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농을 홀대하면 인류의 미래는 없다

2016.05.17

농업을 지속가능하게 만들어서 우리 모두가 건강하게 먹고 살려면 소농들이 마음 놓고 농사를 짓고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도 인류의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성이 더불어 보장되는 방식이 나와야 할 것이다.

2016년 4월 1일, 필리핀 남쪽 민다나오섬 코타바토(Cotabato)주의 주도(州都) 키다파완(Kidapawan)시. 다바오(Davao)와 코타바토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를 가로막고 시위를 하던 약 5000명의 비무장 농민과 소수민족(루마드족)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발포해 3명이 사망하고 116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88명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의 손에는 무기가 아니라 쌀을 담을 부대자루가 들려 있었다. 2015년 11월부터 시작된 최악의 엘니뇨(El Nino) 현상으로 인한 가뭄 때문에 먹을 것이 다 떨어진 굶주린 농민들은 당장 먹을 쌀을 지급하고 기근 대책을 수립하라고 요구하면서 3월 30일부터 고속도로를 점령했다. 이들은 막무가내로 쌀을 내놓으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주정부가 이미 이 지역을 재해지역으로 선포하고 1만5000부대의 쌀과 가뭄에 강한 종자를 기근 대책으로 지급하기로 약속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그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한 것뿐이었다.

키다파완시에서 경찰들이 농민들에게 이렇게 무참한 인권탄압과 폭력을 휘두른 것은 필리핀에서 소농들이 얼마나 소외된 사람들인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필리핀은 소수의 대토지 소유자들이 나라의 거의 모든 특권을 쥐고 흔드는 사회이며, 소농을 포함한 서민들의 55% 정도가 절대 빈곤선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토지의 불평등한 배분과 소농들의 열악한 삶의 뿌리는 식민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스페인 왕국은 스페인의 식민화에 기여한 군인, 성직자, 토착 지배층들에게 토지와 더불어 사법권을 부여하고 그들에게서 토지세를 징수했다. 대신 많은 수의 농민들은 소작농이 되었다. 대토지 소유자들의 기득권은 300년이나 되는 식민지 시대가 끝난 후에도 없어지지 않았다. 스페인에 이어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했을 때 이들은 관리들과 짜고 공유지 조사와 서류 위조를 통해 토지를 취득하거나 고리대금을 이용해서 압류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잠시 토지를 빌린다고 했다가 돌려주지 않거나 폭력을 동원해서 강탈하기도 했다. 필리핀이 마침내 독립을 한 이후에 몇 번의 토지개혁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지난해 12월 1일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백남기씨의 자녀들과 농민단체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한교황청대사관에 전달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서성일 기자

지난해 12월 1일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백남기씨의 자녀들과 농민단체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한교황청대사관에 전달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서성일 기자

다국적기업들이 좌지우지하는 농업
인민 권력 혁명으로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을 쫓아내고 1988년 단행한 토지개혁은 국토 면적의 약 33%인 800만ha 미만의 토지를 소농들에게 분배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소농들에게 분배된 토지 대부분은 생산성이 없거나 시장 접근성이 전혀 없는 지역이었다. 야당 출신이었던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은 포괄적 토지개혁을 법으로 제정하여 소작농이나 무토지 농민들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도 했으나 지주들의 반발로 흐지부지되었다.

역사가 좀 깊어서 그렇지 필리핀만 유별나게 소농을 소외시키고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개도국에서 소농들은 국내의 정치적 구조에서 소외되고 보호받지 못한다. 게다가 더 가슴 아픈 것은 소농들이 국제적인 범위에서 더 큰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농업이 다국적기업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산업으로 바뀐 탓이다. 소농들은 다국적기업의 압도적인 힘 앞에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전 세계 곡물 무역의 85%를 6개 기업이 독차지한다. 이들이 고려하는 것은 토지나 농업의 지속가능성보다는 이윤이다.

그래서 규모의 경제를 앞세워 대규모 상업농을 추진하고 농업을 공장식으로 바꾸고 있으며, GMO(유전자조작작물)를 계속 확산시키고 있다. 다시 필리핀의 경우를 살펴보면, 불완전하나마 시행된 토지개혁으로 겨우 토지를 되찾은 소농들이 다국적기업들과 직접 작물 재배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계약들은 불공정계약에 가까워서 오히려 빚만 잔뜩 지게 된다. 특히 바나나 재배에서 이런 상황이 두드러진다.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전 세계 바나나 수출을 독식하고 있는 5개 다국적기업 중의 하나인 치퀴타(Chiquita) 브랜드의 돌(Dole Food Co.)과 델몬트(Del Monte)는 필리핀에서 생산된 바나나와 계약을 체결한 후 수출을 하는 주요 다국적기업들이다. 이들은 소농들과 협동조합 형식으로 불공정 계약을 맺음으로써 골치 아픈 단체협약을 피하면서 이윤을 추구해온 것이다. 인도에서는 몬산토사가 개발한 GM 면화(살충제를 덜 쓰게 만들어서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하였다)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지만, 실제로는 비용이 더 늘어났고(살충제 비용, 물 사용료 등을 포함해서) 농민들이 늘어나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세한 소농들의 운명은 다국적기업들의 전횡 탓에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신세가 된 것이다.

대규모보다 지속가능성 높은 소농
이렇게 국내적·국제적으로 소외되고 배제된 소농들에게 기후변화(그리고 기후변화를 등에 업은 대자본들의 시장전략)는 이들이 직접 대응하기에는 너무나 큰 재앙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물론 엘니뇨와 같은 자연 재해는 미연에 방지하기는 어렵지만 그 대응 전략과 대책은 사회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회구조에서 열악한 지위에 있는 소농들을 위한 사회적 대응은 없거나 미흡했다. 필리핀에서 보았듯이 가뭄으로 굶주린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식량이 아니라 총알과 몽둥이 세례였다. 소농들은 이렇게 홀대되어도 되는 존재들인가?

유엔과 세계은행이 후원하여 2008년에 출간된 ‘개발을 위한 농업 과학과 기술의 국제적 평가’라는 보고서는 소규모 영농의 생산력과 지속가능성이 대규모 영농에 비해 더 높다는 연구 결과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농업이 지역에 뿌리를 두고 다양한 사회적·환경적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초국적 농민운동 조직인 ‘비아 캄페시나’는 생물다양성과 농생태론(전통적 영농기술과 현대 생태학을 결합한 영농법)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들도 다양한 소농 경작 시스템이 안정되면 전 세계적인 영양실조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윤을 앞세운 다국적기업들에 의해 소농들은 점차 역사의 무대에서 강제퇴장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게다가 소농들을 보호해야 할 국가는 오히려 해외 자본 유치를 한다면서 다국적기업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다반사다.

농업을 지속가능하게 만들어서 우리 모두가 건강하게 먹고살려면 소농들이 마음 놓고 농사를 짓고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엘니뇨와 같은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도 기금을 만들어서 피해 보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소농이 적절히 먹고살 수 있는 동시에 농업의 생태적 기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대응책이 적극적으로 모색돼야 한다. 그래서 인류의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성이 더불어 보장되는 방식이 나와야 한다. 소농을 외면해서는 인류의 지속가능성이 담보될 수 없다.

평화적으로 시위에 참석했던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서 사경을 헤매게 된 지 벌써 반 년이 다 되어간다. 그래도 이 정부는 아직까지 사과 한 마디가 없다. 쌀을 달라고 요구하는 국민들에게 총질을 하는 필리핀 정부와 우리 정부는 얼마나 많이 다른가? 이 정부가 소농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것은 정녕 불가능한 일인가?

<이상헌 한신대학교 교수·녹색전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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