원생을 받을 수 있는 교수도, 뒷날 대학이나 대기업 연구소에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유학을 가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는 학생도, 사실은 한국의 이공계 인력 전체를 놓고 보면 아주 작은 부분이 아닐까? 이보다 훨씬 많은 교수들이 연구실을 운영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학생을 영입하기 어려워 노심초사하고 있으며, 훨씬 많은 학생들이 지금 나를 지도하는 교수와 같은 자리에 내가 언젠가 설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접어둔 채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이른바 최상위권 대학의 학생들은 유학이라도 가서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를 찾아볼 수 있었을 테고, 그 대학의 교수들은 빠져나간 학생들을 아쉬워하면서도 큰 어려움 없이 다른 학생들을 그 자리에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공계 위기가 국가적 문제로 회자되고 사방에서 토론회가 열릴 때, 정작 자신들의 문제는 의제에 포함되지도 못했던, 그래서 발언권도 얻지 못했던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10여년의 세월이 흐르자, 이번에는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가 항간에 돌기 시작했다. 사실 한국에서 인문학이 탄탄대로를 걸었던 적도 딱히 없지만, 2010년대의 인문학 위기론은 취업시장에서 인문계 학과 출신자들이 배제당하다시피 하는 문제와 맞물려 부각되었다. 인문계의 9할은 논다는 ‘인구론’, 문과라서 죄송하다는 ‘문송합니다’ 등이 유행어가 되었다. 이어서 인문계 학부와 대학원 교육이 무너진다는 교수들의 호소가 신문지면을 채웠고, 정부는 이에 대응하여 인문계 학과를 위한 여러 가지 지원사업을 시행했다.

규모는 훨씬 작지만, 인문학 위기를 둘러싼 움직임들은 이공계 위기가 입에 오르내릴 때와 여러 모로 판박이다. 따라서 이공계 위기론에 대한 논의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은 인문학 위기론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이공계 위기’라는 깃발을 들고 있었던 사람들은 사실 한 덩어리가 아니라 교수, 학생(과 학부모), 기업, 정부 등 다양한 입장이었다. 둘째, 이들은 각자 입장에 따라 이해관계가 달랐으며 위기의 본질과 해법에 대한 생각도 달랐다. 셋째, 그리고 이 논의 자체가 한국의 대학 서열에서 이른바 최상위권 대학을 중심으로 전개됐기 때문에 그밖의 대학에 속한 이들에게는 각종 해법이라고 제시된 것들이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른바 최상위권 대학을 살리기 위해 다른 대학의 인적·물적 자원을 희생하는 구조가 새롭게 형성되어 버렸다.

이 모든 것들이 지금 인문학을 위기에서 구하자는 명분 아래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른바 상위권 대학 교수의 입장, 상위권 대학 학생의 입장, 이른바 중하위권 대학 교수의 입장, 중하위권 대학 학생의 입장 등이 엇갈리는 와중에, 정부 예산은 여기저기 풀리고 있으나 그 덕에 위기를 탈출했다는 사람은 아직까지 내가 과문한 탓인지 한 명도 만나본 적이 없다.

이해당사자가 이렇게 많은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묘책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공계 위기든 인문학의 위기든, 거기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풀어내기 위해서는 숫자가 아니라 사람에게 눈을 돌려야 한다. 또한 각 학교나 세부전공의 다양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이공계’나 ‘인문학’을 뭉뚱그려 단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인 양 말하는 이들을 경계해야 한다. 나의 이해관계가 집단 전체를 대표한다고 외치며 누군가 깃발을 들고 나설 때, 자신의 문제는 말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뒤편에 가려져 있는 이들도 늘 있기 때문이다.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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