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ep’-우주를 부유하는 작은 원소들

2016.11.01

[내 인생의 노래]‘Creep’-우주를 부유하는 작은 원소들

수려한 사람들. 전형적인 음악.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잔뜩 움츠린 나는 파티를 겉도는 불청객이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누가 신경쓰기나 할까. 왜 나는 당당하지 못할까. 왜 나는 저들과 다를까. 왜 나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을까. 그때 그녀를 본다. 오늘의 주인공처럼 북적이는 인파에 둘러싸인. 그녀는 파티의 일부가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목젖을 흔들며 웃고 있다. 전에도, 그전에도 감히 눈을 마주칠 수 없었던 사람. 그녀는 이 아름다운 인간들의 세계에서 깃털처럼 떠다니는 것만 같다. 바라보고 있으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내가 가진 욕망이 내가 질시하는 사람들의 것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몇 시간의 망설임 끝에 다가갈 용기를 내어본다. 그때, 그녀는 등돌려 파티를 떠난다.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친구들과 함께. 존재한 적도 없는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 어지럽게 흩어지는 음악 한가운데 버려진 나는 중얼거린다.

“대체 내가 여기서 뭘하는 거지? 넌 이 곳에 속하지 않잖아. 넌 혐오스러워. 넌 벌레라고.(what the hell am i doing here? i don’t belong here. i am a creep. i am a weirdo.)”

라디오헤드를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Creep’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다. 자기혐오의 정서를 눈부신 미학의 경지로 승화시킨 이 노래는 한국에서 유독 인기를 끌었다. 남자들의 무의식이 사로잡힌 공포심과 수치심이 가사와 공명했기 때문일 터다. ‘한남충스러운’이라는 모멸적인 형용사가 통용되는 사회의 음악가들이 놓친 예술적 단서를 왜 20년 전의 영국 밴드가 먼저 선점했는지 의아스러울 지경이다. 한국에서는 오히려 걸그룹 2NE1이 ‘Ugly’에서 “말 시키지마, 난 너와 어울리지 못해. 그 잘난 눈빛 속 차가운 가식이 날 숨막히게 해”라고 이 자학의 정서를 여성판으로 번역해 남성 밴드들을 한 발 앞질러 갔다.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시대에 대중음악의 문학성을 논하는 건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나에게 ‘Creep’의 가사는 반전운동의 슬로건을 차용한 듯한 밥 딜런의 노랫말보다, 귀족적인 영국 시인의 미발표 시문을 그대로 이식한 것만 같은 스팅의 노랫말보다 훨씬 문학적으로 느껴진다. 이 노래의 가사에는 어떤 상황 맥락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저 뛰쳐나가는, 뛰쳐나가는, 뛰쳐나가는(run, run, run) 아름다운 여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남자가 “대체 내가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거지?”라고 절규하는 것만으로 듣는 이의 상상력을 남김없이 장악해 버린다. 무의식으로 직행하는 묘사. 시적 스토리텔링의 정수다.

아름다움을 좇는 것만큼 우리를 하찮고 처참하게 만드는 일은 없다. 그것은 스스로의 추함을 자각하는 과정이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재능, 도저히 닮을 수 없는 외모,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선량함마저 황홀한 감탄의 한편으로 반사적인 불쾌함을 자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름다움을 좇는다. 자학에 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저주받은 피조물처럼 이기적이고 모순적인 고통에 사로잡힌 채로.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는 유혹이다. 대체 왜? 대체 왜 인간은 스스로에게 만족할 수 없는 걸까? 이 질문은 대학에서 ‘아름다움의 학문’을 공부했던 나를 오랫동안 괴롭혔다. 어쩌면 아름다움이 우리를 대번에 홀리는 이유는 단지 세상에 거의 없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우리는 밀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그저 흘러가고 있는 중인 것만 같다. 우주를 부유하는 작은 원소들처럼….

<손아람 소설가·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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