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개성공단-남북정상회담의 결실 합작품 관계 경색으로 겨우 명맥 유지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
2015.09.22

남과 북의 정치 권력자들은 서로 비난하거나 경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협상도 했다. 1972년 7월 4일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괴뢰’로 비난하던 북한에 보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이렇게 이뤄낸 7·4 남북공동성명은 남북정상회담의 시작이었고, 이때 합의한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이라는 3원칙은 남북관계의 기본정석이 됐다.

전두환 정권인 1985년 장세동 정보부장의 김 주석 면담으로 남북정상회담이 공식화됐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야심차게 북방정책을 추진한 노태우 정권에서 서동권 안기부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하는 등 다각도 남북 접촉이 이뤄졌지만 정상회담은 불발로 그쳤다. 1994년 6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통해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됐다. 남북은 부총리급 예비접촉 끝에 1994년 7월 25일 정상회담을 열기로 극적으로 합의했다. 그러나 7월 8일 김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정상회담은 실현되지 못했다.

정상회담에 기여한 현대에 대한 반대급부
남북정상회담의 ‘과실’은 김대중 대통령이 차지했다. 임동원 국정원장과 북한 김용순 통일전선사업 담당비서 간에 한 달간의 접촉 끝에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한 것이다.

6월 13일 오전 서울공항을 떠난 공군 1호기는 1시간여 비행 끝에 10시30분쯤 평양 순안공항에 착륙했다. 북한 김 국방위원장은 활주로 비행기 트랩 밑까지 나와 김 대통령과 악수하고 포옹했다. 김 대통령은 “남녘동포의 뜻에 따라 민족의 평화협력과 통일에 앞장서고자 평양에 왔습니다…”라는 평양 도착 성명을 읽었다.

북한 개성시 봉동리 일대에 들어선 개성공단은 원래 북한의 기갑 및 보병사단과 포병연대가 있던 자리다.

북한 개성시 봉동리 일대에 들어선 개성공단은 원래 북한의 기갑 및 보병사단과 포병연대가 있던 자리다.

김 대통령과 북한 김 국방위원장은 같은 승용차에 올라 평양시민의 환호를 받으며 숙소인 백화원 초대소에 도착,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 들어갔다. 3시간50분에 걸친 1차 남북정상회담 끝에 나온 것이 바로 6·15 남북공동선언이다. 5개 기본조항으로 이뤄진 6·15선언을 요약하면 첫째, 통일문제는 그 주인인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해결한다. 둘째, 통일은 남측의 연합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에서 공통점을 찾아 지향한다. 셋째, 이산가족과 비전향 장기수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푼다. 넷째, 남북 각 분야 교류 및 경제협력을 통해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킨다. 다섯째, 남측은 북한 김정일 위원장을 초청한다는 것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지역인 한반도에서 남북한 정상의 평화정착 노력에 대해 세계의 관심은 뜨거웠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 모리 요시 일본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 등 한반도 주변국가 정상이 축하했다. 남북정상회담은 2000년 세계 10대 뉴스 중 5위를 차지할 정도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김 대통령은 이 남북정상회담 공로로 그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2000년 6월 13일 북한 순안공항에서 김대중-김정일 남북 정상이 처음으로 만나고 있다.

2000년 6월 13일 북한 순안공항에서 김대중-김정일 남북 정상이 처음으로 만나고 있다.

이후 남북한 사이에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협력이 오갔고, 그 중 가장 가시적 성과물이 개성공단이다. 남북정상회담을 막후에서 성사시킨 주역은 바로 국정원과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다. 당시 국가정보원 국내담당 2차장을 지낸 김은성씨는 한 월간지에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직후 현대 고위 관계자들이 평양을 방문, 김정일 등 북한 최고위층을 만나 개성공단 건설 프로젝트를 구체적으로 협의했다”고 밝혔다. 당시 국정원 내부는 개성공단 건설에 반대했으나, 임동원 국정원장은 “경제적으로 효과가 크고 인건비도 적게 들어가니까 우리 기업에 이득이다, 경협이 잘되면 남북 평화도 빨리 온다”며 반대 분위기를 무마했다고 한다.

나중에 대북송금 특검 등에서 드러났지만 개성공단은 남북정상회담에 기여했던 현대에 대한 일종의 반대급부였다. 김 대통령은 퇴임 직전인 2003년 2월 14일 현대 대북송금 문제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이렇게 해명했다. “국민의 정부는 남북정상회담 추진과정에서 이미 북한 당국과 많은 접촉이 있던 현대 측의 협력을 받았다. 현대는 대북송금의 대가로 북측으로부터 철도·통신·관광·개성공단 등 7대 사업권을 얻었으며, 정부는 그것이 평화와 국가 이익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실정법상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용했다.”(임동원 회고록 <피스메이커> 2008)

개성공단은 2003년 6월 30일 1단계 개발이 시작돼 2004년 시범단지 생산품이 처음 반출됐으며, 2006년 1차 입주기업의 생산품이 반출됐다. 2004년 발표된 개성공단 세부 조성계획에 따르면 2011년까지 총 2000만평의 부지에 800만평의 공단과 1200만평의 배후도시가 들어서는, 남한의 창원시와 창원공단을 능가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여기에 2000개 이상 기업이 70만명의 북한 근로자를 고용해 500억 달러 이상의 물품을 생산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명실상부한 남측의 자본과 기술, 북측의 토지와 인력이 결합된 민족 공동번영의 ‘작품’이었다.

2007년 10월 4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2007년 10월 4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2007년 10월 4일 이뤄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의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는 개성공단 2단계 개발이 포함돼 있었다. 이때 합의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10·4선언)은 제1차 남북정상회담 내용을 보다 구체화하는 것이었다. 남북은 각 부문의 교류·협력과 백두산 관광, 이산가족 상설 면회에도 합의했다. 경제적으로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조성하고, 남북 철도·도로 연결, 조선단지 협력 등도 포함됐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10·4 선언은 한마디로 정리해서 남북관계 개선과 교류·협력을 풀어나가는 설명서이자 로드맵”이라고 말했다.

천안함 사건 이후 대북 신규투자 금지
하지만 남한에서 정권이 바뀌면서 개성공단은 시들해졌다. 급기야 이명박 정부는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침몰사건과 관련해 대북 신규투자를 금지하는 이른바 5·24조치를 발표했다. 이후 남북관계는 급속히 냉각기에 접어들었고, 앞서 합의했던 개성공단 확장계획은 중단됐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이명박 정부 시절 개성공단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김진향 카이스트 미래전략대학원 교수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우리 김하중 통일부 장관이 ‘북핵문제 없이 개성공단은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고 주장하는 등 이미 5·24조치 이전에 대북 신규투자와 추가 고용이 동결됐다”고 증언했다. 천안함 침몰 이전부터 대북정책 기조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후 제3차 남북정상회담은 지금껏 열리지 않고 있다. 사실 이명박 정부도 ‘은밀히’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다. 이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북한이 천안함 피격사건에 대해 유감 표명, 5억 달러 선지원을 요구해서 정상회담을 포기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2009년 측근 임태희 의원(후에 대통령 실장)을 싱가포르로 보내 북한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과 비밀회동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위키리크스가 미 국무부 기밀자료를 폭로하는 과정에서 드러났고, 후에 임 실장은 이런 사실을 시인했다.

이 대통령은 또 2011년 5월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을 통해 베이징에서 3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을 논의했으나 무산되기도 했다. 이 대통령도 처음에는 이전 정부가 추진한 햇볕정책을 거부했지만, 이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나름 모색한 것은 사실이다. 그만큼 남북의 권력자는 ‘정치적 의도’를 위해 남북정상회담에 집착했다.

이명박 정부가 내린 5·24조치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따라서 개성공단도 당초 건설목표에 한참을 미치지 못한 채 가동되고 있다. 오히려 박근혜 정부에서 개성공단의 운명은 더욱 위태로웠다. 2013년 2월 25일 출범한 박근혜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아슬아슬한 대북관계를 유지하더니 4월 26일 정부는 개성공단 내 잔류근로자 전원철수 조치를 내렸다. 금강산 관광객 피격에도 위태롭게 유지되던 개성공단 가동이 전면 중단된 것이다.

입주업체들의 눈물어린 호소와 관련 시민단체, 재계의 노력으로 9월 16일 겨우 멈췄던 공장이 재가동됐다. 개성공단 정상화 촉구 비상대책위원회(공동위원장 한재권)는 이 공로로 2013년 12월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홍사덕 대표상임의장)와 경향신문사가 주최하는 ‘제11회 민족화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개성공단 재가동이 남북관계에 얼마나 중요했으면 민족화해상을 줬겠는가.

개성공단으로 들어가기 위해 대기 중인 남측 기업체. 원래 2000개 이상 기업이 입주할 계획이었으나 현재 120여개 기업만 입주해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개성공단으로 들어가기 위해 대기 중인 남측 기업체. 원래 2000개 이상 기업이 입주할 계획이었으나 현재 120여개 기업만 입주해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당초 계획의 10분의 1 수준에서 가동
개성공단은 지금도 ‘힘겹게’ 가동 중이다. 오늘도 매일 아침 개성공단으로 들어가는 남측 통로인 도라산역은 붐빈다. 하지만 붐비는 것은 잠깐이다. 개성공단 측은 “123개 입주기업이 가동 중이며, 북한 근로자는 4만9866명이고, 누적 총생산액은 15억649만 달러”라고 밝히고 있다. 입주업체는 대부분 영세한 섬유봉제 업체지만 일부 기계금속, 전기전자 업체도 있다. 남측 근로자는 한창 많을 때 2500명이나 됐으나 지금은 800여명 수준이다. 생산량도 연간 4억6000만 달러 수준에서 정체돼 있다. 이는 기업수 2000개 이상, 70만명의 북한 근로자가 500억 달러 이상 생산하기로 한 당초 계획의 10분의 1 수준도 안 된다.

이렇게 개성공단이 지지부진한 것은 신규투자를 금지한 5·24조치가 원인이지만, ‘개성공단은 북한 핵개발의 돈줄’이라는 우리 일부 국민의 오해도 한몫하고 있다. 김진향 교수는 최근 발간한 <개성공단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개성공단 북한 근로자 월급이 70달러, 연장·야근, 간식비까지 다 합쳐서 평균 150달러 수준”이라면서 “중국 기업에 취업한 북한 근로자는 평균 300~400달러, 북한 근로자가 많이 간 중동에선 1000달러를 받는다”고 말했다. 개성공단이 북한의 돈줄이라는 주장은 천만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우리가 개성공단에 1년에 투자하는 돈이 임금·세금 등 모두 합쳐 1억 달러가 채 안 된다”면서 “공식적으로 5억 달러의 생산품을 가져오는데, 이것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공장도 가격으로, 실제로 환산하면 우리 기업이 15~30배 이득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개성공단으로 큰 이득을 보는 측은 북한보다 오히려 우리 기업, 특히 해외투자를 못하는 우리 영세기업이라는 얘기다.

개성공단이 북한 핵개발의 돈줄이라는 오해는 남측의 보수정치인과 일부 극우단체의 일방적 주장을 검증 없이 보도하는 언론 탓일 것이다. 김 교수는 “한국 언론은 개성공단에 대해 총체적 무지에 빠져 있다”면서 “특히 개성공단 기업인들은 제발 와서 보고 쓰라고 얘기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 역시 개성공단을 분단 이미지로 발표하고, 개성공단 취재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최근 박근혜 정부는 강경 일변도 대북정책에서 이산가족 상봉에 합의하는 등 화해 기류로 바뀌고 있다. 그 중 개성공단의 숨통을 죄고 있는 5·24조치를 해제할 것이냐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지난 6월 15일 6·15 선언 15주년 기념 국회 강연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통일대박을 얘기했으면 책임져야 한다, 결국 박 대통령도 6·15 선언의 길, 10·4 선언의 길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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