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간 오지에서 듣는 ‘슬프디 슬픈 소리’

2015.12.15

어디선가 들려오는 슬픈 소리, 무슨 까닭인지 이 궂은 날에, 엄청난 비가 이틀에서 사흘씩 쉬지 않고 쏟아지는 날에 슬프디슬픈 소리가 하염없이 이어지는 굿하는 소리를 나는 그때 듣고 있었다.

큰 눈이 내렸다. 지난 3일, 새벽같이 일찍 나섰는데, 큰 눈 때문에 힘들었다. 일산에서 서울의 동쪽까지는 그런 대로 직진의 행렬이었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바뀔 무렵, 7시 즈음부터 북부간선도로에서 외곽순환도로의 구리 일대를 선회해 중부고속도로로 직행하는데, 꽉 막혔다. 대설! 큰 눈이 도로를 장악하여 아침 출근길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그래도 엉금엉금, 그 병목들을 빠져나가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중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을 지난 후 오히려 상황은 악화됐다. 거기서부터 호법까지 차들은 서행했고, 그 틈에 끼어 있던 나의 차도 뻑뻑거리는 소리가 날 만큼 와이퍼를 뒤흔들면서 주춤주춤거렸다.

상황은 영동고속도로를 버리고 중부내륙으로 갈아탄 후 더 악화되었다. 충주 부근에 이르러 마침내 차는 섰다. 내 앞과 뒤로 버스와 트럭과 승용차들이 브레이크를 단단히 잡고 섰다. 평탄의 도로가 아니라 약간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구간인데, 오르막을 오르던 차들이 무리하게 힘을 주다가 오히려 뒤로 역행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뒤로 미끄러지면서 갓길의 펜스에 부딪히고 나서야 멈춰섰다. 최대한의 억제, 미세한 컨트롤, 다만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는 힘만으로 우선 차를 움직이고 그런 후에 액셀러레이터에 발을 살짝 대는 힘만으로 겨우 오르막을 넘었는데, 그 후 펼쳐진 광경은 더 고역이었다. 차들은 스케이팅을 하고 있었다. 무리하게 운전대를 돌리다가 마치 역주행하려는 듯 거꾸로 돌아서서 난감해 하는 차들이 적지 않았다.

경북 영주시 부석면 소백산 자락에 눈 덮인 모습.

경북 영주시 부석면 소백산 자락에 눈 덮인 모습.

‘내 인생의 음악’이라고 할 만한 기억 
그때, 사이렌이 울렸다. 구급차인가? 아니었다. 다행이었다. 백미러로 보니 거대한 제설차가 눈보라를 일으키며 전진하고 있었다. 박수라도 칠 뻔했다. 다들 제설차를 위하여 한 뼘씩 공간을 만들었다. 이미 차선은 무의미해진 상태였으므로 갓길인지, 2차선인지 알 수 없는 쪽으로 조금씩 움직였고 그 비좁은 중앙분리대와 1차선의 영역으로 제설차는 압도적인 기세로 밀고 들어와서는 쌓여 있는 하얀 눈, 살짝 얼어붙은 눈, 온갖 도로 먼지와 뒤엉켜버린 시커먼 눈들을 거침없이 밀어내며 직진했다. 차들은, 그리고 나도 그 제설차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제동력을 상실하여 향로를 잃은 채 갓길에 처박혀 있던 차들의 운전자들이 간절한 구원의 눈길로 제설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 그들도 구출되리라.

공교롭게도 이 충주 일대는 여러 번 나의 행로를 가로막은 적이 있다. 물론 이 일대의 수려한 풍광과 의젓한 인심에 마음이 훈훈했던 기억이 한두 번이 아니므로 일부러 고약했던 일들만 기억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살면서 어쩌다 보게 되는 거대한 자연의 힘들을 나는 충주 일대에서 두어 번 보게 되었다는 얘기다.

올봄, 3월에 이 지면에 한 번 쓴 적 있지만 1985년 8월 중순, 엄청난 비를 맞으며 소백산에서 월악산으로 이어지는 36번 국도를 통과했던 기억 말이다. 자전거를 탄다기보다는 끌고 가다시피하면서, 하늘에서 쏟아지는 장대비를 뚫고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가다가 끝내 포기하고는 수산면의 어느 폐가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다음날 여전히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어느 농가의 담벼락에 기대서서 담배 한 대 피우다가 듣게 된 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슬픈 소리, 무슨 까닭인지 이 궂은 날에, 엄청난 비가 이틀에서 사흘씩 쉬지 않고 쏟아지는 날에 슬프디 슬픈 소리가 하염없이 이어지는 굿하는 소리를 나는 그때 듣고 있었다. 그때 들었던 그 소리는 내가 3월의 이 지면에서 썼듯이, ‘내 인생의 음악’이라고 할 만한 거룩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충주의 대설에 갇혀버린 것이다. 구원병처럼 달려온 제설차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다른 운전자와 다를 바 없이 갓길의 펜스에 처박힌 채 언제 도착할지 모를 랙카의 운전자만 재촉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제설차는 곤경에 처한 운전자들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중부내륙고속도로 중원터널 일대를 제압하며 길을 열었다.

하관 뒤 봉분을 올린 모습

하관 뒤 봉분을 올린 모습

그 바람에 많이 늦었다. 집안의 큰 어른이 별세하여 문상을 가던 길이었다.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상태였으므로 아침 이른 시간의 영결식은 참례하지 못하더라도 장지의 하관식에는 맞출 수 있지 않을까 하였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일족 가운데 최고 어른의 일이었으므로 경향 각지에서 여러 사람들이 소백산 아래 부석면이 내려다 보이는 야산으로 모였다. 나는 충주 일대의 대설과 삭풍으로 조금은 늦게 도착했다.

이미 하관은 끝이 났고, 동네 사람들과 인부들이 성토를 하고 있었다. 평탄하게 흙을 고르고 잔디로 일차 덮은 후 다시 고운 흙을 다지고, 다시 잔디로 덮고 그러는 중에, 무덤 한복판에 꽂아 놓은 긴 나무 작대기를 붙잡고 동네 사람들과 인부들이 돌아가면서 발로 흙을 또 다지곤 했다.

장례의 일이 늘 그렇듯이 일부러 농담을 섞어가며 일을 하는데, 참으로 슬픈 날이지만 또한 하늘의 날이라 눈까지 내린다는 정도는 덕담이고, 한 동네에서 수십 년 함께 살아온 사람들끼리 나눌 수 있는 스스럼없고 짓궂은 농담이 오가곤 했다.

슬픔의 소리는 가장 뜨거운 초월의 힘
그런 일을 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나무 작대기를 붙잡고 ‘자, 어때, 한 번 시작해 볼까’ 하는 순간, 나는 이 한반도의 익숙한 원체험대로 ‘오랜만에 전승 민속문화를 보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약간 마음이 설레었다.

달구소리라고 있다. 집터나 묏자리를 다지면서 부르는 노래다. ‘달구’라는 후렴구 때문에 붙은 노래인데, 이 말 외에도 ‘달고’ ‘덜고’ ‘달개’ ‘달호’ ‘달공’ 등 지역에 따라 그 후렴의 단어가 다르고, 하는 작업의 성격에 따라 사설이 달라진다. 강원도나 경기도, 충청도 지역에서는 ‘회다지 소리’라고도 한다. 이 지역에서는 흙을 단단하게 하기 위해 흙에 회를 섞기 때문이다. 전승의 자료들은 집터를 다지면서 후손들의 부귀영화를 기원하거나, 묏자리를 다지면서 망자의 넋을 달래고 유족들을 위로하는 가사를 보여준다.

내 고향의 소리, 경북 산간 오지의 소백산 아랫마을에서 전승되어온 ‘달구소리’를 들어보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나는 경건히 고개를 숙였다. 인부들은 나무 작대기를 붙잡고 돌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노래였다. ‘믿는 자 위하여 있을 곳’을 노래했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고인은 기독교 신앙이 독실했고, 그 가족들도 그러하여 오늘의 모든 힘든 일들을 동네의 신자들이 다 함께 울력으로 힘을 모은 것이었다. 그래서 누대에 걸쳐 전승된 민속문화는 들을 수 없었고, 산간오지에까지 뿌리내린 기독교 의식의 노래를 들었다. 곧 노래들은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겠네” 같은 씩씩한 노래들로 변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면 또 어떠한가. 고인이 불교 신자였다면 스님이 주장하는 가운데 ‘영가 천도’의 제의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모든 죽음은 개별 종교 의식이 제의 양식과 관련있되 본질적으로는 그것을 초월한다. 형식의 외피와 무관하게 슬픔의 소리는 결국 가장 뜨거운 초월의 힘이 된다.

“이 세상 작별한 성도들 / 하늘에 올라가 만날 때 / 인간의 괴롬이 끝나고 / 이별의 눈물이 없겠네 /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나는 그것을 1985년의 큰 장마 때 36번 국도에서 들었고, 또 오늘 부석면의 야산에서 듣는 중이다. 모든 죽음은 허망하고 고인을 떠나 보내는 자들은 슬퍼하며 스스로의 노래들을 부른다. 소백산 자락으로 거대한 눈들이 끝없이 펼쳐졌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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