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만자로의 표범’-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 둬야지

2016.11.08

[내 인생의 노래]‘킬리만자로의 표범’-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 둬야지

갓 스물 초입이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순천역이었다. 밤 9시 서울행 기차. 바람이 서늘해지는 초가을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 상경길이었다. 처음 상경해서는 서울 낙원동 골목 빠찡코에서 일하며 반건달 생활을 했었다. 종로3가 삐끼집에서 국산 싸구려 술 캡틴큐를 고급 양주병에 넣어 등치는 일도 했었다. 그때도 미래라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이번 생은 베렸다고, 낙향해 목수일을 배워 보기도 했고, 전남 여천과 충남 서산의 석유화학단지를 떠돌며 용접과 배관공 일을 배워 보기도 했다. 잔업 철야를 밥 먹듯 하며 악으로 깡으로 돈을 모아 보려 했지만 뜻밖의 사고로 다시 알거지 신세였다.

이왕 버린 인생, 이럴 바엔 후회 없이 해보고 싶었던 일이나 한 번 해보고 죽자는 심사였다. 어릴 적부터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좋아했던 ‘문학’이었다. 우연히 한겨레신문을 봤는데 거기 ‘한국문학예술대학’이라는 곳에서 공부할 사람들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났었다. 또 한 통의 원서는 몇 년 처박힐 생각으로 중동으로 가는 해외근로자 파견 사업에 보냈다. 본전이 하나도 없는 인생이었기에 어떤 길로 가던 까먹을 게 없었다. 다행이었는지 서울에서 공부하러 오라는 연락이 먼저 왔었다.

차비도 없어 아버지에게 “나중에 갚을게요, 3만원만 꿔주세요” 했다. 아버지, 어머니도 인생의 모든 걸 까먹고 고향 벌교를 떠나 인근 순천에서 낮에는 손님을 받는 방에서 저녁에는 식구들이 이불을 깔고 자는 코딱지만한 식당을 하던 터였다. 아버지에게는 “서울 간 친구가 사무직 일자리를 소개해 준대요” 했다. 당시 서울 가는 무궁화호 요금이 1만3000원.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다시 가 “ 2만원만 더 꿔주면 안 돼요” 했다가 욕만 먹고 나온 길이었다. ‘씨팔, 이 놈의 집구석을 다시 오나 봐라’. 참 어릴 적이었다.

어쨌든 새로운 인생을 찾아 다시 정처 없이 떠나는 길. 둥지를 잃어버린 어린 새처럼 여리던 마음. ‘너무 아파하지 마.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곁에 있어줄게’. 이제 조금은 내 자신을 학대하지 않고 사랑하고 위로해주고 싶었을 때. 곁엔 싸구려 가방 하나와 종이백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죄다 작업복으로 쓸 옷들이었다. 상경한 친구 자취방에서 며칠만 기숙하며 일할 수 있는 자리를 찾을 참이었다. 지금도 그렇게 막막한 청춘들이 있을 것이다. 그 기차 안에서 차창 밖을 무심히 보고 있을 때 쓸쓸한 플랫폼에서 들리던 노래가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었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자고 나면 위대해지고, 자고 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지금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다.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

한 번도 ‘위대해’ 본 적은 없지만 내 처지처럼 참 절절한 가사였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 둬야지. 한 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라야지.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그런 마음으로 그 후 오랜 세월을 살아 왔다. 다행히 ‘시인’도 되었다. 지금도 가끔 그 노래를 부른다. 그날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그 소년의 눈망울을 떠올리며, 늘 그렇게 간절하게 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송경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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