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쇄, 두 남매 이야기>…낭만성으로 포장한 ‘막장’과 ‘금기’

2015.11.24

돈에 대한 욕망, 상대방에 대한 의심,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 같은 아침드라마에서 자주 보는 ‘막장’ 컨벤션이 펼쳐진다.
그런데, <족쇄>는 일일 드라마 수준의 막장에서 끝내지 않고 금기로 한 발 더 나아간다.

여성만화(순정만화라는 용어는 당대성만 인정할 수 있고, 여성만화도 대안은 아니지만 독자 중심 구분이라는 가장 원초적 분류에 한정한다) 중에 금기를 끌어낸 만화들이 꽤 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만화의 밭에 소년애와 동성애의 씨를 뿌린 다케미야 게이코 작가의 <바람과 나무의 시>가 있다. 무려 1976년도에 연재를 시작했다. 하긴, 일본 소녀만화의 출발점이라 평가 받는 테즈카 오사무의 <리본의 기사>는 한 몸에 남자와 여자의 마음을 동시에 갖게 된 사파이어 공주가 주인공인데, 1953년에 연재를 시작했다.

민송아 작가의 만화 <족쇄, 두 남매 이야기>의 한 장면.대원씨아이 제공

민송아 작가의 만화 <족쇄, 두 남매 이야기>의 한 장면.대원씨아이 제공

출소한 오빠와 여동생, 숨어 있는 진실
금기를 뛰어넘는 사랑은 평이한 사랑보다 훨씬 더 강력한 감성을 끌어낸다. 때문에 로맨스 장르는 금기를 욕망한다. <바람과 나무의 시> 이후 동성애는 강력한 금기의 기호로 여성만화에 호출되었지만, 야오이에 이어 BL(boy’s love)에 브로맨스(brother+romance)까지 장르가 확대되면서 금기의 벽은 한껏 낮아졌다. 반면 2015년에도 변함없이 강력한 금기는 ‘근친 간의 사랑’이다.

근친 간의 사랑은 일본의 포르노 만화에서 반복되는 컨벤션이거나 아니면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으로 애절한 사랑에 감성을 더한다. 2000년대 초반 박소희의 <리얼 퍼플(real purple)>(서울문화사)과 박은아의 <불면증>(학산문화사)은 모두 부모의 재혼에 의해 남매가 된 젊은 남녀의 사랑을 다뤘다. 2000년대 초반 같은 소재를 다룬 <리얼퍼플>과 <불면증>은 ‘금기로 인해 사랑의 감정을 억압당하는 두 남녀가 일상에서 늘 마주하는 괴로움’에 집중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가족의 평범한 일상인데, 사랑하지만 할 수 없는 남녀에게는 지옥 같은 괴로움이다. 두 작품에 등장하는 남매는 혈연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벽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 시절에서 10년이 훌쩍 지난 2015년(1권 출간연도는 2014년, 4권 완간은 2015년) 앞의 두 작품과 전혀 다른 사랑하는 남매를 그린 만화 <족쇄, 두 남매 이야기>(이하 <족쇄>)가 출간되었다. 10년 전 사랑은 근친이라는 금기를 넘지 못했는데, <족쇄>에서는 작품 안의 주인공들에게 근친은 금기가 되지 못한다. 동생 나현은 오빠 준현에게 다가가고, 오빠를 욕망한다. 오빠 준현은 동생 나현의 욕망을 이용한다. 출판사는 이 만화를 “감옥에 수감되는 오빠, 남겨진 여동생. 출소한 오빠와 여동생 앞에는 무서운 진실들이 숨어 있는데…. 복수와 사랑으로 얽힌 스릴러!”라고 소개했다.

<족쇄>는 나현의 회상(꿈) 시퀀스로 시작한다. 살인 장면을 묘사하며 ‘칼을 손에 든 동생’을 보여주고, ‘오빠는 내가 지켜줄게’라는 동생의 독백을 보여준다. 나현이 잠에서 깨면, 5년이 지난 현재 시점이 된다. 알려진 그날의 사건은 자폐증상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준현이 동생 나현을 강간하려는 아버지를 죽이고, 함께 있던 어머니마저 죽인 참혹한 존속살인사건이다. 준현은 죽은 아버지의 친구 임 변호사의 적극적 변호로 5년형을 받고 만기 출소한다. 임 변호사는 교도소 앞에서 기다려 준현을 차에 태워 나현에게 데려다 준다. 5년 동안 오빠를 기다린 동생은 과하게 오빠를 맞이한다. 나현의 회상 시퀀스와 준현의 출소 시퀀스, 그리고 남매의 재회 시퀀스만 보아도 아빠와 엄마를 죽인 건 나현이라는 사실과 나현과 준현이 남매 이상의 감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금 더 센스가 있는 독자라면, 임 변호사도 이들 남매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가정폭력이 초래한 살인사건
감옥을 나온 준현과 나현은 대형병원을 운영하는 부자 할아버지를 찾아가는데, 믿기지 않게도 아들 부부를 죽인 손자를 반갑게 맞아준다. 부자 할아버지를 정점으로 낯설지 않은 가족을 보여준다. 돈에 대한 욕망, 상대방에 대한 의심,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 같은 아침드라마에서 자주 보는 ‘막장’ 컨벤션이 펼쳐진다. 그런데, <족쇄>는 일일 드라마 수준의 막장에서 끝내지 않고 금기로 한 발 더 나아간다. 남매의 집착과 욕망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가정폭력을 설정하는데, 아버지가 사랑했던 여자를 닮았다는 이유로 아들을 강간하고, 새어머니는 그런 장면을 보고도 모른 척한다. 아버지에게 강간당한 준현은 고작 10살의 어린이다. 모든 불행의 시작은 아들에게 원하지 않는 결혼을 강요하고, 자식을 낳아 살고 있는 여자를 죽인 할아버지 때문이라고 말하기에 이미 감당할 선을 넘어버렸다.

가정에서 벌어지는 어린이에 대한 강간과 폭행은 오빠에 집착하는 동생, 동생을 이용해 복수하려는 오빠로 나간다. 그 결과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더 문제는 소아성애, 가정폭력과 같은 인간을 파괴하는 범죄가 <족쇄>에서는 낭만적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앞서 소개한 오프닝 시퀀스에서 오빠를 위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인 나현은 자신을 안데르센의 동화 <백조왕자>에 나오는 오빠를 위해 쐐기풀로 옷을 짓는 엘리자로 비유한다. 그녀의 살인은 동화적 아름다움으로 승화한다.

<족쇄>는 소아성애와 가정폭력을 현실의 문제로 구체화하지 않고, 비극적 낭만성(Tragic Romantic)으로 포장한다. 엄연히 현실에서 반복되는 비극이 낭만성으로 포장되고 나면, 사실은 남매가 아니었던 준현과 나현의 사랑,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우리만 남는다.
아침드라마를 막장이라고 놀려도, 김치로 뺨을 때릴 뿐이다. 아침드라마에 등장하는 엇갈린 가족관계는 복잡하지만, 소아성애자의 강간과 폭행 같은 가정폭력을 그리진 않는다.

비극으로 끝나고 마는 두 남매의 관계와 감정을 그리기 위해 현실의 누군가가 고통받을 가정폭력을 작품으로 가져와 결국 모두 죽는 낭만적 비극으로 끝내는 걸 보는 건 누군가에게는 불편을 줄 수 있다. 아버지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중년의 뒷모습이 아무리 멋지고 슬프다 해도, 그가 어린 친아들을 강간하며 사랑하는 여자를 기억하는 건 아름답지 못하다. 오빠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연민이 가득하고 해서, 그녀의 살인 역시 아름답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족쇄>는 고발의 대상도, 청원의 대상도 아니다.

<박인하 만화평론가·청강문화산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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