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태 세월호 조사특위 위원장 “침몰하는 특조위, 지금이 골든타임”

글·원희복 선임기자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2016.08.16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흔히 ‘7말8초’는 중복이 낀 가장 더운 기간이다. 이 기간(7월 27일~8월 2일)에 광화문 한복판에 앉아 단식투쟁을 한다? 달궈진 아스팔트와 열섬효과로 섭씨 40도까지 오르는 도심 한복판에서 단식을 하기란 여간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다.

환갑이 넘은 나이로 보통 결기가 아니면 힘든 이 일에 나선 이가 있다. 이석태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위원장이다. 그는 변호사이자 공식 정부기구의 장관급 인사다. 법으로 될 것과 안 될 것을 누구보다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단식이 정도(正道)인가 생각하고 고민했다”면서 “세월호 특조위의 어려움을 국민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라고 단식에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지금 세월호 특조위가 침몰하는 골든타임에 몰려 있다. 절박하다”고 말했다.

서울대 조국 교수는 페이스북에서 그를 ‘신선 같으신 풍모 뒤에 가려진 금강불괴(아주 견고해서 좀처럼 깨지지 않는)급 내공에서 뿜는 장풍은 강력하다’고 평했다. 오랫동안 지켜본 조 교수의 인물평이 아마 맞을 것이다. 금강불괴 이상의 강단과 결기가 아니면 환갑을 넘은 나이에 이런 단식을 강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자는 그의 얼굴에서 ‘부드러움’ 혹은 ‘선함’을 봤다. 결기에 가득찬 얼굴이라기보다 착한 모습이다. 의외로 그의 내면도 그러했다. 그는 “단식은 법적으로 위법성이 없다. 집단행동도 아니고, 그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의사표현이다”라며 “나 개인·우리(특조위원)를 희생해 호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이석태 세월호 조사특위 위원장 “침몰하는 특조위, 지금이 골든타임”

의외다. 생명을 담보하는 단식을 하면서 ‘합법의 범위’를 준수하고 자신의 희생으로 상대에게 호소한다는 것이 그렇다. 당장 해양수산부 장관 멱살을 잡거나, 하다 못해 청와대에라도 달려가다 저지하는 전경을 끌어안고 목놓아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을 텐데 말이다. 그는 자신의 단식을 ‘장관급 인사의 운동권적 소통방식’이라고 비난하는 기자 칼럼을 쓴 기자도 옹호했다. 그는 “보수언론 프레임으로 나를 비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기자가 내가 한 말을 비교적 그대로 썼다는 것”이라며 “그 기자가 다음날 와서 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 기자는 억울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실정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또 지금까지 겪어봐서 알지 않는가. 이런 단식을 한다고 정부가 선뜻 특조위를 연장해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특조위 선장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조위가 밝혀야 할 것은 대통령의 7시간 행방, 세월호에 국정원 양우공제회가 투자했느냐 여부 아닌가.
“그것은 세월호 침몰 원인과 다른 문제다. 배가 이제 막 인양되고 있다. 아직 침몰 원인과 구조를 못한 이유에 많은 것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유서대필 사건 23년 만에 진실규명

수사나 재판 등으로 세월호 침몰은 안전을 감안하지 않은 구조 변경, 불법 과적, 이를 숨기기 위한 평형수 배출, 화물 고정(고박) 부실, 경험미숙 항해사, 무책임한 선장, 해양경찰의 관제 미흡, 해경의 태만과 불법 커넥션으로 구조 지연…. 이런 우리 사회의 총체적 부정과 부실이 일시에 작용한 것 아닌가.
“그것은 처벌에 대한 문제이지, 실제 침몰의 문제는 더 크다. 그것이 말끔히 정리되지 않았다. 지금 재판에서 침몰 문제만 해도 세월호의 급변침이 침몰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오히려 기계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일부에서는 다른 침몰 원인도 제기하고 있다.”

잠수함 침몰설, 일부러 닻을 내렸다는 고의 침몰설은 상식적인 사고와 건전한 판단을 하는 사람을 실망시키고 오히려 세월호 비극을 정략화하는 데 빌미를 주지 않을까.
“그럴 수 있다. 좋은 지적이다.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 특조위는 시종일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정치쟁점화가 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 사업을 하면서 토목(과학)을 정략화했다면 박근혜 정부는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경을 정치적 프레임에 집어넣어 버렸다. 야권 3당이 특조위 연장에 합의했지만 정부·여당이 선뜻 이에 동의할지는 미지수다. 그것은 온갖 방해를 겪은 이 위원장이 잘 알 것이다. 그렇다고 누구처럼 ‘시너통’을 들 수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선한 채식주의자인 그는 천생 ‘전투적’이지 못하다.

이 위원장은 195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서울에 있는 경복중·고등학교를 나와 1972년 서울대 화학과에 입학했다. 3년 동안 화학기호와 싸우다 질려버린 그는 문학이나 철학을 배우기 위해 인문계열에 재입학했다. 그러나 군대를 갔다 와 다시 법대로 진로를 바꿨다. 맞다. 그와 얘기를 나누고 있으면 그에게 문학이나 철학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7년 그가 헬렌 니어링의 책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번역한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 책은 자본주의를 등지고 자연에서 소박한 삶을 사는 경제학자 니어링 부부의 에세이다. 그는 이 책의 ‘한결같은 정직함’이 좋아 번역했다고 말했다.

이석태 위원장(왼쪽)과 민변 회원들이 7월 4일 서울 중구 저동 세월호 특조위 앞에서 활동기간 보장을 요구하는 ‘법대로 하자’ 1인 단식시위 출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이석우 기자

이석태 위원장(왼쪽)과 민변 회원들이 7월 4일 서울 중구 저동 세월호 특조위 앞에서 활동기간 보장을 요구하는 ‘법대로 하자’ 1인 단식시위 출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이석우 기자

소박한 자연에서 정직함을 꿈꾸던 문학·철학 청년이 어떻게 오만가지 사회의 악과 맞닥뜨리는 현실가인 변호사가 됐을까. 뒤늦게 법대에 진학한 이 위원장은 1982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1985년부터 변호사를 시작했다. 재조 경험이 없다는 점에서 기자의 “사법연수원 점수가 좋지 않았느냐”는 짓궂은 질문에 그는 웃으며 “졸업할 때 아예 판·검사가 될 생각이 없었다”고 응수했다. 그는 처음에 잘 나가는 로펌에서 일했는데, 기업 측 변론을 맡다 보니 노동자 측 주장이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잘 나가는 로펌을 그만뒀다.

그리고 찾은 곳은 법무법인 ‘덕수’다. 당시 을지로 허름한 빌딩에 있던 덕수에는 이돈명·황인철 등 우리나라 1세대 인권변호사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진정한 인권과 진보를 배웠다. 그는 이런 인연과 문학적 재능으로 황인철 변호사 평전 <‘무죄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펴냈다. 강금실(전 법무장관)·이정희(전 통합진보당 대표)·송호창(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진선미(더불어민주당 의원) 변호사가 바로 이 덕수 출신이다. 이 위원장은 현재 덕수 대표변호사다.

세월호 참사도 그렇지만 정부의 인권변호사에 대한 ‘은밀한 탄압’도 이뤄지고 있다. 덕수에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시절 과거사 진상규명위에 참여했다가 재심사건 변론을 맡은 변호사가 적지 않다. 정부는 이 변호사들에게 공직 재임 시 사건을 수임했다며 변호사법 위반으로 기소하고 있다. 그는 “결과에 관계없이 변호사를 욕보이는 것”이라고 분노를 나타냈다.

그 역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재심을 맡아 23년 만에 진실규명을 이끌어 냈다. 서울대 한인섭 교수는 그에 대해 “그는 인권변론의 중심에서 이탈한 적이 없다”고 찬사를 보냈다. 그는 한 젊은이의 삶을 망가뜨린 정부에 대해 “최소한의 유감표명이라도 해야 하는데도 아무런 말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기억에 남는 변론으로 호주제 폐지, 매향리 사격장 소음소송 등을 꼽았다. 그는 “최근 재일동포 간첩조작사건 재심 6명 대부분의 무죄를 이끌어냈다”면서 “사형 확정 사건이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은 것은 변호사로서 행운”이라고 말했다.

민변 창립 멤버, 거리의 변호사로 통해
이 위원장은 참여정부 시절,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 밑에서 공직기강 비서관으로 1년여 근무했다. 그는 현재 논란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우병우 민정수석이 건재하는 것에 대해 “내 공직 경험으로는 상상이 안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위원장의 역할 중 돋보이는 것이 바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을 만든 것이다. 그는 1988년 5월 박원순(현 서울시장)·조용환·김형태·이양원·박인제 변호사와 함께 민변 창립을 주도했다. 51명의 회원으로 시작한 민변은 현재 1000명이 넘는 회원으로 인권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민변 회장이던 2004년 12월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시국농성과 가두시위를 주도했다. 이 위원장은 또 2013년 12월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변호사들, 거리에서 민주주의 외치다’라는 집회에도 나섰다. 그가 ‘거리의 변호사’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저항 방식은 여전히 ‘천하의 부드러운 것이 천하의 견고한 것을 이긴다’는 노자(老子) <도덕경>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공세적인 싸움이 아닌, 수세적인 저항이다. 그것은 단식을 하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시국은 더욱 악화돼 민변 변호사까지 “헌법대로 하라”며 단식농성에 동조하고 있다. 최근 ‘인권 최후의 보루’임을 자부하는 사법부마저 스스로를 잃어가고 있다. 민변이 북한 식당 탈북자 12명에 대해 인신구제를 청구했고, 재판부도 탈북자들의 진술을 듣기 위해 참석을 명령했는데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 사법부가 재판 중 법적으로 능멸당했는데도 재판부는 그냥 재판을 마무리하려 하고 있다. 그는 참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법부 독립의 손상이다. 아쉽다. 그렇게 중요한 사건을, 사법 사상 처음이다. 법원이 명령했는데도 안 나왔다면 사법부는 민주적·법적으로 대응을 했어야 했다. 재판을 제대로 하지 않고 종료시키려 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소박한 법률가적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문학과 철학을 좋아했던 청년은 변호사가 되어 ‘한결같은 정직함’으로 사회를 광정할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부에서 그런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장관급 변호사’의 농성·시위·단식에도 무덤덤한 사회가 되어버렸다. 모든 것을 정략적 프레임에 집어넣고, 이를 탈피하려면 종북 프레임으로 또 옥죄는 음모적 기제가 작용한다. 사법부도 스스로 권위를 포기하는 마당이니 뭘 기대하겠는가.

자식 잃은 부모의 심경까지 정략화하는 ‘마키아벨리적’ 상대와 맞서기 위해선 그 역시 마키아벨리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일부 맞다. 그러나 이석태 위원장에게 그것까지 기대하기는 어렵고, 그것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잔인하다. 그는 미지근해진 생수 한 모금을 입에 넣었다. 올 여름은 유난히 덥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gnhyam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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