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된 인생, 그림이 된 무대

2016.09.13

고 김의경 작, 이윤택 연출의 연극 <길 떠나는 가족>은 화가 이중섭의 삶을 한 폭의 그림처럼 무대에 담은 작품이다. 지금이야 미술교과서에도 작품이 실리고, ‘황소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가 되었지만, 생전에 이중섭은 평생 가난과 고난, 고독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간 비운의 예술가였다. 뛰어난 그림 실력과 남다른 눈을 가졌지만 일제하에서 제대로 미술공부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일본에서 만난 운명의 여인 마사코와의 사랑 역시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으로 넘어온 마사코와 결혼식을 올렸지만 큰아이는 병으로 죽고, 곧 6·25전쟁으로 고향을 떠난 이중섭 가족은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지방과 제주도를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삶의 후반부는 더 혹독하고 잔인했다. 생활고에 못 이겨 일본으로 돌아간 마사코와 두 아들을 못 견디게 그리워하면서도, 번듯한 직장도 수입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이중섭은 끝까지 가족을 데리러 가지 못했다. 술과 자기번민 속에서 많은 작품들을 남겼지만 중섭은 자기 그림에 대한 예술적 갈등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생의 마지막까지 그를 놓아주지 않은 빈곤과 고독 속에서 결국 혼자 쓸쓸히 죽어갔다.

연희단거리패

연희단거리패

이중섭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로부터 시작되는 연극 <길 떠나는 가족>은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 중장년기 등 중섭의 삶의 궤적을 따라 시간 순으로 흘러가면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대로 펼쳐놓는다. 전쟁과 빈곤, 정치적 혼란과 갈등 등 그를 힘들게 했던 많은 상황과 인물들이 나오지만, 특이하게도 이 작품은 그러한 외적인 갈등보다는 예술가로서의 자아,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등 중섭 스스로가 자신을 옭아맨 내면적인 갈등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무리 돈이 궁해도 잘 모르는 그림은 절대 그리지 않고, 아무리 가족이 보고 싶어도 떳떳한 처지가 아니면 절대 찾아가지 않으며, 마지막까지 자신의 그림이 자기만의 예술인지 누군가의 모방인지 괴로워하던 중섭의 모습은 시대와 사회를 떠나 오롯이 순수한 세계를 꿈꾸었던 한 예술가의 초상을 보여준다.

삶이 힘들고 외로울 때, 아니 어떤 때라도 상관없이 중섭은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조선인으로서 뿌리와 긍지를 찾고 싶었던 일제 치하에서는 조선의 ‘황소’를 끊임없이 그렸고, 먹을 게 없어 고생하던 피난 시절에는 과일과 게, 물고기 등 풍요로운 자연을 반복해서 그렸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이 보고 싶을 때면 종이건 담뱃갑이건 할 것 없이 아이들을 그려댔다. 그의 인생은 오로지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고, 그가 그린 그림은 바로 그의 인생 그 자체였다.

연극 <길 떠나는 가족>은 바로 이러한 이중섭의 삶, 그림 같은 그의 인생을 말 그대로 “그림처럼” 무대 위에 올린 작품이다. 중섭의 황소와 게, 아이들과 물고기들이 한지로 만든 오브제와 배우들의 연기에 힘입어 움직이는 그림이 되어 무대 위를 가득 채운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커다란 달구지 위에 나비와 아이들이 앉아 가는 ‘길 떠나는 가족’이 살아있는 그림처럼 구현된 채 무대 뒤로 사라진다. 단순하지만 임팩트 있는 오브제의 활용과 연희단거리패 배우들의 역동적인 동선에 힘입어 <길 떠나는 가족>의 무대는 그 자체로 이중섭의 그림이 되고, 또한 그의 삶을 그림처럼 그려내는 또 하나의 화폭이 되었다. 9월 10일부터 25일까지, 홍익대학교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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