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세종특별자치시… 노무현 정부 지방분권 정책 핵심 행정복합도시로 ‘운명’ 바뀌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
2015.10.06

2002년 12월 19일의 제16대 대통령선거는 헌정사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낳았다. 16대 대선은 군인 정치시대를 끝내고, 이어진 3김시대를 마무리하는 첫 선거였다. 게다가 김영삼 정부의 3당합당, 김대중 정부의 DJP연대를 넘는 우리 정치사에서 ‘야합’과 ‘연대’를 벗어난 단독 세력의 첫 집권이었다. 또한 3김시대로 일컬어지는 ‘87년 체제’(1987년 체제를 규정·해석하는 것에 대해 다양한 접근·분석이 있지만)를 마무리한다는 의미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도 87년 체제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노 대통령이 “구시대를 정리하는 막내가 되고 싶지 않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맏형이 되고 싶다”고 말한 배경도 단독 집권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노무현 대선 후보의 선거공약으로 출발
2002년 9월 30일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선후보는 “수도권 집중 억제와 낙후된 지역경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와대와 정부 부처를 충청권으로 옮기겠다”는 ‘폭탄’ 선거공약을 발표했다. 사실 서울과 수도권의 집중현상은 매우 심각했다. 100대 기업 본사의 95%, 20대 대학의 80%, 의료기관의 51%, 정부투자기관의 89%, 예금의 70%가 수도권에 몰려 있었다. ‘서울 공화국’은 ‘서울 망국론’으로 인식됐다. 역대 정부도 중앙정부의 지방이양 정책을 추진했지만 대통령의 의지 부족과 수도권의 반발 등 현실적 어려움으로 번번이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청와대와 정부 부처를 이전하겠다는 노 후보의 공약은 거의 ‘막장 공약’이나 다름이 없었다. 막상 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많은 국민들은 ‘설마 수도를 이전할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 전국을 돌며 지방분권 토론회를 열었다. 그리고 정부 출범 한 달 반 만인 2003년 4월 신행정수도건설추진기획단과 지원단을 만들었다. 이 기획단은 3개월 만인 7월에 신행정수도특별조치법을 만들어 입법예고했다. 그해 12월에는 야당의 찬성 속에 신행정수도특별조치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매우 빠른 속도로 ‘공룡 서울’ 해체작업이 추진된 것이다.

세종시에 건설된 정부세종청사는 기존 정부청사 개념과 다른 건축양식으로 복도 길이만 3.7km에 이르고 있다.

세종시에 건설된 정부세종청사는 기존 정부청사 개념과 다른 건축양식으로 복도 길이만 3.7km에 이르고 있다.

그래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설마’했다. 참여정부는 정부혁신 지방분권위원회를 만들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업무와 조직, 세제와 예산 등을 전면 재검토했다. 행정수도 이전이 지방화의 하드웨어라면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는 지방화의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국가균형발전위원회를 만들어 중앙정부 산하 공공기관을 전국 중·소도시로 이전토록 했다. 수도권에 있는 180개 공공기관을 전국에 나누어 이전시키는 작업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참여정부는 아주 치밀하게, 빠져나올 수 없이 지방화를 추진했다. 언론은 물론 중앙부처 공무원·공공기관 직원들은 이전에 반발했지만 대통령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당시 행정수도 이전 실무를 담당하던 행정자치부 고위 관계자는 “행정이란 한 번 추진되면 중도에 멈추기 어렵다”면서 “혹시 여윳돈이 있으면 충청지역에 땅을 사두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노 대통령은 오래전부터 강력한 지역균형 정책, 그 중에서도 핵심인 행정수도 이전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지방’ 혹은 ‘비주류’의 신념과 비슷했다.

“묵은 과제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신행정수도 건설이었다. 나는 원외 정치인 시절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하면서 이 문제를 연구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대에 벌써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충청권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다. 국가의 균형발전을 이루고 서울의 도시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수도의 행정기능을 분리해 국토의 중심지역으로 옮겨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노무현 회고록 <운명이다> 2010)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2003년 1월 광주에서 열린 지방분권 국정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2003년 1월 광주에서 열린 지방분권 국정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행정수도 이전지역은 이미 박정희 정부가 만들어 놓은 계획이 있어 어렵지 않았다. 2004년 7월 중앙행정기관 18부 4처 3청(73개 기관)을 신행정수도로 이전하기로 확정했다. 8월 11일 드디어 연기·공주지역(충청남도 연기군 남면·금남면·동면, 공주시 장기면 일원 약 2160만평)을 신행정수도 입지로 확정했다. 행정수도 명칭도 ‘세종특별자치시’(세종시)로 확정해 이전의 법적·행정적 문제는 모두 완료됐다.

파문 일으킨 헌재의 ‘위헌’ 결정
그런데 뜻밖에 암초를 만났다.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서울과 수도권, 특히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극렬히 반대했다. 서울시로서는 일면 당연했다. 2004년 7월 서울시 시의원과 공무원들이 헌법재판소에 ‘행정수도 이전은 헌법 위반’이라는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행정수도 이전이 위헌 결정이 날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2004년 10월 21일 헌재는 의외의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수도는 헌법에 규정해야 할 사항인데, 법률로 정했으니 위헌’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 헌재 결정의 파문은 컸다. ‘사법 쿠데타’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헌재 폐지론’까지 나왔다. 결국 수도를 상징하는 청와대와 외교·국방·내무(행정자치)·통일·법무부 등 정부의 기본 부처는 서울에 잔류하는 것으로 수정됐다. 행정수도라는 수식어는 ‘행정중심복합도시’로 바뀌었다.

노무현 대통령 내외 등이 2007년 7월 20일 충남 연기군 남면 종촌리에서 열린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시’ 기공식에서 발파 버튼을 누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노무현 대통령 내외 등이 2007년 7월 20일 충남 연기군 남면 종촌리에서 열린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시’ 기공식에서 발파 버튼을 누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명박 시장은 2007년 대통령에 당선되자 “세종시 건설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세종시를 행정수도가 아닌, 경제·교육도시로 수정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표는 ‘국민과의 약속’이라며 원안대로 추진할 것을 주장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시켰다. 이는 ‘이명박·박근혜 갈등’의 원인이 됐다.

우여곡절 끝에 2012년 7월 1일 세종시가 정식 출범했다. 그해 9월 14일 신축된 정부세종청사에 국무총리실 이전을 시작으로 중앙행정기관이 옮겨가기 시작했다. 현재 대부분의 행정기관이 이전을 완료했고, 정부조직 개편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국민안전처와 인사혁신처도 곧 이전할 예정이다. 아울러 16개 정부출연 연구기관이 현재 이전 중이고, 성남시에 있는 대통령기록관도 세종시로 옮겨간다.

세종청사는 특이하게 벌판에 길게 나열된 모습을 하고 있다. 평소 산을 뒤로하고 사각형의 규격화된 건물 모습에 익숙한 우리의 관청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용의 머리(총리실)에서 용의 꼬리(문화관광체육부)까지 길게 이어지게 설계했다고 한다. 그래서 청사의 복도 거리만 3.7㎞에 이르고, 전동카트를 동원해 청소하고 있다. 이 세종청사가 건축미술적으로는 ‘명품’일지 모르지만 근무하는 공무원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이곳에 근무하고 있는 한 공무원은 “사무실이 사각형이 아니라서 활용하는 데 효율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세종시’ 기공식 축하 폭죽 / 경향신문 자료사진

‘세종시’ 기공식 축하 폭죽 / 경향신문 자료사진

80만명 수용 도시 목표로 2단계 공사 중
세종청사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이 청와대와 국회가 있는 서울을 오가는 ‘낭비’를 지적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지방분권 정책에 대한 평가는 아직 이르다. 현재도 행정기관과 공공기관 이전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에 비판적인 새누리당도 노무현 정부의 지방분권 의지는 높이 평가한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지난 5월 27일 경북 구미에서 열린 국회 지방살리기 포럼에서 “허허벌판에 그런 도시가 만들어진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큰 공”이라며 “노 전 대통령은 지방분권을 위해 굉장히 노력했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는 지난 5월 19일 전국분권단체 연석회의에서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은 우리 당의 정신이자 역사”라며 “노무현 대통령은 행정중심복합도시, 혁신도시 등 지방분권과 지역균형발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자평했다.

세종시 인구는 19만4173명(2015년 8월 말 주민등록 기준)이다. 세종시 관계자는 “지금도 한 달에 인구가 5000명씩 늘고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세종시는 인구 50만명, 주변 30만명 모두 80만명을 수용하는 도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6단계 공사 중 2단계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앞으로도 한참 공사를 더해야 한다.

세종시 주변에는 상가 및 아파트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세종시 주변에는 상가 및 아파트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세종시는 5가지가 없는 ‘5무(無)도시’를 추진하고 있다. 전봇대와 쓰레기, 담장, 입간판, 점포주택이 없는 쾌적한 도시다. 세종청사가 있는 도심 중심은 어느 정도 정돈된 느낌이지만 주변은 여전히 상가와 아파트 공사 중이다. 지금도 주말이면 아파트와 상가를 분양받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온다. 이에 따라 주말에는 극심한 교통체증이 벌어지고 있다. 이곳에 사는 한 주민은 “아직 이곳에 종합병원과 영화관 등 문화시설이 없어 불편이 크다”고 말했다.

세종시에서 아쉬운 것은 사라진 도시의 ‘역사성’이다. 원래 이 일대는 고려말의 충신 임난수(1342~1407) 장군이 터를 잡고, 부안 임씨 전서공파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온 곳이다. 600여년간 많을 때는 1000가구가 살았으며, 2만여기의 문중 묘가 보존돼 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흔적이 없다. 당초 세종시 건설 때 부안 임씨 민속마을 조성 얘기도 있었지만 흐지부지됐다.

세종시 관계자는 “현재 임난수 장군의 사당과 비석 등 유적 몇 개가 있을 뿐 과거 흔적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면사무소가 있던 곳은 홈플러스가 들어와 있다. 이곳에 과거 면사무소가 있던 중심지역이라는 안내판도 없다. 최소한 당시 면사무소 하나 정도는 보존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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